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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Oct 17. 2021

가을, 사과

모처럼 산행 취재였다. 실내 취재와 달리, 야외 촬영은 여러모로 번거롭다. 아무래도, 날씨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이번 취재는 실장님 대신 영상 촬영 감독님과 동행하기로 했다. 감독님, 8월 중순이나 말 즈음 시간 괜찮으실까요. 좋죠, 좋죠. 널널해요. 차라리 이르게 촬영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네네, 감독님. 그러면, 추후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네, 그렇게 하죠.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은 주기적으로 날씨를 확인하는 일이다. 여름 날씨는 유독 변덕스러워 일정을 잡기가 힘들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날씨가 바뀐다. 맑았다가, 구름이 조금 꼈다가, 기어코 비 소식으로 변하는 날씨 아이콘을 보고 있으면, 아주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기분이 든다. 기적적으로 상황이 나아질 바라는 기대감을 내심 품고 있다가, 결국 예상대로 끝이 났을 때의 허탈감 같은 걸 느낀다.  


여러 번의 취재 스케줄을 잡으며 깨닫게 된 것은 날씨는 기적적으로 나빠질 수는 있어도, 좋아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 좋고 나쁜 날씨는 없다. 적어도, 내가 취재를 할 당시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번 취재도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악화만 될 뿐,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감독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감독님, 큰일 났어요. 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더라고요. 날씨가 영 좋질 않아서. 아무래도, 8월 안쪽으론 힘들 것 같죠. 네, 그럴 것 같은데, 9월까진 마감은 괜찮나요. 어쩔 수 없죠, 이제부터 기도해야 합니다. 감독님. 내가 이렇게 취재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무사히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기도 같은 거 하지 않는데, 의외로 무뚝뚝한 감독님이 열심히 기도하셨던 걸까.



보통 취재지로 향하는 길에선, 주로 책은 읽는 편이다. 취재마다 다르겠지만, 여행 코너의 경우에는 대부분 책 한 권 정도는 챙겨가는 버릇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할 때에는 예외다.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도, 음악을 듣지도 않을뿐더러 가급적이면 먹지도 않는 편이다. 아무래도, 공복이 육체적으로든 심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그날, 내가 가방에 챙겨 간 책은 '지구 끝의 온실'이었다. 지구 끝의 온실이라니. 제목부터가 근사하다. 세계 어딘가에는 식량 문제라던가, 생태계 위기와 같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어진 종자저장고가 있다. 인류가 불길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한 선택지 중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흡사, 최후의 인류를 위한 방주 같은 느낌이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 중 가장 북극점에 근접한, 심지어 영구동토층의 암반을 뚫고 지어진 그곳에는 약 백만여 개의 씨앗이 보관되어 있다. 훗날, 어떤 종자가 살아남아 다수확을 보증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까닭에, 각국에서 보내온 종자는 다양한 지질학적, 정치적 스펙트럼을 띤다. 각 나라의 토종 종자부터, 미국 인디언의 곡물, 심지어 북한에서 보내온 고유 종자까지. 거기엔 어떠한 정치적 이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제목을 보는데, 바로 그 종자저장고가 떠올랐다.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의지, 안간힘 같은 것이 설핏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김초엽 작가는 이 소설의 초안을 코로나19가 극심하던 때 써 내려갔다고 한다.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고 되뇌면서, 그런 절망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타인과 세계의 회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계속 생각하면서. 나는 읽는 내내, 이 소설이 연대와 구원의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편히 읽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날씨가 영 심상치 않았다. 왜 이렇게 뿌옇지. 비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아직, 도착하려면 좀 남았으니까. 기다려보죠. 그 사이, 좀 갰으면 좋겠네요. 이후,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쳐다본다고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텐데, 가는 내내 뚫어져라 하늘만 힐끗거렸다. 구름이 조금 걷힌다 싶으면, 얼마 안 가 안개가 꼈다. 날씨에 따라 내 기분도 오르내리며 요동쳤다. 어쩌나 싶다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면 잔뜩 기대를 품었다가 도로 풀이 죽는 식이었다. 날씨를 수시로 살피며, 감독님께 물었다. 감독님, 어제 기도는 하셨나요. 설마, 이음 씨 기도 안 하신 건가요. 그 물음에, 나는 속으로 반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하는 거였는데, 죄송합니다. 잠시 후, 감독님이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저도 안 했어요. 아.


다행히 날씨가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되도록 촬영을 이르게 끝내는 편이 여러모로 나아보였다. 산행 코스도 한 시간 남짓이면 둘러볼 수 있을 정도라 무리는 없었다. 근데, 배가 좀 많이 고팠다. 몇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왔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간단하게라도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 사정을 아시는지, 산 초입에 들어서자 아주머니 몇 분이 급하게 우리를 붙잡았다. 식당마다 메뉴가 대체로 비슷해 크게 고민할 거리는 없었다지만, 사람이 북적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나는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인데. 그렇다고 불편하게 식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이음 씨, 우리 정합시다."


감독님이 옆에서 말했다. 감독님도, 에둘러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나와 비슷한 심정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나타나는 곳 중 세 번째 가게에서 밥을 먹읍시다."

