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을 위한 변명, 교사를 위한 변명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2 텍스트 비평
공현. 교사 탓으로 보지 아니함.《오늘의 교육》vol. 17
참고도서
《오늘의 교육》vol. 06 특집 <교육 불가능의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
《오늘의 교육》vol. 14 특집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오늘의 교육》vol. 15 특집 <민주주의를 가르쳐라?>
《오늘의 교육》vol. 16 특집 <교육과 민주주의, 그 사이의 긴장들>
《오늘의 교육》은 지난 2012년 1·2월호의 특집 <교육 불가능의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 여는 글에서 “지금은 교육 불가능의 시대이고, 우리 모두가 무능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인정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큰 기획이 나오지 않으면 변화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이끌어 내지도, 변화를 위한 힘을 모아 내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시대를 사유할 수 있는 거대 담론이 필요한 것이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 공현이 보기에는.
지난 2013년 11·12월호의 특집 <오늘의 교육의 오늘을 묻다>에서 공현은 (교육 불가능의 현실을) 교사의 탓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육 불가능의 시대, 교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현의 주장이 - 직설적인 표현인지, 반어적인 표현인지는 다소 헷갈린다 - 공현의 것만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위로로 다가왔다. 왜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정말 엉엉 울고 싶은 일을 당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가 위로해주기는커녕 엄청 까칠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게 더 위로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물론 이것이 아무 때나 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선은 친구의 그 까칠함 속에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그 진심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공현의 ‘까칠한’ 글 속에 담긴 그의 진심을 말해보고자 한다.
교사의 힘으로 학생인권이나 민주주의가 꽃피는 학교를 만들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생들을 위해서 교사가 무언가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것이다. 불가능을 인정하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교사 탓이 아니다.
원래 교육공동체 벗에서 말하는 ‘교육 불가능’ 담론이 그런 것 아닌가? 나에게 교육 불가능 담론은 아주 명쾌하게 다가온다. 학교는 망했거나 망해 가고 있다. 지금의 학교를 붙들고 정상화시키고 살리려는 꿈은 성공할 수 없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버둥거리며 살 길을 찾아가겠지만, 지금의 학교를 살려 내는 길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 불가능을 받아들인다면서 계속해서 어떤 구체적인 실천 사례나 답을 요구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우리는 망해 가는 학교에서 교육적인 활동을 할 수도 있고 여러 시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이 총체적인 교육 불가능을 극복하거나 학교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되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 공현, <교사 탓으로 보지 아니함>, 《오늘의 교육》2013년 11·12월호, 53~54쪽
공현은 “학교는 망했거나 망해 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어떤 구체적인 실천 사례나 답을 요구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사의 ‘신비로운 이중성’이라고 지적한다.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해 줘야 하고, 교사가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의무감과 유능감 같은 것 깔려 있는 것이다. 때로는 교사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그런 태도가 느껴질 때가 있어서 신비로운 이중성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 공현, 앞의 글, 50쪽
나는 공현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교육공동체 벗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정확히 짚어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인가, 의미 있는 공간인가. 교육은 불가능한가, 가능한가.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학교 안의 교육인가, 학교 밖의 교육도 포함하는 것인가. 교육 공동체 벗은 교사들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교사가 아닌 사람들도 포함하는 공동체인가. 어찌 보면 지난 해 교육공동체 벗의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던(약간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련된 논쟁도 이에 대한 벗들의 의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소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의 교육》2013년 5․6월호와 7․8월호에 실린 정용주, 조영선, 박복선의 글들이 “민주주와 교육,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가능하다.”로 끝을 맺고 있는 반면, 《오늘의 교육》2013년 9․10월호에 실린 이민동, 조성실, 박동준의 글들은 “민주주의와 교육,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로 끝을 맺고 있다고 느꼈다. 