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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Apr 03. 2021

학교는 파국을 사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재난을 넘어 파국 이후를 상상하기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9

학교는 파국을 사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철학자 귄터 안데르스는 1958년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여행한 후 ‘핵시대의 테제들’(Thesen zum Atomzeitalter)을 작성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은 모두와 관련된 문제다.” 2020년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생생하게 경험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모두에게 닥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보편적 현실이 되어버린 재난과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다가오고 있는 파국의 조짐 속에서 한국 교육은 지난 10년간 무엇을 해왔고 새로운 10년 무엇을 해야 할지 짚어보고자 한다.    

  


교육은 왜 파국을 사유하지 못하는가


세계보건기구는 2020년 3월 11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ronavirus disease–2019 ; COVID-19)에 대해 범유행(팬데믹)을 선언했다. 하필이면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 정확히 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후쿠시마 참사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엄기호는 『오늘의 교육』 2011년 9월 여는 글에서 ‘교육은 왜 파국을 사유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넘쳐나는 종말에 대한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파국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무감각한 현상에 대하여 지적한 바 있다. 

  

사실 교육의 역할 중 하나는 그러한 무감각을 깨워 인식하게 하고 사유하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재난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재난을 맞닥뜨린 존재들을 먼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보다 근원적으로는 재난을 넘어 파국 이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학교의 시간과 공간은 재난 이후와 파국 이전 어느 사이에 존재한다. 이때 재난을 사유한다는 것은 재난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어느 실존적 존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서 재난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한 날 아침. 서울의 H중학교 학생회에서는 노란 리본으로 장식된 추모 게시판을 복도 곳곳에 마련하고1)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세월호 참사의 슬픔을 함께 했다. 나 역시 이날 수업 시간에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글을 학생들과 함께 낭독했다.2) 교실 뒤 동그랗게 둘러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1년 전 세월호 선실 속의 언니, 오빠들을 소환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소환되어 들어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소환의 본질은 ‘~가 되기’이며, 이를 통해 우리 – 나와 학생 - 들은 세월호 사건의 본질에 좀 더 깊숙이 다가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근대교육은 재난의 영역에서 이러한 ‘소환하기’ 혹은 ‘~가 되기’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재난을 사유하는 것은 교육과정의 영역이 아니다. 근대 교육학에서 재난은 단지 정의되고 분류될 뿐이다. 재난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기록하지만 그 곳에는 재난에 직면한 실존적 존재로서 ‘생명’이 아닌, 손실 혹은 (인명)피해로서 ‘시신’만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 후 한국 교육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수학여행 등 현장체험학습이 취소되었고 2015 개정 교육과정에 안전교육 51시간이 포함되었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세월호 참사는 현장체험학습을 간 학교의 잘못이자 학교에서 안전교육을 받지 않은 교사와 학생의 책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재난을 애도하고 파국을 상상하기     

  

티모시 모튼은 우리가 세계를 파괴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3) 파국catastrophe을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파국이라는 것의 질적 변화를 예측하고 파국 이후를 상상하는 것이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말하는 파국은 일종의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물이 갑자기 끓어 넘치는 순간을 말한다. 파국에는 정적positive 파국과 부적negative 파국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정적 파국을 ‘혁명’ 혹은 ‘전환’이라 말한다면 부적 파국을 ‘종말’ 혹은 ‘파멸’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현실은 부적 파국으로 고정이 되어버린 듯하다. 재난은 일상화되었으며 서사는 메말라버렸다. 넘쳐나는 재난 속에서 우리는 ‘희망’할 수도 없고 ‘절망’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메시아적 구원도, 계몽주의적 휴머니즘도 목소리를 잃은 지 오래다. 파국은 우리 시대의 리얼리티가 되었고 대안적 세계나 미래, 해결방법은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4)  

  

이런 상황에서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과연 학교가 파국을 사유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변곡점이 있다. 하나는 ‘기후 변곡점’이고, 다른 하나는 – 흔히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고 불리는 – ‘기술 변곡점’이다. 이 두 가지 파국에 대한 사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과 관련이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다면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 확장되어 온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대멸종이라는 작금의 사태는 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말해준다. 즉 존엄성의 범위가 인간을 넘어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sentient beings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첫 번째 파국에 대한 사유다. 

