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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25. 2018

바다에 안부를 묻는 일(1)

 바다는 근방을 맴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멀리 떠나지 못하고 어영부영 사는 사람처럼, 철저히 멀어진 섬 같다. 아이는 틈이 나면 바다를 찾았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건 이곳에 얼마 남지 않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파도는 제멋대로 불어오는 바람에 수시로 뒤척였다.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겨우 나온 말이라도 아이에겐 별 관심거리가 못됐다. 하여, 아이는 매일같이 말 대신 소리를 들으러 바다를 찾았다. 어느 땐 사람 말보다 바닷소리가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안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해도. 그래도, 어떤 여운이 내부에서 깊고 길게 이어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아이는 섣불리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시하고 하찮은 답장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처음, 아이가 작은 입을 벌려 꺼낸 말은 이랬다.


"괜찮니."


 말은 분분히 떠다니다 이내 파묻혔다. 아이의 젖은 발바닥처럼 말들은 잠겨 가라앉았다.


                                                                               ******


 그즈음, 아이의 부모는 형편이 어려웠다. 서서히 삶의 규격을 최소한으로 좁혀 나갔고, 마침내 아이까지 덜어내야 했다.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먼 길을 달리는 동안 쉬지 않고 울었다. 그렇게 퉁퉁 불은 눈은 작별을 한 이후에도, 얼마간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한 동안 아이는 마루에 덩그러니 앉아 종일 울어댔다. 서러움에 복받쳐 울음을 쏟아냈다. 울음은 이 적막하고 따분한 동네에서 활력을 가진 유일한 소리였다. 그래선지, 아이를 어르거나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역시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 있다, 밥을 차려 떠먹이고 발가벗겨 몸을 씻겨줄 뿐이었다. 하루 이틀을 실컷 울던 아이는 점차 울음을 그쳐갔다. 기력이 쇠했다기보다 정성이 미안해서였다.


 인적이 드문 동네였지만, 그럼에도 소문을 듣고 기어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할머니는 민박집을 했다. 가끔 매운탕집에서 생선을 손질하거나, 일을 도왔다. 할머니는 궂은 날에도 도통 쉴 줄을 몰랐다. 아이는 곧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바뀌어갔다. 피부가 검어지고, 머리는 잡초처럼 무성해졌다. 그리고 몇 가지 맛을 익혔다. 조그만 입구멍으로 갖가지 음식들을 삼켜가며, 단단한 이로 씹고 으깨 버릇하며 배운 것들이었다. 이제 아이는 뼈째 들어오는 생선의 살점을 거부감 없이 잘 만 먹었다. 하나의 풍미를 깨우쳐갔다. 그러면, 할머니는 아이에게 '거 놈, 애 같지 않게 잘 삼킨다'거나 '누구 새낀지 먹을 줄 안다'며 시험하듯 뭔갈 더 입에 넣어보려 했다. 말들은 하나같이 포악하고 무성의해 보였지만, 막상 그 말들을 듣고 나면 아이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맛에 깃든 배부른 말을 받아먹으려 주는 족족 목구멍으로 욱여넣었다. 어느 낱말들은 입안에 사탕처럼 간직해 오래 맛을 보기도 했는데, 그러한 단어들은 점차 아이의 말이 되었다. 훗날 부모가 제가 난 자식에게 새삼 어색함을 느꼈던 이유도, 바로 이 말들 때문이었다.



 아이는 한동안 우쭐한 얼굴로 동네를 쏘다녔다. 참견을 걸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말이다. 도대체 아이가 '왜 그런 표정을 들고 있는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추측컨데 아이는 이곳의 무언갈 제법 깔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곳에 늘상 지속되는 무료함이나 거짓 없는 소박함같은 걸. 어쩌면 너무 한결같아, 그 평화로움이 조금 우습게 보였던 걸지도 몰랐다. 아이가 동네 슈퍼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그랬다. 차마 슈퍼라 말하기에도 민망한 구멍가게였지만, 아이는 그곳에서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여기는 뭐가 없냐던가, 하며 계속해서 딴지를 걸었다. 물론, 정말 무언갈 찾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발견의 기쁨보다는, 부재가 주는 어떤 만족이 아이는 더 좋았다. 결국에야, 듣다 못한 아주머니는 가게 방문을 열어젖히며 지겹다는 듯 소리쳤다.


