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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29. 2015

‘교생’이라 쓰고 ‘미래의 동료’라 읽는다

교육실습에 대한 단상斷想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1 텍스트 비평

김수현. ‘교생’이라 쓰고 ‘천덕꾸러기’라 읽는다.《오늘의 교육》vol. 15

참고도서

요아힘 바우어 《학교를 칭찬하라》

제임스 M. 배너 주니어, 해럴드 C. 캐넌《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김수현의 글 〈‘교생’이라 쓰고 ‘천덕꾸러기’라 읽는다〉를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왜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다니는 그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어야 하지? 대학의 한 학기는 고작 4개월. 이를 위한 수업료로 5백만 원 가까운 돈을 내는 것을 생각하면 한 달간의 교육실습을 위해 약 10만 원(고작!)의 교육실습비를 지급하는 것 말고는 교육실습을 위한 그 어떤 지원 방안도 고민하지 않는 대학의 태도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중등학교도 마찬가지다. KTX보다 더 빠른 ‘학교의 시간’에 교생을 동승시킬 생각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어차피 한 달이면 끝날 텐데’라는 생각들 속에서 교생들은 천덕꾸러기 또는 잡무 처리사로 머물다 간다. 그나마 교육실습은 실습에 방점이 찍혀 있으니 형식적으로라도 ‘선생님’ 취급을 해 주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또 하나의 관문(지옥의 문?)인 ‘교육봉사’는 그 어떤 교육적 의미도 없어 보인다(혹시 교사의 잡무 체험?). 학교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현재의 시스템은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미끼로 사범대생들에게 온갖 희생을 강요하는 대학―중등학교 카르텔의 착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김수현 <'교생’이라 쓰고 ‘천덕꾸러기’라 읽는다>


나는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하는 교육실습이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학교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싹수’ 있는 후배들이 교사의 꿈을 접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교육실습의 목표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라기보다 교생에게 ‘교사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중등학교 교육실습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의대생이 학교에서 실습을 게을리하면 후에 환자에게 변고가 생기고, 공고생이 공장에서 실습을 게을리하면 자기 몸을 다치게 만든다. 그런데 교생이 교육실습을 대충 때워도 학교 현장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 학교 어디에도 ‘학생과 관계 맺기’, ‘교사다움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교수-학습 모형의 실천 사례와

노하우’ 등 오랜 시간 부딪치며 고민해 온 것들을 전수해 줄, 마치 ‘장인’ 같은 선배 교사의 특별한 가르침 같은 건 없다. 그런데 무슨 교육실습이 중요하겠는가? 얼른 교육실습 2학점 이수하고 노량진 고시학원에서 전공과 교육학을 성공적으로 ‘암기’한 후 임용 시험에 합격해 괜찮은 직업 교사가 되는 게 중요할 뿐이지.

- 김수현,〈‘교생’이라 쓰고 ‘천덕꾸러기’라 읽는다〉, 167쪽     


스스로 물어본다. 나는 진정 교생들을 나의 후배 교사로 여기고 있는가. 김수현의 글에 나온 것처럼 “난 너희들과 달라. 앞으로 넌 내 동료가 될 수 없을 거다”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육계의 갑을 관계와 대학의 갑을 관계에서 을 중의 을이라고 할 수 있는 교생들의 처지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도 한때는 천덕꾸러기였다


당연히 1997년에도 천덕꾸러기들은 많았다. 그중에 한 명이었던 나는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에서 교육실습을 받았다. 실습 학급을 배정받았으나 학급 지도 교사는 조 ․ 종례 참관만 시킬 뿐 내게 그 이상의 역할은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담임 교사가 앞에서 조회를 하고 있는데(뒤에는 교생이 들어와 서 있는데) 이어폰을 끼고 스포츠 신문을 읽는 맨 뒷자리 학생의 모습에 그 이상의 역할을 맡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교과 지도 교사는 정반대였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원로 교사였는데 하루인가 이틀인가 수업 참관을 시키더니 그 다음 날부터 교육실습이 끝날 때까지 나에게 수업을 맡겼다. 수업에 대한 그 어떤 조언도 없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당시 나는 교육실습이 너무너무 지루했다. 학급 지도 교사는 나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고, 교과 지도 교사는 자신의 모든 수업을 맡겼다. 원로 교사라 수업이 일주일에 12시간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수업 준비를 마치고도 시간이 남으면 한글 타자 연습을 하거나 앉아서 졸았다.


