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에 대한 비판적 고찰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0 텍스트 비평
정용주. 조영선. 이정희.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오늘의 교육》vol. 14
참고도서
헨리 지루 《교사는 지성인이다》
파울로 프레이리 《자유의 교육학》
조한혜정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일기》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가 프랑스의 공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때, 그 충격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고등학생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있을뿐더러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프랑스의 고등학생은 정부의 교육정책에 맞서기 위해 직접 거리에서 시위를 한다고?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한때 바칼로레아 기출 문제집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큰 변화는 없는 듯하다.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내 생각에 학교가 민주주의를 원하는 수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나라의 자본권력, 정치권력, 종교권력, 지식권력, 노동권력’이 ‘국민’ ― 실체가 뭔지 애매모호한 ― 에게 허용하는 민주주의의 수준과 동일하다. 그러니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프랑스의 공교육이 대한민국의 공교육과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와 관련해 공교육에 대하여 암울한 전망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대한 전망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지난 호 특집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는 이렇듯 그 한계가 명확해 보이는 학교라는 공간의 민주주의를 다룬다. 정용주, 조영선, 이정희 세 필자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민주주의를 진단하고, 기억하고, 고백하면서 학교와 공동체,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적 실천가’ 혹은 ‘변혁적 지성인’으로서의 관점을 보여 준다. 예상했던 대로 학교의 현실은 암울하다. 이정희는 말한다. “사라진 녀석 대신 수도꼭지를 꽉 잠그고 호스를 정리하면서 나는 학교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물이 계속 새어 나오는데 그걸 모르고 죽자 사자 걸레질만 하는 상황”이라고.
우리는 “수도꼭지를 잠그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정용주는 “나는 학급과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실험들을 했고, 대부분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그(우리)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학급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학교라는 구조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교 제도는 군주제와 유사하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학교 제도는 귀족제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혼성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교사는 ‘공화제적 군주’나 ‘민주적 리바이어던’과 같은 형용모순의 형태로 존재한다. 교사는 학생들과 달리 인권과 민주주의 외부에서 규칙과 규정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교육을 인권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데 익숙하다.
- 정용주, <민주주의는 탁월함에 대한 저항이다>, 21쪽
민주주의의 외부로 밀려난 존재(학생 - 필자 주)들에겐 ‘정치’가 아닌 ‘관리’만 남는다. 이러한 관리의 핵심에 관료제가 있다. 합리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가 관리로 대체되면서 정치는 절차만 남고 행정이 모든 것을 대체한다. 이 속에서 평등은 차이와 특수성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이 강제된다.
- 정용주, 위의 글, 22쪽
여기서 ‘교사―학생’을 ‘관리자―교사’ 또는 ‘엘리트―시민’으로 대체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앞서도 말했듯 학교의 현실이 곧 대한민국 현실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다시 ‘자격 없는 자’, ‘무능한 자’의 권리로 돌아온다.” 자격 없는 자가 누구인가? 무능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교사인 우리 자신이다. 이번 특집은 학교의 민주주의를 주로 ‘권력자’로서 교사에 초점을 맞춰 풀고 있지만 교사 역시 정치적 자유나 교무실에서의 발언권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격을 운운하는 자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된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학생들의 자격을 운운하는 우리의 실체를 성찰해야 한다. “학급은 사실 중앙집권적 관료적 통제의 제일 말단의 단위”(조영선)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도 학급 운영이나 수업의 비민주성이 학교 제도의 비민주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도 학교 제도가 특집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이번 특집을 읽고 나서 헨리 지루의 《교사는 지성인이다》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와 마찬가지로 학교는 치열한 담론의 공간이다. 절차적인 민주주의가 완성된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담론은 일상생활에서 특별하게 연출된 이데올로기, 행동, 표상에 특권을 줄 의향으로 교사와 학생의 위치를 결정하는 시간, 공간, 서사 등을 배치하고 그 배치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교육 경험을 특정 형태로 구조화하여 현실의 불의와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교육 담론과 실천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소중하다. 