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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미잘 Mar 25. 2024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변명

못 그리는 어린이 특

오늘 미술 수업 주제는 관찰하여 그리기였다.

그리기 주제는 손.

수업 활동은 간단하다.

 

1. 관찰하기

2. 특징 찾기

3. 표현하기


관찰하여 그리기가 낯선 어린이들은 관찰하기를 소홀히 한다. 그러니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다. 전체적인 모습이 어떻고 비율이 어떠한가.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잘 그리는 어린이들이 많다. 천천히 시작점을 찾아 그리는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전체적인 덩어리를 잡고 세밀하게 그려나가는 어린이도 있다. 모두 조심스럽게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리기에 자신이 없는 어린이들은 손을 대고 그리면 안 되겠냐고 투정이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 반드시 보고 그려야 한다, 계속해서 보면서 그려라 강조한다.

그러나 역시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상상화들이 속출한다. 손가락 두께가 일정하게 올라가도록 그린 그림, 손날이 반듯한 그림, 손톱 모양이 모두 똑같이 생긴 그림 등등. 보고 그리기를 포기한 결과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한 어린이들은 조심스럽게 선을 긋는 대신 대범하고 힘 있게 선을 긋는다.

될 대로 되라지 모드다.

대충 그린 선 위로 몇 가지 선들을 더 추가하고 그림 그리기를 마친다. 수업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어색한 그림을 완성작이라고 내민다. 본인은 원래 그림을 못 그린다면서 그럼에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보고 그리기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와 관계없이 할 수 있다. 새끼손가락을 엄지 손가락보다 게 그리는 데에 무슨 대단한 실력이 필요하겠는가.


대충 그린 어린이들에게 다가가 다시 그리도록 지도한다.

손을 잡고 선을 조금 그어준다.

"여기서부터 차근차근 선을 그어가 보는 거야. 눈으로 보면서 말이야. 빨리 그리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그려. "

나아지는 속도는 더디다. 지도 한 번에 갑자기 빵 하고 깨달아 잘하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른 어린이들 그림 그리는 걸 보느라 한 바퀴 돌면 어느새 다시 완성된 두 번째 그림이 있다. 성에 차지는 않았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아졌다고 칭찬한다.


이상한 일이다. 왜 그림을 못 그린다는 어린이들일수록 대충 그리는 걸까? 자신이 없으면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려야 할 텐데 말이다.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대충 그리려 했기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레 그리는 걸 포기했기 때문에 못 그리게 된 것이다. 그들의 어설픈 손 그림은 성급한 어린이들의 성마른 포기가 가져온 결과물이다.


어떤 어려움들은 능력의 부재 이전에 마음가짐의 문제, 혹은 인지의 문제가 선행한다. 그게 어디 어린이들의 미술활동뿐일까? 내가 포기해 버린 것들에는 무엇이 있나, 그리하여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변명하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 돌아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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