수학과 교사들과의 회식 자리도 있었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는 대화 내용은 없다. 수학 교수 출신인 교장과의 알력, 대기업이 재단으로 들어온 후 촌지가 없어진 것에 대한 불만 정도가 기억에 남는 전부이다. 점심 식사가 매우 잘 나왔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할까. 교육실습 첫날 어떤 환영식도 없었듯이, 어떤 송별식도 없이 4주간의 교육실습이 막을 내렸고, 이듬해 나는 임용 시험 대신 자연과학대(수학과) 일반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중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나의 초창기 교사 생활은 형편없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도 많았다. 내가 교사를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까마득한 선배 교사(정확히 말하면 교장)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칭찬이 아니었다. “윤 선생, 오늘 시간 돼?” 맥주와 치킨을 즐기셔서 가끔 호프집에서 독대를 하곤 했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 ― 교육에 대한 설익은 생각들 ― 을 메모까지 하며 감탄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윤 선생, 지금 시간 돼?” 얼마 후 공강 시간에 교장실에 가 보니 메모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신께서 정리하신 구상을 보여 주시면서 “이거 윤 선생이 생각한 것과 맞는지 보고 틀렸으면 좀 고쳐 봐” 이러시는 것이 아닌가. ‘나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했었다. 그 당시 내가 제안한 것 중 하나는 그 선배 교사의 지지와 지원 속에 ‘작은 학년제’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고 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2년간 학년부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선배 교사는 20여 년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 교사를 진심으로 동료로 생각한 것이다. 그 선배 교사는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재능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진정한 교사였다고 생각한다. 이분은 윤지형의《다시 교육의 희망을 묻는다면》에도 소개된 바 있는 고춘식 벗이다.      



우리에게 예비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잘하는 것은 깎아내리고 잘 못하는 것은 흉보는 것. 교직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다. 교직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바로 동료성의 부재이다. (교사의) 동료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동료 교사의 전문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들 간의 헌신과 신뢰의 관계 맺음을 의미한다. 학교공동체와 동료성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가장 성공적인 학교는 동료성을 바탕으로 한 전문적인 공동체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한 학교들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연구들에 의하면 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보듬어 주고 격려해 주며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칭찬해 주는 동료를 가진 학교가 그렇지 않은 학교보다 교사들의 효능성, 집단적인 책임감, 교직 전문성 지각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공동체 의식과 학업 성취를 높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직 사회는 고립된 섬들의 연합이다. 더욱이 교원 평가로 인하여 교사들 간의 동료성은 더욱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는 나의 성찰과 깨달음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집단의 구성원들의 성찰과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긍정적인(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나는 교사마다 품고 있는 빛나는 재능들이 동료성의 이름으로 서로 간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때, 이것은 교사 개인의 교육력을 넘어 그가(그들이) 속한 학교의 교육력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우리는 동료성의 범위를 시 ․ 공간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를 넘어 동료를 만나는 것이 공간적인 확장이라면, 예비 교사부터 은퇴한 교사까지 연령과 경력을 따지지 않고 동료를 만나는 것은 시간적인 확장이 아닐까?     


이번 교육실습으로 내가 배운 게 많다. 교생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읽었던 교수-학습 방법론이나 교사론에 대한 책에서 얻은 깨달음이 다가 아니다. 교생을 지도하면서 교사로서 나를 돌아보게 됐고, 교생을 대하는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사람의 그릇에 대해 배웠다. 모두가 서로에게 배운 게 많으니 이번 교육실습은 성공일까?

