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와 해먹 사이

by 말미잘

소파에 눕는다. 소파를 보면 눕는 것이 당연하다. 쿠션 사이로 몸을 묻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힘들다고 느낀다. 정말 힘들만한 일을 했나? 누워서 피곤한 건지, 피곤해서 누운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몸을 가진다는 건 원래 피곤한 일이 아니겠냐고 자답한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은 원래 존재만으로도 무겁고 괴롭다.

얼마 전에 살이 좀 쪘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육아 휴직으로 출근하지 않은 지 한 달 째다. 첫째를 키우면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사람을 좀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바지런한 부모들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생활에 힘이 빠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체력이 떨어진다고 느낀 후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몇 바퀴를 돌기도 했었다. 터져 나오는 텅 빈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른 아침부터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유모차를 밀며 공원을 달릴 수는 없고, 너무 오랜 시간 아이를 밖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신경 쓰였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온종일 피곤했다.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아이를 두고 소파에 누워 기절하듯 잠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루는 물에 잠긴 듯이 먹먹했다.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는 분명 그런 무기력이 자리 잡고 있다.


둘째는 아내와 같이 육아휴직을 냈다. 나는 3개월, 아내는 1년. 같이 하는 육아휴직에 기대가 많았다. 아내와 같이 육아를 하면 혼자 말 못 하는 아이와 하루 종일 있지 않아도 된다. 서로가 지칠 때 교대로 도와줄 수 있다. 그런 기대. 물론 혼자 육아할 때보다 훨씬 편했으나 살이 찌고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똑같았다. 해야 할 일도 미루고 계속해서 쉬고 싶었다.


침대에 눕기가 너무 본격적이라고 느껴지면 소파에 누워있는다. 소파는 양심의 가책을 좀 덜어준다. 집에 있는 가죽 소파는 장모님이 본인 집에는 너무 큰 가구를 들였다며 주신 물건이다. 팔걸이가 높아 누울 때마다 목이 불편하다. 앉으라고 만든 건데 누운 사람이 잘못이라고 훈계하는 듯한 높이다. 그래도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한다. 그렇게 누워있다 보면 하고 싶었던 일이나 계획했던 일을 슬쩍 뒤로 미루게 된다. 게을러지는 것이다. 소파에 눕는 것과 게을러지는 것은 강력한 고리다.


게을러서 체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체력이 떨어져서 게을러지는 것인지 고민했다. 게으르거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둘 다 결과에 불과하다. 원인은 소파에 눕는 행동이다. 일단 누우면 내 몸은 체력을 떨어뜨리고 무기력 모드로 들어간다. 몸이 반복적인 누워있음을 통해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학습한 것이다. 이를 고치기 위해 내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탓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고쳐야 할 것은 내 몸이었다.


몸을 고치기 위해 매일 2~30분씩 간단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첫째를 등원시킨 후에 아침 달리기를 하거나 맨몸운동으로 이루어진 인터벌 트레이닝을 했다. 오랜만에 운동이라 짧은 운동만으로도 근육이 뻐근했다. 운동을 하고 나면 씻고 아침에 계획했던 일을 해치우려고 노력했다. 할 일 목록에 적은 일들을 순서대로 처리해 가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부산하게 움직이며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쉬어야 했다. 누워서 쉬든 앉아서 쉬든 쉬는 것은 더 이상 게으름이 아니었다. 움직임과 부지런함에 대한 보상이었고 필요한 일이 되었다.

움직였으면 쉬어야 하고 충분히 쉬었다면 다시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과 쉼이 하나의 리듬처럼 느껴졌다. 그것 역시 하나의 고리였다. 움직임도 쉼도 좀 더 즐거워졌다.


사실 나는 집에 소파 대신 커다란 실내 해먹을 놓고 싶었다. 이왕 눕는 거 좀 더 본격적으로 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해먹은 눕는 가구면서 오래 누워있기엔 불편하다는 점이다. 누워있되 다시 일어나야 하는 가구라니, 매력적이다. 언젠가 꼭 사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 해먹이 나를 좀 더 명료하고 건강한 삶으로 옮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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