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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18. 2018

상냥한 백색(3)

아버지와 달리, 나는 순조로히 적응해갔다. 애초에 내겐 어긋날 세계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서서히 회상이란 걸 해 버릇했다. 기껏해야 어렴풋이 뭔갈 떠올려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오래 들여다보고 있음 어떤 막연한 향수에 마음이 젖어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쥔 말의 가짓수를 셈해본다던가, 마음을 혹은 말을 의심해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어느 기억들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신중히 증발해 없어지기도. 가끔은 내가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잔류해 난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은 단순히 내가 상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마치,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의도가 내 몸에 쌓인다는 뜻 같았다. 어쨌든, 내 기억 속엔 보통 아버지가 등장했다. 아버지가 신문을 근엄하게 읽어 내려가거나 확성기 마이크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면, 나는 공을 튀기고 쭈쭈바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빨아대며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건너보는 식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여러 실루엣으로 제각기 변주되며 희미하게 그려졌다. 우리가 취하는 모습이라던가, 내보이는 행동들은 늘상 해오던 것이었으므로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를 그토록 빤히 지켜봐 왔다는 '시선' 자체가 조금 신경 쓰였다. 나는 무지에 가까운 멍청한 눈으로 아버지를 한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해코지할 순간을 위해 누군가의 잘못을 담보처럼 간직하듯 그랬다. 어쩌면, 이 기억을 오래 움켜쥐고 가겠다는 결연한 의사 표현 같은 걸지도 몰랐으나, 그러기엔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 '시선'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의도와 무관하게 자라 갔다. 계절도, 바람도, 그 모든 '이치'라 할만한 것들이 그렇듯 그저 평소대로 지나가고, 불고, 흘러가기 바빴다. 별 다른 이변도 없었고, 그렇기에 사소했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가을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힐끔 훔쳐보며 콩주머니에 팥이나 강낭콩 따위를 욱여넣고 있었다. 박을 터뜨릴 때 쓰일, 운동회 소품이었다. 그 밖에도 페트병에 자그마한 구슬 몇 알을 채워 넣은 응원도구라던가, 청팀 백팀을 구분하기 위한 머리띠 같은 것들도 준비해야 했다. 나는 약간 들뜬 채로, 온종일 입 안 가득 응원가를 오물거렸다. 응원가는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로 진행되는, 동요를 개사하여 만든 노래였다.


 그즈음 신문에선, 수표밖에 없어 국밥 값을 못 치렀다는 고물상의 일화가 방송에 소개되며 고물 업계가 전례 없는 과열기를 맞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더구나, 외환위기 이후 자본 없는 실직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소식도 보도됐다. 아버지는 또다시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번처럼 아버지를 구박하지 않았다. 그것이 포기나 체념의 의미는 아니었다. 사람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나앉은 사람이 일어서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들어 올리는 힘만큼 그 힘에 기대 일어서려는 힘도 필요한 건데, 아버지가 꼼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서서히 지쳐갔다. 가끔 잠결에 귀를 기울이면 메마르고 아픈 말들이 들려왔다. 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간명했다. 그때면, 나는 아주 깊은 수심에서 부력을 타고 위태롭게 부유하는. 그렇게 긴 시간을 견뎌 사소하게 터져버리는 기포처럼 쓸쓸해졌다. 특정 낱말들은 듣기만 해도 몸이 베이듯 쓰라렸다. 그런 말은 말 자체보다 실제로 입밖에 꺼냈다는 데에, 더 큰 충격을 주는 말들이었다. 말을 하는 쪽은 대게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보통 말을 삼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떠한 침묵은 이미 의미를 간직한 단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뭐가 됐든, 다음 날이면 다들 어김없이 아침에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일을 나갔다. 그건 삶을 애써 살아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아니었다. 그저 아주 건조하고 의욕 없는. 행위라기보다 목적 없는 하나의 상태에 가까웠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즉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 그러고 있는 거였다.



 살 건 살고, 수명이 다해 죽을 건 죽는 계절. 이제껏 그래 왔듯, 일상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자신의 이력을 평소처럼 되풀었다. 가을운동회였다. 그 날, 나는 어머니의 손대신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쥔 채 등교했다. 누군가의 부재가 주는 묘한 당혹감 덕에, 나는 이 광경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교문 앞에서 부모님과 작별한 뒤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가 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수시로 창밖을 내다봤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운동장. 지정된 자리에서 나는 노란 공을 들고 가만히 정면을 주시했다. 옆으론 파란 공, 빨간 공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줄 곧 동작을 시연하던 선생님이 강단에서 우리를 천천히 훑어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데 새삼 비장한 마음이 일었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혹여, 불안전한 완력에 눌려 공이 미끄러질까 조바심도 나면서. 목을 가다듬듯 스피커에서 조악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노래가 시작됐다. 모두들 흩어진다.