- 김수현, 앞의 책, 170쪽     


우리가 교육실습에서 놓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교육실습은 오직 교생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교생 선생님에게 매료되는 까닭은 짧은 시간이지만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철없는 이상과 남루한 현실이 만나 이상은 좀 더 가능성을 띠게 되고 현실은 좀 더 생동감을 갖게 되는 것이 교육실습의 목적이 아닐까? 교육실습이 시작하기 전과 끝난 후의 우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생’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그래, 나도 저랬지!”), 현재를 보고(“내가 잘 가르쳐 주고 있나?”), 미래를 보게 된다(“우리 동료 교사로 다시 만나요!”). 그렇다. 그들은 과거의 나이자 미래의 동료인 것이다.     



예비 교사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2013년 우리 학교는 16명의 교육실습생을 받았다. 그중에는 내가 담임이었던 학급의 제자도 있었고, 내가 맡고 있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제자도 있었다. 또 과 후배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들의 교육실습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교육실습 담당 선생님의 양해를 얻어 몇 차례 교생 선생님들과 만남을 가졌다. 사실 처음에는 꿈이 좀 컸다. “매년 4주간의 교육실습이 진행된다. 교육실습은 교직 이수를 위한 필수 코스이다. 대체로 교생들은 교육실습에 큰 기대를 갖고 임하지만 그들의 기대가 잘 충족되는지는 알 수 없다.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강평회를 통해 교생들은 4주간의 교육실습에 대해 예의 있는 평가를 내 놓지만 그것이 정확한 평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교생이나 학교, 학생 모두에게 성공적인 교육실습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를 교육실습 참여자인 교생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것이 처음의 문제의식이었다. 불행히도 이 문제의식은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다. 하지만 이 글이 김수현의 제안에 대한 응답이듯이 이 글을 읽는 벗 중에서 또 다른 응답을 주시리라 기대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교생 선생님들과의 첫 만남에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이번 교육실습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나요?” “당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상은 무엇인가요?” 교생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상을 몇 가지만 소개한다.     


“초 ․ 중 ․ 고 교육을 받으면서 12명의 담임 교사들에 다른 과목 교사들까지 합쳐 수많은 교사들을 보면서 커 왔어요. 그런데 내가 학생이었을 당시를 생각해 보면 학교 조직이 매우 위계적이어서 학생들은 늘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강요당하고, 교사들은 제 이야기를 잘 들어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과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다양한데 학교 운영의 편의를 위해 아이들의 소리를 그다지 귀에 담아 듣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사는 소통할 줄 아는 교사입니다.”     


“교사는 인생의 안내자로서 학생들에게 사랑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자질을 꼭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항상 일관성 있는 태도로 학생들을 대해야 하고요. 또한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학생들의 가능성을 찾고, 그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과 끊임없는 의사소통으로 사제 간에 원만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교사가 바람직한 교사 같아요.”     


“교사로서 전문성을 실현하면서 학생들이 성장하며 겪는 많은 어려운 점들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격려하는 교사, 학생이 바른 가치관을 갖고 자신만의 꿈을 품고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사가 바람직한 교사 아닐까요?”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진실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필요한 지식을 학생의 수준에 맞게 최선의 방법으로 교수했다면 잘 가르치는 교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바람직한 교사까지는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 대한 진심과 열정, 이것이 다른 전문직과는 다른 교사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이라고 생각해요.”     


“교사는 학생보다 많이 알아야 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르치려는 내용에 따라 교수 방법과 교구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교수법이 효과적인지 계속해서 연구하고, 새롭게 개발된 교구를 활용하는 법을 지속적으로 익히고요.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는 교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잘 가르치는 교사가 곧 훌륭한 교사는 아니라는 것이죠. 교사의 모습, 행동이 학생의 인격 형성과 잠재적인 능력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학급 학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통해 그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람직한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들은 한 달간의 교육실습을 통하여 선배 교사들의 모습 속에서 바람직한 교사상을 발견했을까? 예비 교사들에게 우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교육실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육부(또는 교육청)는 쓸데없는 자료집 제작에 헛돈 쓰지 말고 교생 지도 매뉴얼이나 만들어 달라는 김수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교 현장에 교생을 위한 기본적인 교육과정조차 없는 이유가 학교에 ‘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며, “어차피 임용 시험을 합격해야 교사가 되는 거고 대학에 돌아가서 내야 할 과제가 태산일 텐데 교육실습은 학교나 교생이나 피차 쉬었다 가면 좋을 터”라는 분석도 정곡을 찌른다.


