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육선언 연석회의 토론문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8
'학교 개혁과 미래 교육'에 대하여
교육은 과거의 역사를 오늘로 소환합니다. 인류가 이룬 찬란한 업적들을 상기하며 환호를 보내기도 하고 어리석은 과오와 실패담을 목격하면서 반면교사로 삼기도 합니다. 교육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제가는 가능해지리라 소망하는 것들을 형상화시킵니다. 한편으로는 결코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될 디스토피아를 그리며 경각심을 갖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육이란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르며 현재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 중의 하나가 바로 학교이죠. 그러나 학교는 생각보다 더 특별한 공간입니다. 우리나라가 백 명의 마을이라면 그중에 스무 명은 지금 학교에 있습니다. 물론 코로나 19 이전에 해당하는 일이죠. 코로나 바이러스로 학교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어떤 공간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반복하지만 전 국민의 5분의 1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 배우는 일이 왜 어렵지 않겠습니까. 가르침과 배움. 이것은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문화와 문명의 정수를 전수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일인 것이죠. 그 곤란함을 응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누군가는 교문을 열고 누군가는 밥을 지으며 또 누군가는 낡고 고장 난 것들을 고칩니다. 학교는 그런 곳입니다.
그런 학교가 점점 납작해져가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성찰하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이나, 상상하고 창조하기 위한 미래로의 여정은 모두 의미 없고 불필요한 일로 치부됩니다. 한마디로 시간 낭비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학교는 현실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거나 한편으로는 현실 속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미뤄놓고 쌓아놓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의 자살율이 증가한다고 청소년 자살예방교육을 실시하라고 하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정광필 선생님께서 “바로 이럴 때 오랫동안 쌓여온 교육 문제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고, 제대로 바꿀 기회”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기. 저는 헌법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가 이 문장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교육적으로 확장시키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균등이 의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성인이 되기까지 지역, 성별, 피부색, 정신적·신체적 장애, 부모의 사회경제적 자본 등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고 균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교육기본법 2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아야 한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미 출발선이 다른 데,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 어떤 이는 출발선, 운동장 같은 전제부터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 누구에게나 동일한 교육과정과 동일한 교과서로 같은 시간 동안 배울 기회를 주었다고 그것을 균등이라 말해서는 안 되는 거죠.
저는 오늘의 논의가 두 가지 방향에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갔으면 합니다. 첫째는 기회의 균등이라는 말의 의미를 교육의 공공성의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학교라는 곳을 ‘너의 운명은 이거야’ ‘너의 가능성은 이미 정해져 있어’와 같은 불평등하고 반민주적인 -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는 - ‘삶’으로부터 괴리시키고 유예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광필 선생님께서 “미래는 예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교육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우리 교육도 비루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현실의 요구들로부터 더 이상 납작해지지 않고 풍성하게 미래의 가능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모임의 공식 명칭이 ‘미래교육선언 연석회의’라고 알고 있는데요, ‘선언’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당위의 말은 힘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해야 하는 주체 속에 자신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말은 넘치지만 자신이 그 비판의 대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움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비판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대안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당위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실행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미래교육선언. 저는 이것을 우리의 현재를 성찰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겠다는 약속으로 이해합니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12월 12일.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과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에서 주최하고 안그라픽스와 한길사에서 후원한 <미래교육선언 연석회의>가 순화동천에서 열렸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의 제1명제로 시작한 안상수님의 '미래교육 사용법'부터 미래교육이라는 담론의 장에서 청소년들은 '미래세대'라는 이름으로 소비될 뿐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소거되었다고 지적한 함은세님의 '미래세대 사용법'까지. 다섯 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값진 배움의 시간이었다. 위의 글은 정광필님의 발제 <학교 개혁과 미래 교육>에 대한 짤막한 토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