앞의 글들과 뒤의 글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앞의 글들이 학교(교실)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성찰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교육을 실천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고 있다면, 뒤의 글들은 동일한 성찰로부터 학교(교실)에서의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글로 여러 벗들로부터 ‘계몽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정용주, 조영선, 박복선 - 모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이다 - 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들이 아무리 《오늘의 교육》 독자들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 순간, ‘계몽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실시간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커뮤니티와는 달리, 책이라는 매체는 어쩔 수 없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계몽’이라는 용어를 부정적으로 쓰지 않았으면 한다. 당위를 이야기하는 글이 ‘담론’이라면, 실천을 이야기하는 글의 극단은 ‘일기’ 또는 ‘매뉴얼’일 것이다. 《오늘의 교육》에 실리는 벗들의 글은 담론과 매뉴얼의 어느 중간일 수밖에 없는데, 어떤 담론이 ‘계몽적’이라는 말 속에는 실현 불가능한 담론을 놓고 왈가왈부하기 싫으니 실현 가능한 매뉴얼을 내놓으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실천을 담보하지 않은 공허한 메아리를 향한 ‘계몽’이라는 표현은 적합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고민과 성찰을 외면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라면 곤란하다. 한편, 담론의 발화자에게 ‘계몽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태도에서 발화된 담론의 내용을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고민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핀잔으로 느끼는 일종의 피해의식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동안 이 사회 -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 가 모든 (학교)교육문제를 교사의 탓으로 돌려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학생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말하는 글이 ‘계몽적’이라는 식의 수사는, 교사들의 마음속에 있는 교사가 뭔가를 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반영한 것이다.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다 보니까 당위와 방향을 얘기하는 글들이 자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마치 내가 생태주의적 문제에 대해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교육》에 실리는 교육농(農) 같은 이야기가 아주 계몽적이고 나를 재촉하는 듯 느껴지는 것처럼.
- 공현, 앞의 글, 53쪽
나 역시 비슷한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다. 교육 공동체 벗 카페에 밀양과 관련된 소식을 접할 때가 그러하다. 그런데 밀양 소식을 담은 글의 조회수나 댓글수를 보면 다른 벗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풀씨기언’이나 ‘이계삼’이 밀양소식을 전달할 때, ‘교육 공동체 벗 조합원이라면 모두 이 글을 읽고, 행동에 나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텐데도 우리는 부담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그 부담감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부담감에 짓눌려서도 안 되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그리고 역량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자책할 필요도 없고, 합리화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밀양 희망 버스에 오르지 못했지만, 다른 벗들이 나 대신 버스를 탔다. 우리의 염려와 성원은 그들을 통하여 밀양에 전달될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 아닌가.
그래서 내가 교사들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은 ‘교사 탓으로 보지 아니함’이다. 학교에서 학생인권이 침해되는 것도,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것도 교사 탓이 아니다. 아니 뭐 교사 집단의 탓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딱 동시대에 우리 사회를 살고 교육계에 연관된 사람들과 비슷한 고만고만한 수준의 책임이다. 교육의 난맥상이 교사들에게 주된 책임이 있고 교사들이 무언가 해결을 해야 한다는 관념을 버리시라. 교사들에게 주어진 짐은 이미 충분히 과중하다.
- 공현, 앞의 글, 53쪽
공현의 진심은 이것이다. 우리 교육의 난맥상은 교사가 혼자서 짊어진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놓고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하다가 결국 좌절하지 말고(신비로운 이중성),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서로의 역할을 나누자. 오늘은 당신이 희망 버스에 오르지만 내일은 내가 오를 것이다. 나는 당신(아니, 우리)의 짐을 함께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솔직해지겠다. 오늘날 이 세상의 변화는 감당할 수 없이 버겁다. 그 사회상을 깔대기로 모아 내듯 한 교육계야 더 말할 나위 없다. 과거 아낌없이 지지하고 성원을 보냈던 ‘참교육’은 이제 더 이상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과거의 기억이다. 하여 한때 교육운동은 곧 전교조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미 다양한 교육운동단체들이 존재한다. 청소년단체들만 해도 여럿이다. 교육운동 진영에서 전교조 조합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나 주지하다시피 수가 많다고 운동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운동은 다양한 분야에서 개별 주체들의 자발적 참여와 수평적인 연대를 통해서 에너지를 교환하고 파급을 일으킨다.