김수현은 계속해서 “교육학자들이 교원양성체제나 교원 연수를 연구하면서 교육실습의 문제점을 수없이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었다”고 말한다. 왜 그런 걸까? 단지 위의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교육학자들의 주장이 비현실적이었던 것일까? 교육행정상의 문제일까? 교육과정상의 문제일까? 아니면 교육철학적인 문제일까? 자신의 글이 “시스템의 개선보다 개인의 노력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압력이나 계몽으로 느껴질까 불안하다”는 김수현의 걱정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벗들에게 교육실습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보자는 제안을 (김수현의 제안에) 덧붙인다. 이를 위해 독일의 교원양성제도에 대해 언급한 다음 글을 벗들에게 소개한다.


요아힘 바우어 <학교를 칭찬하라>


교사 지원자들은 자신들이 수업에서 가르쳐야 하는 전문 분야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경험하며, 심지어 아이의 발달심리학에 관해서도 몇 가지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이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가르치는 대학의 강사와 교수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인데) 정작 학생들 앞에 섰을 때 필요한 실용적이고 사용 가능한 지식이다. 즉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 교사로서 학생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방법, 학급에서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과정들을 인지하고 건설적인 기여를 하며 문제가 생길 경우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 최근에 교사 단체와 교육부 협의회에서 요구했던 사항(“교사들이 개별 학생들에게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은 아직 교사 양성 교육에서 고려되지 않고 있다.

교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은 전공 공부만 할 게 아니라 ― 지금까지 정규 과목으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 다음과 같은 질문들도 숙고해 봐야 한다. 즉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구성 성분은 무엇일까?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과 성공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면 교사인 나는 어떤 영향력을 가져야 할까? 학급에서 오는 신호(공공연한 신호와 은폐된 신호)를 나는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장애가 있거나 혹은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아이들의 동기(대부분 무의식적인)는 무엇일까? 내가 등장하는 방식은 어떤 역할을 할까? 아이들의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공연하거나 은폐된) 나의 언어적 신호는 무엇일까? (……) 이런 측면 역시 교사 지원자들을 위한 교육에서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

- 요아힘 바우어, 《학교를 칭찬하라》, 90~91쪽     


이 글을 읽어 보면 이론과 현실의 괴리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고민의 차원이 우리와는 좀 다르다. 위의 책에 따르면 독일의 대학생들은 3학년 때 처음으로 교육실습을 받으며 실습도 한 학기나 받는다. 이마저도 부러운데 이 책의 저자인 요아힘 바우어는 1학년 2학기부터 학교에 파견되어 실습을 받아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실질적인 교육실습을 위한 저자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① 1학년 1학기 때 실습 학교를 정하고 지도 교사와 연락을 취해 2학기에 하게 될 수업을 대학에서 미리 준비한다. ② 실습이 시작되면 지도 교사와 함께 수업을 해 본다. ③ 지도 교사는 멘토가 되어 실습이 끝난 후에도 계속 조언자가 되어 준다.


교육공동체 벗의 조합원들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예비 교사들의 멘토가 되어 줄 수는 없을까? 예비 교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멘토가 되기 위한 매뉴얼이나 연수 과정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교육공동체 벗이 지향하는 교육적 목표를 확산시키고자 한다면 가장 적합한 대상은 바로 예비 교사들이 아닐까?  



오지랖 넓은 교사가 되자


이제 “교생들이 왔을 때 오지랖을 떠는 선배 교사가 되어 보면 어떨까?”라는 김수현의 제안에 대한 응답이자 맞장구로서 그동안 우리 학교의 교육실습에서 진행되었던 프로그램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나와 같은 맞장구가 몇 번 더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김수현이 제안한 ‘싹수 있는 예비 교사 양성을 위한 대안 교육실습 교육과정’ 또는 ‘교생 지도 매뉴얼’을 엮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학교의 교육실습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교육실습 첫날과 둘째 날은 교장, 교감 및 보직 교사의 강의를 듣고, 수업 참관은 셋째 날부터 시작된다. 매일 3시간 이상 참관해야 하며, 동 교과 수업을 먼저 듣고 그 후에는 타 교과 수업도 참관한다. 실제 수업은 2주 차 중반 혹은 3주 차부터 시작되는데, 이 기간에는 실제 수업과 수업 참관을 병행하면서 교생들끼리 서로 수업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해 준다. 담임 실습(조 ․ 종례 지도 및 상담)은 지도 교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상담은 2주 차부터, 조 ․ 종례 지도는 3주 차부터 시작한다. 수업 및 담임 업무뿐만 아니라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교직원 연수 등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참여한다.       