다만 ‘불의한’ 담론을 대체할 ‘진보적인’ 담론을 개발하지 않는 한 현상을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에 따라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루는 〈관리와 통제의 담론에서 새로운 교육 담론으로〉라는 글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비판적 행위와 권력 갖기의 경험을 직접 구현하는 교육을 어떻게 이론화하고 개발할지”에 대하여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학교를 두 측면에서 문제 제기하는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문화와 권력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구현물로서 학교를 문제 삼는 담론”이고, 둘째는 “살아온 경험의 생산에 적극 연루된 장,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갈등의 장으로서 학교를 문제 삼는 담론”이다. 특히 두 번째 담론과 관련하여 그는 “인간 경험들이 일상적인 교실 생활의 역동성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경쟁하고 정당화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루에 따르면 학생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학교 역시 수동적인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지배 집단의 사회관계와 이해관계를 재생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개인과 집단이 자기 요구를 밝히고 실현하는 능력을 불평등하게 생산하는 권력의 공학과 밀접한 정치적, 도덕적 규제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교사들이 관리와 통제의 도구라는 점에서 학교를 문제 삼아 왔고, 그 집행자로서 교사 자신에 대한 성찰에 집중해 왔다. 이번 특집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한 담론에 대한 비판에만 머물게 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학생들은 교사가 선포한 ‘민주화’(그것이 정말 민주주의인지와는 별개로)에 감동하기는커녕 그것을 악용하였고, 교사가 없는 빈자리에는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당혹감을 느낄 교사들에게 지루는 “교실 생활의 역동성”을 이해해야 하며, 교실의 질서가 “어떻게 생산되고 경쟁하고 정당화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특집의 세 필자는 그동안 익히 있어 왔던 것처럼 단순히 학교의 불의한 현실과 그것을 둘러싼 담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진보적인’ 교사들이 그런 현실에 대해 가능한 대안으로서 해 온 시도들이 정말 민주적인가를 묻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기에 완벽해진 후 실천을 하려고 하면 평생 동안 실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교육’이 아니라 ‘가능한 교육’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성과주의의 압박은 교사로 하여금 조급증을 유발시키고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 앞에서 결국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든다. 여기 잘못된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첫 번째는 과거로의 회귀, 즉 교사가 더욱 압제적으로 변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실과의 타협, 다시 말해 세련된 관리와 통제이다. 정용주가 계속해서 경계하는 것이나 조영선이 고백한 ‘흑역사’는 바로 후자의 길이다. 지루는 이를 ‘적합성 담론’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루는 ‘적합성 담론discourse of relevance’을 ‘아동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 또는 ‘학교의 질서와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단순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적합성 담론이 미국에서 진보 교육의 다양한 교리 ― 듀이에서 시작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자유학교운동, 다문화주의에 대한 강조에 이르기까지 ― 들과 오랫동안 연관을 맺어 왔다고 말한다. 적합성 담론은 학생들의 요구와 문화적 경험을 적합한 교육 형태를 개발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보는데, 문제는 여기서 ‘요구’라는 개념이 ‘특정한 경험의 부재’를 가정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학생들의 비어 있는 머리 혹은 가슴에 교사가 갖고 있는 문화적 풍요를 채워 넣어 교정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담론은 “학생의 경험은 일탈적이라든가 천박하다거나 무례하다고 쉽게 비난하는 담론으로 밀려나기 쉽다”(아니, 내가 너를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해 줬는데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니?). 그리고 “결론적으로 학생들에게 떠넘겨 버린 그 문제가 실제로는 행정가와 교사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점에 대해 이론적으로 질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나는 할 만큼 했어.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들은 자유를 누릴 줄 몰라). 우리는 ‘모범’ 학생과 ‘불량’ 학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가 다르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거짓된 친절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느낀다.
적합성 담론이 ‘가짜 진보’이자 민주주의가 아닌 이유는 질서와 통제의 문제에 부딪히는 순간에 드러난다. “이 담론에서 학생을 다루는 전형적인 사례는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개발해 학생 개인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든가 학생과 기분 좋은 공감대를 형성해서 학생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루는 다소 과격하게 말하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적합성은 해방적 관심과는 무관하며 ‘내내 단속하기’를 더 잘할 요량으로 학생과 대중문화에 맞게 고친 교육 실천일 뿐”이라는 것이다.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조영선이 자신의 지난 학급 운영을 돌아보며 소설 〈우상의 눈물〉을 떠올린 이유는 그가 고백하고 있듯이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가는 교사가 되려는 생각만 했지” 자신이 “공동체의 1/n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깨달음이 오자 “선정을 베푸는 온화한 임금의 얼굴을 벗게” 되었고, “학교 질서에 순종적인 학생들만 정의파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또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공론화’”가 민주주의의 핵심임을 간파하게 되었다.