"그런 건, 니네 집에서나 찾어!"


 바람은 쉼 없이 불고, 연약한 몸을 가진 것들은 적당히 흔들리는. 가장자리에 걸친 수많은 땅끝 중 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대게 말 수가 적었고, 말이 없어 하루가 지겨웠다. 아이는 종종 말이 고픈 듯 숨을 쉬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자그맣게 벌어진 입 속으로 소금기가 벤 바람이 들어찼다. 아이는 혀에 닿는 그 짜고 비릿한 기운이 좋았다. 다른 무언가에 몸을 의탁해 먼 길을 실려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움직임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 센가 마음이 축축해졌고, 어설픈 기시감마저 일렁였다. 아이는 이러한 내음이 주는 어렴풋한 실체감을 확인하러 바다를 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안부를 묻게 된 거였다. 괜찮냐고. 명징한 감각으로 느끼되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겨우 꺼내 든 익숙한 말이었다.


 이제 아이는 울지 않는다. 더 이상 아이가 울지 않는 동네에선 그나마 남아있던 활력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아이는 외로웠지만, 그 외로움도 영 지루한 것이어서 금방 싫증을 느꼈다. 어디론가 향하는 날이 잦았다. 머리가 벗겨진 민둥산을 오르고, 뱃사람들이 터놓은 물길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간 밤 꿈을 스스로 해몽하다 다시 졸기도, 간이 센 생선의 살점을 바르며 벤 소금기에 간지러움을 타기도 하면서. 저녁이면, 할머니는 고기 배를 따 내장 냄새가 눌어붙은 손으로 몸을 닦고, 쌀을 씻었다. 할머니는 종종 자신의 몸을 씻으면서도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할미 냄새나지?"


 사방 어디서든 불어오는 바람처럼. 물에 잠긴 듯 허다하게 맡아지는 게 바닷 내였으므로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


 어느 날 오후. 할머니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일찍부터 바닥을 빗질하고, 미뤄둔 빨래를 널고, 음식을 재웠다. 손님이 오는데 자리 하나쯤 마련할 수 있겠냐는 부탁에, 선뜻 승낙을 했던 탓이었다. 손님은 앳되고 서글한 표정을 가진 사내였다. 특히 눈이 커, 뭐든 더 보고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는 분뇨가 나는 폐가를 기웃거리고 돌아온 후, 그런 사내와 마주쳤다. 그리고 단 번에 사내가 외지인인 걸 알아챘다. 자신이 한 번 가져본 적도 있는. 그러나 얼마 못가 잃어버린 어떤 단정함과 공손함, 말끔한 안색이 사내의 표정 위로 설핏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사내가 좋아졌다. 다른 무엇도 아닌, 하나의 사건처럼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렜다. 그날 밤. 아이는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건너편 부실한 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기척을 귀하게 숨죽여 듣느라 그랬다. 할머니는 옆에서 고이 잠을 청하다 거센 기침을 했다. 소리는 버겁고도 축축했다. 언뜻 바닷소리 같기도 했다. 철썩. 아이는 화들짝 놀라, 가지런한 눈빛으로 할머니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곤 바다에 안부를 묻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다시 한번 물었다.


"할머니, 괜찮아?"