또한 우리 학교의 교육실습은 과제물이 많은 편이다. 교수 ․ 학습과정안 및 상담 일지를 제출하는 것 외에도 교육 관련 뉴스 두 건을 스크랩하고 기사 내용에 대해 본인의 논평을 작성하는 것, 교육 관련 도서(2012년도에는 요아힘 바우어의 《학교를 칭찬하라》 또는 이계삼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중 택 1)를 읽고 독후감 쓰기 등이 있으며, 마지막 주에는 교생 선생님들끼리 교육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하게 하였다.


매년 교생이 16명 정도가 배정되니까 교육실습 예산이 170~180만 원 정도 된다. 대학에 따라 10~12만 원 정도를 교육실습비로 내놓는다. 이 중에서 110만 원 정도가 지도 교사 수당(담임 수당, 교과 수당 각 3만 5천 원, 보직 교사 강의비 1만 원)으로 쓰이고 나머지 금액을 교생 간식, 강평회 다과비 등으로 썼다. 그러고도 돈을 조금 남겨서 교생 선생님들의 산출물들을 엮어 ‘교육실습 종합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교육실습 종합 보고서는 4주간의 교육실습 기간 동안 수업을 하면서 완성한 교수 ․ 학습과정안과 앞에서 소개한 과제들, 그리고 공교육을 주제로 한 교육실습생들의 자유로운 토론내용(이를 ‘공교육을 바라보는 15가지 시선’이라 표현했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인이다


지난 스승의 날, 학생들이 불러 주는 〈스승의 날〉 노래를 들으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인생, 영겁의 시간 속에 아이들과 나는 촌각을 다투며 이 세상에 잠깐 나타난 동시대인이다. 내가 아이들의 스승이라면 그것은 단지 아이들이 아직 날개를 달기 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랐을 때, 그들이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기억 속에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고. 학생들이 나와 동시대인일진대 하물며 교생들이야.  


가르침은 교사가 학생에게 끼치는, 그리고 끼쳐야만 하는 영향력을 자각한 뒤에 이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폭넓은 인격을 요구하는 소명은 다른 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배움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막중한 도덕적, 인간적 책임이 뒤따르는 가르침에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 훌륭한 교사의 자질을 완벽히 갖추고 교직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교사의 자질은 경험과 자기 인식을 통해 성장하고 원숙해진다. 교사는 가르칠 때 요구되는 것에 겁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막중한 책임이나 과중한 업무에 주눅이 들기도 하면서 차츰 그 어려운 일에 숙달되고 진정한 의미의 교사가 된다.

- 제임스 M. 배너 주니어·해럴드 C. 캐넌, 《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19쪽


제임스 M. 배너 주니어, 해럴드 C. 캐넌 <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동시대인이다. 내가 하늘을 날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먼저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도 날개를 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들이 선택한 길이 얼마나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니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깊은 소명 의식을 갖게 하는 일인지 알게 하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동료를 맞이하는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교육실습 첫날, 교육실습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는 오지랖 넓게도 다음과 같은 글을 교생 선생님들께 드렸다.     


어떤 교생 선생님에게는 이번 교육실습이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인이 큰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면 실제로 결과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사 자격증을 ‘보험용’으로 생각한다면 평생 보험용으로만 끝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절실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교육실습에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교생 선생님의 말과 행동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판단할 정도로 성숙하지만, 교생 선생님들이 계시는 동안 그들의 학교 생활이 흔들릴 정도로 미숙하기도 합니다. 교생 선생님에게는 단 4주간의 실습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시간이 적어도 1년은 갑니다. 아이들은 천차만별이며 ‘곱상’이든 ‘밉상’이든 귀한 영혼들입니다. ‘동정’하거나 ‘판단’하지 마시고 ‘진심’으로 대해 주세요.

