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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Oct 05. 2015

오늘, 다시 출발선에 서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시즌 2를 제안하며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3 텍스트 비평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교육 불가능의 시대

무명. 우린 분명 문제가 있다는 글에 이어서. 교육공동체 벗 카페

참고도서

이계삼.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서있다. 《오늘의 교육》vol. 11

윤상혁. 성찰과 비판 그 너머가 필요하다. 《오늘의 교육》vol. 15

이혁규.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오늘의 교육》vol. 17

이계삼.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싸워도 괜찮아요 무서우면 함께해요. 《오늘의 교육》vol. 22

getoutof. 교육 불가능 담론은 '종말론'인가. 교육공동체 벗 카페

방외인. 나에게 벗과 오늘의 교육이란. 교육공동체 벗 카페



뭔가 우린 분명 문제가 있다


<오늘의 교육>이 교육 공동체 벗이 생산해내는 담론의 텍스트이니 우리의 이야기가 좀 더 밀도 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텍스트에 대한 적극적인 ‘인용’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을 통해 담론을 재생산해야 한다. 벗들의 논의 역시 공동체가 만들어낸 텍스트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기명 게시판에 <우린 분명 문제가 있다는 글에 이어서>의 글쓴이가 제기한 “기존 호에서 반복되었던 문제들, 저자만 바뀐 비슷비슷한 글들로 중구난방 지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비판은 <오늘의 교육>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처음에 벗은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로 새로운 교육담론을 주도해나갔다. 외부에서도 신선한 시각으로 이런 생각이? 하면서 보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활발하게 논쟁을 거듭해 나가면서 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육 불가능'이 어느 정도 결론지어진 상황과 함께 벗의 쇠락은 시작됐다."

"교육 불가능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종결지어진 이후부터는 다양한 견해들이 뒤죽박죽 얽히기 시작했다. 기존 '오늘의 교육'을 보면 교육 불가능 담론+주요이슈+기타연재물+수기나 체험담 등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호를 거듭할수록 담론을 주도하는 집단지성의 모습은 사라져가고 기존 호에서 반복되었던 문제들, 저자만 바뀐 비슷비슷한 글들로 중구난방 지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교육농에 대한 모습은 신선하고 호감이 가지만, 매 호마다 농사짓는 사람들 이야기를 꾸준히 읽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녹색평론의 최용탁 선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러니 좋았다. 애들이랑 이런 거 했다. 저러니 좋았다'식의 글들은 그냥 뻔한, 연수 가서 듣는 강사 경험담과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청소년인권담론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의 입장이나 그들의 어려움은 창간 준비호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21호가 나왔는데도 제자리다. '이런 어른들이 싫었고 저런 어른들이 문제였고 그런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다.' 이제 이런 글은 신물이 난다."

- 무기명, <우린 분명 문제가 있다는 글에 이어서>

(http://cafe.daum.net/communebut/p75h/128)     


교육의 생태적 전환 담론이 “뻔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청소년 인권 담론이 “신물이 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그만큼 제도권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고, 학교현장에서 청소년의 인권을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쉽게 말해 나의 일상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세상은 이미 종말을 고했으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인가.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여기는 어디인가.     



여전히 우리는 출발선에 서 있는가


교문을 들어서며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가? 학교는 희망의 공간인가? 정녕 설렘이 넘치는 공간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나의 탓인가? 내가 못나서인가? 이 사회는, 이 체제는 "그렇다"고 말한다. 이 공간-시간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그 회의는 너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말한다. 그 회의감의 배후를 색출하고자 나는 너를 평가한다. 나는 너에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지금의 학교는 잘못되었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 선언은 전혀 새롭지 않다. 내가 처음 교직에 발을 딛었던 해에도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품고 교문을 들어선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푸념처럼 늘어놓았던 교육 불가능을 그저 그런 푸념으로 넘기지 않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 자문했다. 고백했다. 그리고 외쳤다. 나의 실망은 너의 좌절은 나-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이 체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이 체제와 결별하고 새로운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선언을 하고 나니 오히려 교육 불가능을 외치던 곳에서 “그럼 어쩌란 말이냐”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한 편에서는 “교육 불가능이라니? 무슨 말이냐?”라는 말이 나온다. 그동안 대학입시제도와 학벌주의의 폐해, 그로 인한 학교 교육의 왜곡에 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되었나. 이러한 체제 안에서 정상적인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존의 진보교육의 목소리가 아니었나? 지금의 상황을 보자. 대학입시문제가 해결되었나? 아니면 학벌주의의 병폐가 해소되었나?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나아진 것은 전혀 없지 않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볼 때 교육 불가능 선언에 대한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는 교사의 “신비로운 이중성”(공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데, 당신은 왜 이렇게 고통스런 이야기를 하나? 당신 말은 잘 알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이냐. 우리는 지금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실천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 불가능 담론은 대체 무슨 실천적 매뉴얼이 있단 말인가? 당장 내일 전투에서 쓸 실탄이 다 떨어져 버렸는데, 지금 이 상태에서 사유와 성찰이 얼마나 한가한 소리인지 알지 않느냐.' … (중략) … 교육 불가능의 개념에 대해서조차 낮은 수준의 합의도 안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출발선에 섰을 때 우리의 입장은 교육 불가능이라는 선언을 먼저 던지고 그 내용을 협동조합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여러 주체들 간의 대화와 실천으로 함께 채워가자는 것이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출발선에 서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이계삼, 《오늘의 교육》 11호,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서 있다> 10쪽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이 "우리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서, 현실의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게 인정하는 데서,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것,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게 인정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서 나아가 부족하더라도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며 복잡하고 미묘한 현장의 고민들을 다뤄 가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 싶다."