"네, 저는 상관없어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호기롭게 정해놓고는…… 바로 앞 가게에서 발길이 멈췄다. 아주머니 한 분이 시원한 얼음물을 들고선, 살갑게 잡으시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그것 말고도 이유는 더 있었다. 가게 외관이 화려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겨울에나 있을 법한 전구 장식이 가게 입구부터 어수선하게 번쩍거렸다. 조금은 눈치 없이, 그 둔감한 눈치가 활달함을 더 부추기라도 하듯이. 얼떨결에, 우리는 바로 그 조명 뒤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조명은 도통 쉴 줄을 몰랐다. 정해진 박자에 따라 부지런히 깜빡거리며 주위 이목을 끌었다. 많이 민망했다. 오가는 산행객 몇 분이 흘깃 쳐다보고 가셨다. 반찬을 집어 먹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우연히 눈을 마주친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대로 산행을 나서면, 다들 아는 체를 할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찌저찌 급하게 식사를 치르곤 산행에 나섰다. 만만한 코스를 선택해서인지 크게 무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곳은 폭포가 유명하다던데. 마침, 길 너머로 물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요 며칠간 내린 장마 덕인지, 그 소리가 제법 거셌다. 정말 식욕 좋게 쏟아졌다. 늦여름의 늘어진 더위도 마지못해 씻겨 내려갈 듯한 소리였다. 저 멀리 기암 사이로 희미하게 물줄기가 비쳤다. 오직 아래로 향하는 것만이 제 천성인 줄 착각하듯, 어김없이 물줄기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수면에 물줄기가 닿을 때마다 목분처럼 잔물결이 튀었다. 굉장하네요, 눈앞의 광경을 담으며 감독님이 말했다.


 우리는 잠시, 일을 제쳐두고 주변을 감상했다. 단단한 괴석이 살갑게 피부를 맞대며 솟아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의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거대한 규모에 주눅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감탄하게 되는.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할까 싶은 의문, 또 이런 것은 누가 만들어냈나 하는 경이가 뒤섞여 마음을 들뜨게 만들던. 그리고 그 여운에, 한동안 눈에 비친 사물들이 조금 시시하게 보이던 기분과 닮아 있었다. 지층이 만들어낸 그늘에 기대 경치를 슬쩍 둘러보았다. 거대한 무언가와 마주하자니,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조금 무뎌지는 착각이 들었다. 이편에서 저 건너편으로 한걸음에 닿을 듯하다가도, 막상 손을 뻗으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인간의 생애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무언가와 마주할 때면, 나는 이상하게 그들의 삶을 상상해보고 싶어진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수명의 길이를 셈해 대입해보고, 절벽 사이에 드러난 퇴적층 단면의 두께를 실감하면서. 쓸리고, 깎이고, 쌓여갈 동안, 도대체 나는 몇 번을 태어나고 다시 죽어야 하는 걸까. 그들이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얼마나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을까. 종종 살아가는 일이 지루하진 않을까. 그들에게 우리와 비슷한 인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를 가엾게 바라보진 않을까.



 정상에 이르자 말소리가 금세 잦아들었다. 대부분, 협곡을 기점으로 발걸음을 돌린 모양이었다. 제법 한적했다. 올라가는 이도, 내려오는 이도 없었다. 우리는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쿠키 영상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얼마간 더 걸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많이 후회했다. 아 이거, 안 되겠는데. 조금 힘든데, 같은 생각을 속으로 세 네 번쯤 한 것 같다. 사람의 미감은 대체로 비슷하다. 사람들이 협곡 부근에 이르러 발길을 돌린 이유를 그제야 알 듯했다. 분명 눈에 두고 보기에는 좋았으나, 담아 간직할 정도의 풍경은 못됐다. 두 어 번의 지점을 더 지나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는 정상에 채 도달하지도 못하고 내려왔다. 해가 빠른 속도로 저물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 사과를 한켠에 가득 쌓아두고 판매하는 분들이 여럿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곤 가을이구나, 싶었다. 가을이네요, 감독님. 네, 이음 씨 가을이네요. 사과 사 가야죠. 그렇게 말하고는, 감독님은 사과 가판대를 기웃거렸다. 사과 좋아하시나요. 네, 뭐 과일은 다 좋죠.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세요. 과일을 평소 잘 안 드시는데, 유독 사과는 좋아하시더라고요. 이럴 때 사가야죠. 사실, 지난번 취재를 가서도 사과를 조금 사 오긴 했는데,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


 잠시 눈으로 가판대를 훑다, 감독님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 홍로가 나올 시기는 아닌가 봐요. 지난해 저장해둔 부사 같은데요. 그럼, 그냥 가시려구요? 네, 어쩔 수 없죠. 아쉽네요. 네, 아쉽네요. 아쉬워요. 결국, 우리는 건네받은 사과 한 쪽을 씹어 삼키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입으로 사과 향이 어렴풋이 퍼졌다. 다네요. 네, 달아요. 잠시, 늦여름의 한숨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간절을 앓듯 소스라치며 몸을 떨었다. 잔뜩 열 오른 몸이 식자 놀라 반응한 거였다. 혀끝에 사과를 베어 문 잔향이 그윽이 감돌았다. 나는 무심결에 한 번 더 입맛을 다셨다. 앉은 자리에 남은 온기처럼 감미가 남기고 간 달큼한 떫은맛이 입안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다음 취재는 어디가 좋으세요, 내가 물었다. 이번 가을엔 섬에 가고 싶어요. 가을로 바짝 물든 섬에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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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에세이와 소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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