매일같이 해왔던 동작들이라, 다음 동작을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기계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앞으로 두 발 전진하고, 공을 튀기고. 공을 잡고 나선 다시 제 자리로 뒤로 두 걸음. 보풀처럼 연약한 손들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접혔다 펴지고,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이 모든 동작이 어떠한 대형을 이루고, 그림을 그려 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와 내 옆 사람의 일사불란하면서도 정확한 자세를 보고 있자면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번져가는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착각이라도 좋았다. 아주 넓은 운동장 안에서 흩어졌다 단숨에 모아지는 발걸음. 솟았다 일제히 가라앉는 갖가지 색들의 공과 파랗고 하얀 띠들. 그 속에서 누구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분명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모습에서 사뭇 어른스러움이 엿 보이까지 했다. 그건 몸으로 체득된 이치 같은 거였다. 대열에 숨어 있다는 안도감과, 대형을 이루고 있다는 자부심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쌓여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남들이 흔히 부르는 '몫'이나 '역할'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부여된 일을 소화하고, 충분히 수행해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분주한 동안,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들 역시 바빠야 했다. 다들 무용 동작에 맞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모습을 띠고, 비슷비슷한 동작을 취하고 있어 영 분간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른들은 반과 번호를 셈해 얼추 적당한 위치를 파악해 사진을 찍어댔다. 지금, 이 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고 공을 던진 후, 빙그르르 돌았다. 공중으로 노랗고 파란, 빨간 공들이 풀씨처럼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은 남은 수명을 짜내듯 끝을 향해 시끄럽게 울어댔다.


 해는 점점 중앙으로 몰리고, 사람들은 바깥으로 물러앉기 시작했다. 담장으론 저문 초록이 말라가고 있었다. 사방에선 온갖 음식 냄새들로 진동했다. 발길로 인 풋내 나는 먼지 속에서도, 냄새는 길을 잃지 않고 꼬박 사람들의 허기를 자극했다. 행사는 팀별, 학년별로 운동장 구획마다 쉴 새 없이 동시적으로 계속됐다. 어디선가 줄다리기를 하면, 또 어디서는 기마전을 하고, 이백 미터 계주를 한다던가, 닭싸움을 하는 식이었다. 운동회는 번잡하면서도 짜임이 있었고, 다발적이지만 명백한 순서가 있었다. 밖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복잡하되 치밀한 정연함이었다. 그래선지 정신없이 일정을 따르다가도 나는 문득 이러한 체계가 무척 낯설고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 담장 너머는 지나치게 한가해 보였고, 이곳은 너무 시끄러워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선 구기종목 결승이 치러졌다. 체육수업 시간을 쪼개 틈틈이 예선을 진행해온 터라 별도의 경기는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느긋하게 경기를 관람했다. 선수들은 입장과 동시에 관객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모쪼록 잘 봐달라는 '부탁'에 가까운 의미에서였다. 아이들은 공에 들러붙어 빠글빠글 몰려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운동장에서 공에 발 좀 대보려 우르르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애들은 애들이라 시시했고, 경기는 경기라 긴장감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바짝 빛을 발하는 장면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따분했고 우스웠다.


 나는 경기를 보다 이내 노곤해져, 나무에 조그만 머리통을 뉘었다. 열매처럼 매달린 빛 멍울이 눈 앞에서 아른댔다. 하얗고, 하얀 빛덩이었다. 우리가 보통 무언갈 회상하려 들 때 곧 잘 마주치는. 오므린 눈꺼풀의 맥이 서서히 풀리면서 허옇게 번져오는, 상냥한 백색이었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 너무 아름다워 외로웠다. 아버지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지 않아도 좋았다. 머릿속 생각으로는 그랬다. 한데, 가슴이 체한 듯 뻐근하고 답답한 게 여간 이상했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오지 않는다면 이 장면, 이 광경이 이대로 영영 완성되지 못한 채 갇혀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내가 회상하는 대부분의 기억에서 부재가, 결핍이, 불길한 무기력이 늘 발견되는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터였다. 그러자 불현듯 한 가지 의심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실은 아버지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헤매고 있는 거라고. 어쩌면 한 번쯤 잘 밀봉해 챙겨두고 싶은 풍경이라 그런 마음이 든 걸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아버지를 얼른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내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려 천천히 훑어 나갔다. 전부 흡사한 복장에, 엇비슷한 행동을 취하고 있어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을처럼 온갖 소음들은 터질 듯이 부피를 넓혀갔고, 한적함은 자꾸만 떠밀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축구 시합은 끝이 났다. 지루한 접점 끝에 승부차기까지 가서야 판가름이 났다. 그동안,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다 아버지의 비슷한 뒤통수를 봐도, 고개를 돌린 순간 전혀 예상해 본 적 없는 얼굴이 튀어나와 당혹스러웠다. 그때마다 나는 빈번히 소스라치며 재빨리 얼굴을 지워버려야 했다. 마음은 조급했고, 주머니 속에 든 지폐는 하도 쥐어버릇해 흠뻑 젖어 있었다. 습기가 벤 손바닥에선 꾸릿꾸릿한 냄새도 진동했다. 그건 마치, 불안과 초조의 냄새 같았다. 시간은 계속 가고, 점수 집계판은 한 장 한 장 넘겨지며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곧 있으면, 박을 터뜨려야 하고, 계주를 해야 하는데. 지금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거란 예감에 휩싸였다. 각 진영에선 지휘에 맞춰 응원가가 흘러나왔다. 본격적으로 승부가 갈릴 종목들이 오후에 밀집되어 있는 터라, 응원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거였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론 재치가 있는 응원가들이었다. 나는 무신경하게 응원가를 작게 따라 불렀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 왔어요…….'


