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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Sep 25. 2021

안녕하세요, 이음입니다.

- 내게 새겨진 장면들

     내가 첫 책을 냈던 건, 2017년 여름이었다. 출근 도장을 찍듯 매일같이 합정동 교보문고에 가 매대에 놓여있던 책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각별한 사연이라도 묻어둔 사람처럼 꼬박 서점에 들렀다. 그런 일을 보름쯤 반복했던 것 같다. 이따금씩 내 책을 사느라 지갑 사정이 넉넉치 않거나 여름 더위에 몸이 지칠 적이면, 며칠씩 거르기도 했다. 이후 드물게 서점을 찾았을 땐 내 책은 더이상 신간 매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도서검색대에서 제목을 검색한 후, 분류 기호를 확인한 뒤, 쭈그려 앉아 자음 순서로 정렬된 책의 제목을 한참 더듬어야만 가까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내 처지 같아 보였다.


 결과적으로,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구체적인 액수를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 의논하고 고생해준 편집자의 수고에 비하면 무척이나 미안한 값이었다. 분기별 인세정산 메일을 받아볼 때면, 그 미안함은 배가 됐다. 그 염치 때문에라도 나는 편집자님께 평소 연락을 잘 드리지 못했다. 모처럼 근황을 접한 건, 편집자분의 퇴사 소식 덕이었다. 그녀는 내게 좋은 인연이 되어주셔서 감사했다고, 건강하시고 꾸준히 좋은 글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담아 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물게라도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어떤 이유로든, 종종 안부라도 묻는 거였는데.


 책은 잘 팔리지 않았고, 돈이 되지 않는 일과 돈이 된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일들을 하다, 결국 내가 잘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어서 끝내 에디터가 됐다. 물론, 에디터가 되었다고 금전적인 여유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일 같은 건 돈이 되지 않는 모양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렇지만, 당시 삶의 방향을 틀 여력이 없던 나는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그중 제일 의아했던 건, 책을 잘 보았다는 내용의 메일이나 쪽지, 댓글들이었다. 책을 읽곤 누군지도 모르는 저자의 연락처를 찾아 소감을 남긴다는 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일을 마다치 않는 정성이 벅차게 좋으면서도 의아했다. 그래서 처음, 그런 연락을 받았을 적에는 친구의 장난인가 싶어 괜한 경계심을 품기도 했다. 읽고선 답장도 않고, 인근 친구들을 추궁하느라 바빴다. 그러곤 한참 후에야, 내게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장난을 칠만한 친구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내게 오는 연락마다 성의껏 답장을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쓰며 자주 든 생각이 있다. ‘나는 왜 쓰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왜 계속 쓰는 걸까. 나는 쓰면서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걸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고민이 깊어질 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맹목적으로 글을 썼다. 어찌 됐든, 쓰기만 하면 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버릇처럼 쓰며, 나는 나를 점차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이성의 마음에 들고 싶어 자신을 과장되게 포장하는 이십 대 초의 연 애처럼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쓰는 행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어디선가 ‘왜 쓰느냐’고 물으면, 선뜻 내놓을 그럴싸한 대답을 머릿속에 그려 넣고 있을 때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떤 의미로든, 내가 반드시 써야만 하는 이유 같은 건 없다.  


 어쩌면, 쓰지 않아도 괜찮은 일. 쓸 필요도 없는 일. 살아 가며 우리는 이따금 삶의 목적론에 헤매곤 하는데, 내겐 글도 마찬가지다. 이제, 나는 내게서 꼭 써야만 하는 당위를 찾지 않는다. 그저 쓰고 싶은 사람이니까, 쓸 뿐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순전히 내 고집에 이끌려 내 글의 무대 위로 불려온 이들이 있다. 당사자의 동의나 이해를 떠나 누군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잘 쓰려고 노력한다. 물론, 노력이 언제나 값진 보상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나는 덜 실패하고 싶다.


 시시한 투정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내가 계속해서 쓰게 되는 것은 어디선가 내 글을 읽어주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내겐 기적 같은 일이다. 말은 ‘쓰고 싶은 사람이니까, 쓴다’고는 해도,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는 건 참 곤혹스럽다. 이따금, 잘 보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적어도 내 글이 외로움은 타지 않겠구나 싶어 안도한다. 그렇게 내가 쓴 말이 나를 벗어나 사방팔방 다른 이에게, 저마다의 의미로 뻗어 나간다고 상상하면 왜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읽는 이의 답장은 늘 내 글보다 과분하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쓰고 싶은 이유는 수백 가지 즈음 되는데,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자인 당신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내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나를 반쯤 안다고 해도 좋다. 나는 이 책을 서너 해 동안 조금씩, 꾸준히 썼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당신에게 그 시간의 반쪽만큼이라도 닿았길 소망한다.





안녕하세요, 이음입니다.


네, 책이 나왔어요. 제목은 '내게 새겨진 장면들' 입니다.

여러 출판사와의 계약 및 일정 문제 끝에 미뤄지다 겨우 나온 책이에요.

이번에는 더위가 조금 사그라든터라 땀을 조금 덜 흘리며 이곳저곳 다니게 될 것 같습니다.


가끔 글쓰기가 게을러질 때면, 제게 보내주신 소감을 종종 들춰 읽곤 합니다. 그러면, 잠시 몸 밖을 나섰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 듭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약 4년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써온 글입니다. 그 사이 저는 나이를 먹고, 퇴사를 했고, 이사를 했습니다. 그간 글을 묶으며 다시 읽었을 적엔, 과거의 나는 지나치게 불안했고, 필요 이상으로 기력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때의 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시간이었어요.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살아가며 으레 겪게 되는 흔한 실수와 오해였겠으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던 거겠죠. 사는 동안 그런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이 여러 번 있는 거겠죠. 그래선지, 쓰는 내내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이 자주 들었습니다. 고작 글을 쓰는 것 뿐이었지만, 의외로 그때 저를 지탱해주었던 건 글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글을 쓰는 삶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아직은 그런 삶을 유지 중입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곧 가을입니다. 다들 아프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덜 울고, 조금은 더 웃는 날이 많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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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에세이와 소설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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