 할머니는 말 대신 이그러진 소리로 웅얼거렸다. 해석될 수 없는 소리였으나, 괜찮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내심 안심했다. 실은, '괜찮냐'고 물어본 뒤, 걱정이 아닌 다행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까닭이었다. 아이는 '괜찮냐'고 말하면서, '괜찮다'는 말 외의 답을 바래본 적이 없었다. 상상해본 적은 있긴 해도,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는 마저 귀를 기울였다. 앞마당으론 소금기가 낀 바람이 웅크려 불고, 사내의 말들은 희미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시골의 밤은 유독 컴컴해,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이번엔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메아리쳤다. 노랫말은 바람에 헝클어져 채 들리지 않았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그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서 생기는 속 좁은 이해심과 비슷했다. 자세를 돌아눕는 기척과 함께 철썩, 또 한 번 기침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전. 문 너머로 들려온 소리. 사내가 노래에 맞춰 허밍 하는 소리가 참 자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노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방 안. 풀벌레 소리가 외풍처럼 서늘하게 울렸다. 아이는 꾸벅꾸벅 졸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었다. 간간히 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는 아침부터 조용히 김을 밥에 찍어 넘겼다. 할머니가 일찍부터 일을 나가는 바람에, 사내와 단둘이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탓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손으로 생선 살점을 발라 집어 먹었을 텐데. 사내가 보는 앞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종종 눈치껏 사내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무심하나 선하고 맑은 표정이었다. 그러다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사내가 물었다.


"왜 밥을 잘 안 먹니, 어디 아파?"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맛이 없어?"


 아이는 보란 듯이 제 앞에 놓인 반찬 하나를 얼른 집어먹었다. 오물오물 작은 입이 움직이는데, 사내는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곤 깻잎 한 장을 손으로 들어 얹어주었다.


"이거 맛있다, 먹어 봐."


 아이는 제 밥 위에 올려진 까만 깻잎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먹던 음식이고, 아는 맛인데도 이상하게 선뜻 먹기가 망설여졌다. 그러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고등어의 가시를 바르거나, 국을 떠 마시는 행동이 어떤 신호로 사내에게 전달이 될까 봐서였다. 행위 하나하나가 인사가 되고 악수가 되고 고백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작, 자신은 말 한마디 붙여 보려 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목구멍으로 꿀꺽 밥을 넘겼다. 사내가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랑 둘이 사니?"


 사내가 물었다.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잘 먹네, 할머니 말은 잘 듣고?"


 아이도 사내처럼 무언갈 표현하고 싶었다. 철저히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멋쩍어져 밥을 삼키다 말고 처마 끝 어딘가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의 소리가 남아, 다시금 불어와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사내는 여전히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다.


 하루, 이틀. 며칠이 흘렀다. 아이는 더욱 까맣고, 까맣게 타들어갔다. 할머니는 일을 가지 않는 날이 점차 늘었다. 식당 쪽에서 그만 쉬시라 말한 덕이었다. 평소 '아프다'소리 한 번 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근래 어디가 쑤시고 시리다는 말도 잦았다. 막상 '괜찮냐' 물어오면, '괜찮다' 대답은 잘 해놓고 그랬다. 아이는 자신이 물어오는 말과 다르게 '아픈 기색'을 자꾸만 드러내는 것이 서운했다. 말에 감춰진 괴리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물론, 걱정되기도 했으나 같은 말을 반복해 묻는 데에 조금 짜증이 났다. '아프지 않다'고 할 거면서, 애초에 왜 자꾸 '아프다'소릴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아무 말 않고 반응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스스로 불편해 얼마 못가 그만두었다. 그런 불편함을 자신이 느껴야 한다는 점도 아이는 못마땅했다. 그리고, 그즈음 아이는 정작 사내와 어울리느라 바빴다.



