뒷섬마을 아이들이 학교 다니던 '학교길'
무주에 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무주에 어떤 연고라도 있어요?"라고 묻는다. 답은 "없다"다. 5월의 서창마을 풍경에 반해, 그저 좋아서 살게 된 것일 뿐.
무주에 정착하기 전까지 난, 무주를 잘 몰랐다. 이따금 덕유산 겨울산행을 다녀갔을 정도다. 요즘 나는 무주여행을 하고 있다. 무주의 알려지지 않은 속살을 찾아 펜션을 찾는 손님이 뜸한 주중이면 무주의 구석구석을 여행한다.
나의 여행은 언제나 사람이 중심이다. 특히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옛길이 주 소재.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옛길에는 이야깃거리가 넘쳐 난다. 하찮은 바위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 무성한 잡초 속에 숨겨진 잿마루에서 그곳을 밟고 지나 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좇는 일은, 나를 흥분시킨다.
우연히 지나는 길에 봤던 작은 표지판이 생각이 나 금강으로 달렸다. 무주읍내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금강은 무주사람들에게 있어 덕유산 보다 더 친숙한 곳이다. 서울에 산다고 맨날 남산에 가는 게 아니듯이, 무주 사람들 역시 덕유산에 갈 일이 거의 없다. 어쩌면 덕유산은, 낯선 곳이다.
무주 맛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어죽인데 바로 금강이 있어 어죽은 무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보양식으로 먹듯, 무주 사람들은 어죽을 끓여 먹는다. 내가 사는 서창마을 사람들 역시 가끔 천렵을 해서 가마솥에 푹 끓여 낸 어죽 잔치를 하기도 한다. 여름이면 금강에서 다슬기를 잡으며 더위를 식혔고,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요즘도 그런 풍경은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무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대처에 나가 살더라도 고향을 찾으면 어김없이 금강으로 달려 간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은 무주 사람들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금강변에는 독특한 지명의 두 마을이 있다. 앞섬과 뒷섬마을. 앞섬은 마을 좌우로 금강이 크게 U자를 그리며 흐르는 섬마을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 못지않은 물돌이동. 앞섬마을을 지나 만나는 뒷섬 역시 두 번의 강을 건너야 하는 섬마을. 앞에 있어서 앞섬이고, 그 뒤에 있다 해서 뒷섬인 셈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두 마을 사람들이 무주읍을 나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거나 산을 넘어야 했다.
그 길이 바로 '학교길'이다. 뒷섬마을 사람들에게 '학교길'은 외부로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 시절, 가방을 둘러 멘 아이들이 뛰기 시작하면 '달그락달그락' 양은 도시락통 소리로 요란했다. 보통 1시간 이상 걸어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기에 그런 풍경이 익숙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친구들과 이런 저런 놀거리들을 만들어 노닥거리 일쑤였고,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다. 아마도 3~40년 전의 기억들이다. 나 역시 섬진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뒷섬마을 아이들처럼 강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학교길’은 그런 추억이 서린 길이다. 오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학교길'의 시작은 뒷섬마을 입구 '후도교'.
다리를 건너 우측 강변길로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 절벽과 마주한다. 뒷섬마을 주민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 거대한 절벽인 질마바위를 정으로 쪼아 길을 냈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자국에 닳고 닳은 길이지만, 정과 망치로 닦은 길은 여전히 거칠고 험하다. 질마바위를 벗어나면 탁 트인 강변길이 나타난다. 왼편 산자락이 무주 읍내 뒷산인 향로봉(420m)이다. 산 너머 앞섬과 뒷섬마을은 나룻배 없이는 다닐 수 없었던 강마을로, 특히 뒷섬 마을은 강을 두 번 건너야 외부로 나갈 수 있었다. 학교길은 그런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생긴, 말 그대로 ‘학교 가는 길’이다.
두 사람이 손잡기 걷기 딱 좋은 폭의 강변 길을 따라 강 하류로 내려가면 길은 곧장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향로봉 자락 가장 낮은 고개를 넘은 길은 북고사 앞을 지나 깊은 숲으로 이어진다. 송림이 우거진 숲길은 푹신푹신하다. 오랜 세월 학교를 가고 장을 보러 다니던 옛사람들의 흔적이다. 조선 개국 직후 무학대사가 무주의 지세를 보완하고자 세웠다고 전해지는 북고사는 아담한 사찰로 잠시 쉬어가기 좋다. 북고사에서 길은 곧바로 무주 읍내로 이어지지만, 전망대가 설치된 향로봉을 거쳐 읍내로 내려서는 길이 좋다. 걸어 온 길이 한눈에 보이고, 물돌이동 금강의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무주읍 최고의 전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후도교에서 무주읍내까지는 두어 시간 남짓. 짧아서 아쉬운 길이다.
좀 더 여유로운 걸음은 앞섬 다리에서 질마바위를 지나 후도교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에서 느낄 수 있다. 오르락 내리락을 번복하면서 강변의 정취를 느끼며 걷는 길이다. 중간중간에는 쉴만한 정자가 있다. 후도교에서는 갔던 길을 되짚어 오기보다는 강 건너 강변 길을 권한다. 향로봉 자락을 바라보면서 걷는 이 길은 여울 물소리와 강변의 정취를 즐기기에는 그만이다.
'학교길'은 어느 날 갑자기 '맘 새김 길'이란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행정안전부에서 주관한 ‘녹색길 공모사업’에 선정돼 새롭게 단장한 것. '맘 새김 길'은 향로봉을 넘는 무주 읍내에서 출발하는 ‘여행 가는 길’과 후도교에서 앞섬 다리까지 가는 ‘강변 가는 길‘, 그리고 앞섬 다리 추모비에서 시작해 북고사 갈림길까지 가는 ’소풍 가는 길‘, 무주고등학교에서 북고사를 넘어 후도교까지 가는 ‘학교 가는 길’ 모두 네 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무주에 살면서 또 하나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면 "무주 사람 인가요?"다. 무주가 고향이냐는 얘기다. 고향이 아니면, '무주 사람'이 아니란 얘긴가? 영 맘에 안 드는 논리다. 무주에 살면 무주사람 아닌가. 심지어 이런 얘기 때문에 펜션에 온 손님과 대판 싸운 적도 있다. 물론 다른 이유에서 시작된 싸움이었다. 상대의 고향은 무주지만, 지금은 다른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이다. 노래방 기계 사용 문제였는데, 우리 집에서는 절대 안된다는 얘기에 대뜸 "당신 무주사람이야?"한다. 내가 타지역 출신인 것을 알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을 들먹인다. 뭔가 과시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종의 텃세였다.
"난 지금 무주에 살면서 세금을 내고 있는데, 당신은 무주를 위해 뭘 했나요?"
참 어처구니없는 싸움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난 '무주사람'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무주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난 무주를 알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랄까. 그런 이유로 난 틈나는 대로 무주를 여행한다.
2008년 5월. 뜬금없이, 서창마을 황토펜션 주인이 되었다.
지금은 펜션 주인이 아닌, 한 사람의 여행자로 여전히 서창마을에 살고 있다.
이 글은 그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