- 김기언, <껍데기를 버릴 수 있을까>, 《오늘의 교육》2013년 11·12월호, 83쪽
전교조와 교사-벗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김기언의 글이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교사-벗들)는 교육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우리의 외침은 그저 우리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알아달라는 그런 종류의 외침이었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용기를 내어 손을 맞잡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현의 글 속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해 《오늘의 교육》5·6월호 특집 <학교는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이후 촉발된 특집에 대한 리뷰나 반론들 - 나 역시 《오늘의 교육》7·8월호에 <성찰과 비판, 그 너머가 필요하다>는 리뷰를 쓴 바 있다 - 은 이혁규의 말마따나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목소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서 “벗이라는 조합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차이와 이질성을 드러내고 순환시킴으로써 서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 낼 수 있을 때”에라야 공동체의 공동체성이 새롭게 확인되고 확보될 수 있는 것이지, 자칫 잘못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공현의 글 속에서도 (서두에서 말한 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교사들이 자기 앞가림부터 제대로 하기를 바란다. 학생들에게 학생인권과 민주주의를 실천하게 하는 것보다는 말이다.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사들은 학교 운영에서 자신은 과연 민주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를 신경 쓰는 것이 먼저 아닐까?
- 공현, 앞의 글, 55쪽
사실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지적이 교사-벗들에게는 다소 억울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 앞가림’부터 하려는 시도가 ‘민주주의’ 특집과 관련된 이전의 글에서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자가 누구인가? 무능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교사인 우리 자신이다. 이번 특집은 학교의 민주주의를 주로 ‘권력자’로서 교사에 초점을 맞춰 풀고 있지만 교사 역시 정치적 자유나 교무실에서의 발언권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격을 운운하는 자들의 실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에게 부여된 쥐꼬리만 한 권력으로 학생들의 자격을 운운하는 우리의 실체를 성찰해야 한다. “학급은 사실 중앙집권적 관료적 통제의 제일 말단의 단위”(조영선)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도 학급 운영이나 수업의 비민주성이 학교 제도의 비민주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면서도 학교 제도가 특집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 윤상혁, <성찰과 비판, 그 너머가 필요하다>, 《오늘의 교육》2013년 7·8월호, 55쪽
사석에서는 입만 열면 야자, 보충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사들이 정작 교무실에서는 학생들을 붙잡고 닦달하는 서글픈 현실을 그들의 이중성과 나약함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틀리지 않은 것일지라도, 현실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무능하다.
- 이민동, <학생과 권력을 나눈다는 것, 그리고 교실 민주주의>, 《오늘의 교육》2013년 9·10월호, 17쪽
물론 자기성찰을 했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앞의 글들이 교사들이 자기 앞가림을 했다는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이 벗들 사이에서 논의되어왔다는 사실을 언급해주었더라면 섭섭함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이 있다. 만약 우리(특히, 교사-벗들)가 공현의 글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학교(혹은 교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교사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공현이 보기에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다. “학교는 (이미) 망했거나 망해 가고 있다. 지금의 학교를 붙들고 정상화시키고 살리려는 꿈은 성공할 수 없다.” 물론 공현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벗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필자와 같이 교사-벗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학교가 망할 운명이라면, 최선의 길은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럴 수 없는 자들에게 남아 있는 역할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와 같은 푸념을 공현에게 돌릴 수는 없다. 사실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라는 주장은 이미 교육공동체 벗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주장이 벗들 사이에서 일치된 견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교육 공동체 벗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에 가깝다.
교육 불가능과 관련된 핵심적인 주장은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라는 주장이라고 앞에서 언급했다. 이계삼 선생은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라고 주장하고, 안준철 선생은 학교는 여전히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누구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를 논하기 전에 여기서 다시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 논쟁에 뛰어든 사람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의 명시적 목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중략) … 따라서 학교교육의 의미는 수많은 구성원들의 집합적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교섭되고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실체이다.
- 이혁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오늘의 교육》2013년 11·12월호, 23쪽
다시 말해 학교가 ‘의미 있는 공간이다’ 혹은 ‘의미 없는 공간이다’라고 천명할 권리가 교사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타일러Tyler식 교육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교육의 3주체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나머지 두 주체를 너무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의 3주체라는 말도 사실은 배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교사가 아니면, 학생이 아니면, 학부모가 아니면 교육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었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진실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학교가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간으로 느끼는 학생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말에 대하여 교사로서 반감이 생기는 이유는 이 말이 풍기는 부정적 어감 때문이다. 아마 앞에 ‘제도권’이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기만 했어도 반감이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한정이 되어 버리면 반대로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가 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작년 초 교육 공동체 벗의 조합원이 되었을 때,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육 공동체 벗에서 출간한 도서들을 한 번 보자. 《그리고 학교는 무사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상상하라 다른 교육》. 요약하면 이렇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여전히 학교는 무사하네? 이게 말이 돼? 이게 교육이야? 우리는 다른 교육을 상상해야 돼.’ 하지만 이런 책들도 있다.《내 어린 늑대와 강아지들》,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괜찮아 그러면서 크는 거야》. 안정선과 안준철과 류명숙의 눈 속에 아이들은 여전히 귀여운 강아지들이고,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어찌 됐든 성장하고 있다.