 아이는 사내의 뒤를 수줍게 쫓으며 알짱거렸다. 그때도 사내는 어김없이 멍청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는 걷다가 멈추고, 길을 잃은 듯 방향을 휘저었다. 종종 외로움이 몰려든 발끝을 털어내거나, 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괜히 들꽃에 코를 가져가는가 하면, 코를 훌쩍이며 사내를 힐끗거리기도. 몸이 쪼그라들 만큼 긴 숨을 내쉬기도 했다. 사내는 그런 아이의 소란스러움이 신경 쓰여 뒤를 돌아봤다. 외로움이 부산스럽게 몸을 들추고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


 사내는 아이에게로 가 지긋이 손을 감아쥐었다. 순간, 아이의 몸이 가볍게 바들거렸다. 아이는 고분고분 사내의 걸음을 따랐다.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했다. 알 수 없어도 좋고, 몰라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아이는 걷는 내내, 비스듬히 얼비치는 사내의 얼굴을 훔쳐봤다. 함부로 속일 수 없을 만큼 선한 얼굴이었다. 벌써 며칠이 흘렀건만, 사내는 아직도 피부가 새하얗고 말투도 고왔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결코 훼손되지 않는 고유한 무엇처럼, 여전히 말끔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선지 사내는 낯설면서도 순한,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자꾸만 달라붙고 싶게 만드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가 사내를 '알고 싶다'고, 느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바다는 그간 지치지 않고,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바람은 연신 불고 불어, 아이는 또 입맛을 다셨다. 방파제엔 멍처럼 이끼가 가득 끼어 있고, 바다는 퍼렇다 못해 검게 시들어 있었다. 다 타버리고 남은 재 같다.


"좀 춥지?"


 말 사이마다 바람이 불었다. 자주 파도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머리를 저었다. 이어 사내는 얼마간 일상적인 말들을 늘어왔다. 어디서 왔고, 공부는 잘 하는지. 밥은 잘 먹는다던가, 혹은 심심하진 않다던가 하는 식의 얘기들이었다. 아이는 별 볼일 없고, 시시한 말들이 주는 식상함과는 별개로 한껏 들떠 있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그래도 뭔갈 물어온다는 것이 좋았다. 아이는 제 손을 내리보며 하나하나 차분히 대답했다. 새카맣게 탄 손가락을 보는데, 전에 없던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필, 지금 이때 사내가 찾아온 것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너는 뭐 궁금한 거 없니?"


 아이는 제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놀라,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찌 저리도 눈이 맑을 수 있을까, 묻고 싶었다.


"궁금한 거요?"

"그래, 궁금한 거."


 아이로선 사내가 이곳에 온 뒤로, 가장 궁금했던 사실이 하나 있긴 했다. 사내가 도대체 이곳에 '왜' 왔을까 였다. 그렇지만, 섣불리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처럼 도착한 사람이라면, 그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한데, 사내가 저리 노골적으로 물어오는 시늉을 한다면. 그러면 무례한 질문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이는 망설였다. 그건 일종의 허락이니까. 책임을 어느 정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사내가 아이를 주시했다.


"이곳엔 왜 왔어요?"


 아이는 잠시나마 사내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아챘다. 그런 건 굳이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금방 표가 났다. 사내가 되물었다.


"궁금하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의 입이 눈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아이는 사내의 기척에 예의 바르게 집중했다. 사내는 한숨을 쉬며 뜸을 들였다. 파도가 치고, 저 앞에선 여행객이 위태로운 자세로 낚싯대를 쥐고 있었다. 뭔갈 길어 올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건 말이야..."


 아이는 숨을 조였다. 한데 그 순간, 저쪽 무리에서 신경질적인 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아이, 이게 뭐야. 하."


 아이는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사내의 말은 아이에게 채 도착하기도 전, 순식간에 갈라져 사라져 버렸다. 잃어버렸다던가, 잊으려 한다던가 하는 내용인 것 같았는데, 아이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건너편, 낚싯바늘에 걸린 꺼먼 비닐을 손에 들곤 어이없어하는 모습들이 비쳤다. 그리고 말을 마친 사내의 얼굴은 이상하게 슬프고, 쓸쓸해 보였다. 그 사이, 한 사람과 작별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사내가 한 말. 그중 다 듣지 못하고 태반을 쏟아버린 말들을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뭐가 됐든 이곳에 온 이유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이는 또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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