적합성 담론이 좀 더 발전하면 ‘통합 담론discourse of integration’이 되는데, 이것은 “학생 경험과 문화에 대해 한층 자유로운 관점을 취한다”는 특성이 있으며, “학생 경험은 ‘학생 중심’이라는 개별화 심리학이나 규범적 다원론 논리를 통해 개념 정의 된다”. 이 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기하는 문제는 자유 개념을 ‘헌신적 사랑’, ‘전적인 이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정용주의 글에서 말하는 “강력한 유대를 가진 공동체” 혹은 조영선의 글에서 말하는 “민주적인 학급공동체”가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도 적합성 담론과 통합 담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지루가 말하고 있듯이 “문화와 권력의 관계를 떼어 놓으려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이다. 적합성 담론은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투쟁의 장에서 집단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공유하면서 살아온 삶의 원리들로서 문화를 보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하지도 않는다”. 적합성 담론은 “지배 문화와 종속 문화라는 개념을 배제”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세력들이 학교 조직과 일상적 교실 생활에 영향을 미칠 때도 그 세력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보수적인 교육자들조차도 관리와 통제의 담론을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비단 미국의 사례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교육자들도 적합성 담론이라는 새 옷을 갈아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필자들은 ‘온화한’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 담론을 더욱더 비판하는 것일 테다. 정용주와 조영선은 학급 운영의 차원에서 이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차원은 학급을 넘어선다. 정용주가 지적하고 있듯이 교실은, 그리고 학교는 정치적인 공간이다. 물론 학교의 정치는 학교 밖의 정치와 다르다. 지루는 이를 ‘문화정치학’으로 설명한다. 그는 진보적인 교육학이 “문화정치학의 한 형태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모두를 변혁적 지성인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학생을 변혁적 지성인으로 보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학생을 ‘변혁적 지성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적합성 담론’의 함정에 빠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이에 대하여 파울로 프레이리는 《자유의 교육학》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식론적 호기심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비판하고 거부할 수 있다. 또한 학생과 교사의 창의성을 손상시키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해도 학습자가 반드시 정체될 운명에 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받아 온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바로 배움의 과정 그 자체를 통해, 학습자는 이러한 권위주의와 ‘은행 저금식 체제’의 인식론적 오류를 피해 갈 수 있으며 극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학습자는 ‘은행 저금식 체제’라는 행동 정식에 종속되어 있더라도 자신의 호기심을 더욱 예리하게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할 수 있는 역량을 자극하는 저항의 불꽃을 생생하게 보존하여 은행 저금식 체제에 대항할 면역력을 키운다는 점이다. (……) 물론 이러한 역량을 부각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은행 저금식 체제’의 교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문제 제기’를 본질적인 역할로 삼는 교육자, 즉 비판적 능력을 발휘하는 교육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하찮은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다.
- 파울로 프레이리, 《자유의 교육학》, 28~29쪽
다시 말해,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공부에 대한 태도 ― 인식론적 호기심 ― 이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세상에 대한 인식론적 호기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교사가 스스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 준다’고 생각하는 태도로는 인식론적 호기심이 생겨날 수 없다. 교사는 자신이 학생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바로 그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적인 교사는 그가 갖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전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비판적 해석이 새로운 운명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안 좋게 흘러간다면 아이들이 세상에 대한 인식론적 호기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루는 이 글에서 좌파의 재생산 개념을 사용하는 대신, “문화생산의 사례”로서 세 가지 담론 - 생산의 담론, 텍스트 분석의 담론, 살아온 문화의 담론 - 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재생산 개념이 학교교육이 관계 안에서 다양한 경제적·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잘 지적하지만, 결국 이해관계가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어떻게 그 이해관계들이 중재되고 작동하고 주체적으로 생산되는지를 보여 주는 데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학교에서 용의 복장을 지도하는 것은 분명히 비민주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상당수의 학부모가, 상당수의 교사가 이를 찬성한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번 《오늘의 교육》 특집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이지 않은 관계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어떤 행위가 비민주적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어나는 비민주적인 행위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번 특집은 학교에 대한 기존의 비판을 넘어서 진보적이라는 교사들도 안고 있는 문제를 짚고 있지만, 여전히 전자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만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제는 학교의 무엇이 문제인지만을 밝히는 데에서 나아가 그 문제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교사, 학생, 학부모, 관리자 등 학교의 여러 주체가 어떻게 서로의 태도와 선택에 영향을 미치며 이런 상황을 낳고 있는지를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번 특집에서도 학생들은 학교와 교실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들어 보았으면 어땠을까?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지루가 제시한 세 가지 담론 중에서도 특히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 관심이 간다. 이 담론이 학교 현장의 문제를 분석하고 실천을 모색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그동안 《오늘의 교육》에서도 정작 잘 담지 못한 학생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되돌려 주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 문화적 ․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 이 담론은 중재를 끌어내는 문화 ‘재료’, 즉 이야기, 기억, 서사 등 의식적 ․ 무의식적 자료들을 통해 지배 집단과 종속 집단의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또 각기 다른 세계 읽기를 내놓는다. 이 담론은 또한 어떤 교실 교육학에서든 나타나는 특정한 사회적 입장, 역사, 주관적 이해관계, 사적 세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이데올로기와 실천의 일부이다.”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 적합성 담론에서처럼 ‘비어 있는’, ‘채워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교사의 역할은 학생들의 “역사, 꿈, 경험에 주목하는 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어.