 정작 주위를 두리번 대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입에선 절로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거듭 불러본 탓에, 몸이 알아채 반응하는 거였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건조한 목소리로. 건조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표정으로 '그런 건 저기 멀리 가서 불러라.' 나긋하게 일러줄 것만 같았다.



경기는 계속됐다. 적절히 배분된 시간에 맞게. 고려한 계산과 예측한 범주 안에서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는 일정을 부지런히 소화했다. 틈틈이 고개를 사방으로 휘저으며 아버지를 찾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박을 터뜨리면서, 박만 터뜨리지 않았다. 김밥 따위를 주워 먹으면서 먹기만 하지 않았다. 나는 신경을 한쪽으로 치우쳐 몰두하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주의를 사방에 그물처럼 펼쳐놓는, 경계하는, 짐승처럼 잘 안배된 감각의 덫을 쳤다. 이렇게 번잡한 공간에선 폭넓은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혹여 그 어느 와중에라도 아버지의 확성기 소리가 들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노력과는 달리, 아버지의 기척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조급함보다는 배신에 가까운 서운함이 들었다. 내 기억 속 언제고 남아있을 것과 그렇지 않을 것들이 연달아 포개지고 겹쳐지며 쌓여갔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나, 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먹은 마음 때문에 더 진한 자국이 남게 되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 의사와 무관한 의도처럼, 수시로 변형되며 의심 가득한 낯빛을 들이밀 터였다. 어느덧 운동회는 서서히 끝나가고, 마지막 계주만을 앞두고 있었다.


 점수차는 미미했다. 사실, 차이가 나더라도 역전할 수 있을 만큼 계주는 점수가 높았다. 나는 네 번째 주자였다. 앞으론 세 명의 주자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최후의 단서를 쥔 사람처럼 다들 눈빛이 비장했다. 부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부담에 깃든 책임은 은근히 즐기는 눈치였다. 해는 이제 막 기울어 가고 있었다. 비추는 사물들의 농도가 짙어졌다. 안에 감춰뒀던 무언가를 끄집어 우려내듯 색들은 한껏 깊은 빛을 뗬고, 이제는 긴장감도 지루해져 사람들은 대부분 인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 하루 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기억은 내가 분명 개입되어 있지만 관여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후회처럼, 아주 무능력한 방식으로 떠올릴지 몰랐다.


레일 위에 선 아이들이 준비 자세를 잡았다. 그중에는, 체육수업 시간에 보았던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들 시선을 정면에 두면서도 온 감각을 소리에 집중했다. 일순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요가 들려왔다. 그 고요함은 뭔갈 기다리는, 어떤 직전의 고요라 숨이 조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열기도 예민하게 떠다녔다. 그래선지 한 껏 민감해진 공기 층에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낌새가 서려있는 것만 같았다. 딱히 거부감이 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낌새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만족감을 줬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다고 여기자 그런 홀가분함이 일었다. 잊어도 좋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 기억이 불현듯 도착하는 것이라면, 기약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라면. 그렇다면, 결국 내가 기억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쩌면 작별뿐인지도 몰랐다. 마중 없는 배웅만 가능한 일이었다. 또 좋은 작별은 영영 잊겠다는 뜻이 아닌 떠나보내면서도 또 다른 무언갈 간직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니까. 이별하면서도, 분명한 실체와 마주하게 되니까. 그러므로, 지금은 시종일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일 외엔 별다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변주되든, 얼마간의 왜곡과 과장이 일어나든, 추후 헤아려 볼 문제였다. 물론, 그것은 좋은 작별이어야만 했다. 당장에는 시선을 집중한 채 그저 보고, 보는 수 밖에는.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와중, 계속 보이는 뭔가를 다시 내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레일 경로를 따라 크게 운동장을 훑어나갔다. 정말 '마지막'이란 사실 탓인지,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극적여 보였다. 연이어 얼굴과 담, 아이들의 뒤통수와 풍선, 파랗고 하얀 띠들이 눈 안 속으로 눈물처럼 들어찼다 흘러나갔다. 의식을 잃은 것마냥 몸이 흐릿했다. 하늘 끝은 내 머리 위로 아마득히 떠 있고, 볕은 적당히 뜨거웠다. 모래 먼지가 바람에 사정없이 일었다. 말들과 갖가지 잡음들이 섞여 뒹굴었다. 사라져도 괜찮고 잊어도 모를 풍경들이 쉼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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