수업 참관을 시작하기 전 ‘수업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기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 봅니다. 즉, 관점이 없으면 수업 현상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업을 바라보는 ‘눈’이 자신의 ‘편견’이 아닌 교육적 ‘관점’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수업 참관을 하실 때 다양한 선생님들의 다양한 수업을 보면서 굳이 수업에 대한 평가를 유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교생 선생님 스스로의 ‘수업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의 ‘출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지도 교사에게 ‘교육적인 배려’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당신에게더 큰 ‘교육적인 영향’을 끼칠지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배려를 받을수록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교생 선생님들은 지금 학생이 아닌 ‘예비 교사’라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판단은 본인 스스로가 내리는 것이며, 훌륭한 교사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교육적 성과를 내는 법입니다. 지도 교사에게 많이 물어보십시오.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정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칠이 말했다는 다음의 문구를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성공은 열정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거듭된 실패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번 4주간은 마음껏 실패해도 되는 기간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실패를 통해 더 큰 열정을 갖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동시대인으로부터 온 편지


교육실습이 끝날 무렵, 교생 선생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다. “교생 선생님께서는 왜 교사를 하려고 하시나요? 학생들에게 어떤 교사로 남고 싶으신가요? 교생 선생님 중에 나쁜 교사가 되고 싶으신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명 학생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고 싶으실 거예요. 그럼 그 ‘좋은 교사’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한 교생 선생님의 답변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제가 교사를 하려는 이유는…… 고등학교 때 방황을 해서 길을 많이 돌아왔습니다. 돌아보니 그때 선생님께서 조금만 더 잡아 주셨다면 빨리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를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교사를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교직 과목을 들으면서 보니 제가 가르치는 것, 말하는 것을 좋아하여 적성에도 맞아 확실히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좋은 교사란 학생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교사, 그리고 그 상황으로 학생에게 선입견을 갖지 않는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실습을 하면서 느낀 것은 담당 선생님께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에 관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학생의 성격, 심리, 감정, 집안 사정 등이 수치화되어 나와 있던데, 이런 것에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학생과의 접촉만을 가지고 그 학생을 이해하려는 이가 좋은 교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교과를 가르치는 데서 실험적인 수업을 많이 시도하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바뀌면 교구가 바뀌고, 그때에 빠르게 대처해야 도태되지 않는 수업이 될 것입니다.

학급 담당인 A선생님께서는 최대한 학생들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학급을 이끌어 가고자 하셨고, 학생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이양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이 한 일을 선생님께서 다시 보고 고치는 등 시간이 더 걸리고 손이 많이 감에도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과 담당인 B선생님께는 유연한 수업 방식에 대해 배웠습니다. 저는 실습을 나오기 전에는 직접 교수법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B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하며, 협동 학습의 장점에 대해 배웠고, 이것이 특히 언어 교과인 영어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B선생님께서 보여 주신 방법을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교사로서의 제 가능성은 수업이 즐겁고, 학생과의 소통이 즐겁다는 점입니다. 수업을 준비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때로는 학생들이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하거나 우리 반 아이들을 만나면 쉴 때보다 더 큰 힐링이 되었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지만 수업에 들어가서는 가면을 쓴 듯 다른 사람이 되었고, 평소에는 말을 잘 못하지만 아이들과는 이야기를 들어 주고 조언하는 모든 과정이 스트레스보다는 즐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내년 봄, 천덕꾸러기의 모습을 한 ‘과거의 우리’가 꾸벅 인사를 할 때, 반갑게 맞이해주면 좋겠다. 우리가 맨 처음 교문을 들어서며 가졌던 꿈과 이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그들을.



우리는 동시대인이다. 내가 하늘을 날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먼저 날개를 달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도 날개를 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들이 선택한 길이 얼마나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니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깊은 소명 의식을 갖게 하는 일인지 알게 하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동료를 맞이하는 예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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