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해’가 아니라 ‘너희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나도 이렇게 살았는데’로 바뀌어야 한다. “살아온 문화가 다른 개인들이 각자 자신을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설명하는 것, 이는 학교교육의 지배 문화 때문에 자주 입을 봉하게 되는 학생들의 경험까지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교육 기법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교사는 지식의 전수자가 아닌 학습의 조력자가 되며 학생은 공동체 학습의 일원이 된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가진 서로 다른 경험이 이야기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다. “이 담론은 권력과 지식이 종속 집단 출신 학생의 문화 자본을 부정하기 위해 어떻게 관계 맺는지, 이 담론이 가능성의 언어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보탬이 된다. 즉 살아온 문화의 담론은 대중의 비판교육학을 개발하는 데 사용된다. 대중은 인정과 질문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삶의 경험에서 나온 지식에 다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우리의 교육이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능성’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닫힌 불가능성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실천이 어쩌면 ‘애들 소꿉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소꿉장난’을 중단하고 닫힌 현실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현실이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데 있다. 교사는 혼자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멀리서 관찰자로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관찰자가 되는 순간, 우리의 눈에 포착된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과거의 현실, 또는 가공된 현실이다. 나는 교사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현실에 부딪칠 때, 비록 부분적이지만 정확히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실천하며 다양하게 현실을 포착해야 하고 그렇게 포착한 현실들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현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리좀’ ― 시작도 끝도 없는 평등한 관계망 ― 이며 ‘기관 없는 몸체’ ― 자율적이며 실천적인 개인 ― 가 되어야 한다.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이 “우리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서, 현실의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는 데서,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교육 불가능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것,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게 인정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서 나아가 부족하더라도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며 복잡하고 미묘한 현장의 고민들을 다뤄 가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은 현장에서 실험된 것들을 바탕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영선의 ‘흑역사’보다는 ‘흑역사 그 이후’가 더 궁금했다. ‘흑역사’에 대한 부정이 교육공동체 벗의 기본 가정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그 이후’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 교육의 근본적인 전환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잊지 않으면서도 어찌 보면 부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자세히 나누고 싶다.
‘흑역사 그 이후’ 시즌 2.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겨졌다. 시즌 2의 주제는 이번 호에서 이야기된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 또는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되돌려 주기’가 되지 않을까? 앞서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교사들이 자신이 만나고 있는 학생들과 어떤 주제에 대해 각자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예컨대, 학교폭력에 대한 생각, ‘뒷담화’에 대한 생각, 알바에 대한 생각, 스타일(패션)에 대한 생각, 수업에 대한 생각 등……. 최근에 교육공동체 벗 카페에 올라왔던 질문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워야 할까?’에 대해서도 학생들과 각자의 경험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는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거나, 또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으로 여겨진 것들이 사실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는 걸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질문부터가 그렇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권리를 갖지 못한 자의 권리를 다루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혹은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 자격 없는 자의 자격을 다루는 것이다. 학교에서 정치란 바로 무가치한 존재로 분류되거나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인식하는 학생, 즉 비시민적 존재들이 그들의 권리를 갖겠다고 투쟁하도록 돕고 연대하는 것이다. (……) 수업은 진도를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를 가져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 정용주, 위의 글, 29쪽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우리는 특집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볼 수 있다. ‘학생/교사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를 가질 수 있는가?’ 이제 답은 명확해졌다. 그리고 슬프게도 조한혜정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풀어 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 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은 딱히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현상을 뜻하기보다는 지식과 삶이 겉도는 현상을 뜻한다.
- 조한혜정,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서문 중
어쩌면 교육공동체 벗이 추구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교육》과 《벗마을 이야기》, 그리고 카페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풀어 갈 언어를 만들어 가고 있다. 벗들의 역사, 꿈, 경험에 주목하는 담론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담론을 만들어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민주주의’라면 더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는 너무 조급하게 담론을 형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아무런 결론도 없이 유보만 해서도 안 된다. 《오늘의 교육》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그동안 교육의 현안들에 대하여 치열하게, 그리고 색다르게 성찰과 실천의 목소리를 내 왔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더 인내심을 갖고 벗들의 사유와 실천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아울러 여전히 교육공동체 벗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교사 조합원들의 정체성과 문제의식의 기반이 학교에 있음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사유와 실천이 《오늘의 교육》에만 머무르지 않고 벗들이 활동하는, 그리고 학생들과 만나는 학교에까지 연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그 현실이 너무나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데 있다. 교사는 혼자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멀리서 관찰자로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관찰자가 되는 순간, 우리의 눈에 포착된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과거의 현실, 또는 가공된 현실이다. 나는 교사들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현실에 부딪칠 때, 비록 부분적이지만 정확히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실천하며 다양하게 현실을 포착해야 하고 그렇게 포착한 현실들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현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