  

기술적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공물을 이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켜 온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지능을 갖춘 인공물, 즉 인공지능은 제1의 기계시대와 제2의 기계시대를 나누는 획기적인 분기점이다. 지능을 갖춘 기계가 ‘진부한 일’을 넘어 ‘진부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 오히려 인간이 진부한 존재가 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과 생각하는 사물의 공존. 이것이 두 번째 파국에 대한 사유다.       

  


학교를 파국을 상상하는 공간으로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학교를 변론하다』(2020. 살림터)에서 학교의 본질은 자유롭고 비생산적이며 규정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교육과 학습이 학생이 경험하는 세계와 사회 전체가 명시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발상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학교는 단절되고 유예된 시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교육의 도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연결’이라는 것은 그 말이 불러오는 낭만적 환상과는 달리 미래세대(학교)에 대한 정죄이자 기성세대(사회)에 대한 면죄부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리얼리티가 된 (부적) 파국으로부터 학교를 단절시켜야만 오히려 (정적) 파국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파국에 대한 사유는 (아감벤이 말한) 시간과 공간과 사물의 신성 모독과 세속화를 필요로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성모독은 맘몬 즉 자본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학교를 커먼즈commons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곧 세속화의 의미인 것이다. 학교는 권력과 자본의 ‘견습생’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을 가지고 노는 ‘주권자’로서의 학생을 성장시키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정적 파국, 즉 혁명을 상상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이 말이 불온하게 들린다면 이렇게 바꿔보자. 학교는 4차산업혁명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과연 무엇이 정말로 불온한 것일까? 학교가 4차산업혁명의 공간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총체적 삶의 변혁의 공간이 되는 것일까?       

  


520번의 트라이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행하기     

  

2020년 7월 16일 루이자 뉴바우어, 그레타 툰베리, 아뉘나 데 베버 반 데르 헤이덴, 애들레이드 샤를리어는 유럽연합 정치지도자 및 국가 수장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지구 생명체들의 미래의 생활조건을 지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은 오늘 당장 시작되어야 하며,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예측한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시스템에 계속해서 가해지고 있는 온갖 파괴와 착취를 종식시키고, 자연 세계와 모든 인류의 안녕을 중심에 둔 완전한 탈탄소경제로 나아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1.5℃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몇 달, 몇 해가 결정적이며,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5)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 십 년간 매주 금요일마다 모든 학생이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벌이는 것이다. 개인적 성공과 자기계발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지구와 공동체의 안녕'으로서의 미래 말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스스로 그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정해진 답을 암기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픈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침수되는 지구의 위쪽으로 남을 밟고 올라서는 공부가 아니라 기후변화로 인한 파국을 함께 막아내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누구는 인공지능은 흉내낼 수 없는 인간다운 공부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그게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남보다 빨리 문제를 푸는 것은 아닐 거다. 앞으로 10년 520번의 금요일.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전환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학교가 파국을 사유함으로써 파국 이후를 상상하는 시공간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83622.html



1) 이를 불편하게 여긴 학교장에 의해 추모 게시물은 나중에 학생회 앞 게시판으로 옮겨야만 했다. 


2) 윤상혁(2015).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세월호 1주기에 부쳐. 『오늘의 교육』 2015. 03+04. p.19~32.


3) 문강형준(2014). “자네는 학자잖나. 어서 말을 걸어보게.”- 세월호 침몰과 파국적 사유. 『말과 활』 4호. p.76~88.


4) 하림(2017). 파국의 기원과 멜랑콜리. 비교문학 제71집. p.9.


5) https://climateemergencyeu.org/


6) 피터 드러커.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create it.”


근대교육은 재난의 영역에서 이러한 ‘소환하기’ 혹은 ‘~가 되기’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재난을 사유하는 것은 교육과정의 영역이 아니다. 근대 교육학에서 재난은 단지 정의되고 분류될 뿐이다. 재난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시간과 장소를 기록하지만 그 곳에는 재난에 직면한 실존적 존재로서 ‘생명’이 아닌, 손실 혹은 (인명)피해로서 ‘시신’만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오늘의 교육』 2021년 3+4월호(61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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