교육공동체 벗 카페를 들어가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그의 고향 밀양에서 자행되고 있는 국가폭력에 맞서느라 늦어지고는 있지만) 현재의 학교에서는 그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으므로 학교 밖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보는 이계삼의 시각과 여전히 지금의 학교 안에서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고 보는 안준철의 시각이 공존한다. 벗들의 글들은 이계삼에서 시작해서 안준철로 끝나는 교육(불)가능성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쯤이 될 것이다. 이계삼에게 보내는 안준철의 편지 <이계삼 선생님께>와 이에 대한 이계삼의 답장 <안준철 선생님께>에서 오간 이야기들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물론 이혁규의 말마따나 두 사람의 주장이 대척점에 있지는 않다. “이계삼 선생도 안준철 선생도 현재의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입시 위주인 학교교육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이 대립은 학교교육의 현실 진단에 대한 대립이라기보다는 대안적 실천과 관련된 견해차의 성격이 더 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학교가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의미는 없을 지라도 할 일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학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행되는 곳인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교육 환경은 이전보다 황폐해졌고, 교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물론 언제는 교사의 권위가 있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교육의 위기를 넘어 이제는 붕괴, 해체가 논의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와중에 저는 정말 운 좋게 대도시의 중학교에서, 그것도 여중에서, 그것도 어느 정도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용인되는 학교에서, 동료교사나 학생들로 인하여 큰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학급과 동아리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운이 좋은 교사입니다. 만약 교육 불가능성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면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지표는 매우 양호할 것입니다.
아마도 제 나이(73년생입니다) 또래의 벗들에게는 거의 공통적일 거라 생각되는데, 교사 초년생이던 시절, <빛깔 있는 학급운영1, 2, 3>(이상대 외),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1, 2>(이상석) 등을 읽으면서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열패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내가 도달해야 할 (최종의 푯대까지는 아니지만) 목표지점으로 생각하며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지금도 이 책들을 꺼내 읽으면, '이분들께서는 어찌 저 나이에 벌써 저런 생각을, 저런 실천을 하셨는가 싶으면서, 제 스스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교육은 이미 훌륭한 선배들이 쌓아 놓은 업적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가 하는 교육은 이미 생명을 다한, 구시대적인 병폐의 목숨을 억지로 연명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현장의 교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15년 전 ‘빛깔 있는 학급운영’ 앞에서 열패감에 빠졌던 교사가 이제는 다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앞에서 열패감에 빠져 묻습니다.
… (중략) …
제가 이곳에 올리는 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예고 없이 글을 올리기 시작했으니 예고 없이 그냥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글을 올리는 동안에는 저에게 일어난 일들을 최대한 가감 없이, 그러나 스스로 판단하기에 교육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올릴 겁니다. 저는 감히 이것이 교육 공동체 벗이 책을 내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우리의 교육이 망해야만 하는 것일지라도 그 곳에 있는 아이들, 부모 잘(못) 만나 대안학교, 특목고, 외국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이뤄 내고, (제가 그래 왔듯이) 저의 뒤를 뚜벅뚜벅 따라올 분들을 위하여 그 족적을 남기는 것이 저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윤상혁, <4월 둘째 주 학교생활 스케치>, 《교육 공동체 벗》카페 글 (2013.4.13)
나는 우리(교사-벗들)가 ‘다른 교육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가능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연한 듯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즉 이상과 현실이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영 이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할 지라도 말이다.
나는 우리(교사-벗들)가 ‘다른 교육을 상상’하면서 동시에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가능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연한 듯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면서, 즉 이상과 현실이라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영 이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할 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