- 윤상혁, 《오늘의 교육》 15호, <성찰과 비판 그 너머가 필요하다> 62~63쪽     


"교육공동체 벗의 … (중략) … 대안에 대한 실천적 논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구체성도 떨어진다. 물론 교육공동체 벗이 출범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는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비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대안 공동체로서의 역할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 이혁규, 《오늘의 교육》 17호,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 30쪽  



아직도 우리는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인가? 아니 출발은 했지만 도달할 곳을 찾지 못한 것인가? 우리는 교육 불가능의 의미에 대해 좀 더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일까? 교육 불가능의 현상들을 기록과 증언으로 남겨야 하는 것일까? 교육 불가능 시대의 교사로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일까? 교육 가능의 시대, 다른 교육을 상상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애굽에서 탈출하는 법


분명한 것은 이 체제와 결별하고 새로운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육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신비로운 이중성’이 필요하기는 하다. 오늘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교육을 상상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정말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뒤통수를 갈겨 주던, 어깨를 주물러 주던, 교무실로 데리고 가던 하여튼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의 교실, 지금의 학교가 잘못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폐허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듯이 훌륭한 선생님과 생기발랄한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학생, 상처받는 교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단절의 꿈은 '도약'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절을 선언했다고 해서 바로 단박에 다음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즉 교육 불가능성은 휴거론이 아니다. 말세가 되고 종말을 선언했다고 해서 믿는 자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들려올라가는 것 같은 그런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절 이후에는 매우 혹독하고 긴 고난과 혼란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을 견뎌내지 않으면 단절은 이행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단절 이후의 혼란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게 된다. 이런 단절의 꿈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출애굽 신화다. 40년간의 사막에서의 헤맴. 그 사이에 참지 못한 사람들의 우상숭배 등."

- getoutof, <교육 불가능 담론은 '종말론'인가?>

(http://cafe.daum.net/communebut/V8ff/5660)      


출애굽 후 히브리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들의 40년은 헛된 시간이었나? 그들의 우매함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의 직행을 막은 것인가? 아니다. 애초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없었다. 400년 전 가나안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애굽으로 발걸음을 향한 것이 바로 그들 자신 아니었던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수고가 필요했다.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규범을 만들고(레위기), 역량을 측정하고(민수기), 출애굽한 이유를 후손들에게 전승했다(신명기).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교육 불가능성을 어떻게 이어갈까는 선언으로의 교육 불가능성을 이어가며 주변사람에게 교육의 상황에 대한 현실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이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에 속하는 것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페다고지, 오늘의 교육 시즌2는 어쩌면 '선언'과의 단절, 즉 (좀 가혹하게 말하면) 교육 불가능성과의 단절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 불가능성의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교육 불가능성, 즉 이행의 선언을 이해하기 위해 선언으로부터의 단절. 오해 마시라. 폐기가 아니다. 담론의 시효성이 다해서(즉 단물 다 빨아먹었으니 ㅋ)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식에 속하는 담론으로부터 페다고지로의 이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인식으로서의 교육 불가능성은 당연히 계속 확산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벗은 이미 이 페다고지로의 이행을 이미 해내고 있다. 교육농, 생태주의, 학생인권 등. 그러나 관건은 이런 페다고지들을 묶어내는 새로운 페다고지의 원리, 규범이다. (이반 일리치도 그렇지만 교육학자가 아닌 리처드 세넷이나 이런 사람들에게서 배운) 삶의 기술, 협력하는 자아, 생각하는 손, 교환이 아닌 선물의 기쁨 등의 개념에 골몰(?)하는 게 이런 이유다. 그리고 벗 사람들의 글이나 현장에서 교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놀라는 것은 다들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 getoutof, 앞의 글      



현실을 직시하다


나는 지금 티치아노의 <그리스도의 매장>을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여섯 명이 인물이 등장한다. 먼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한 예수를 중심으로, 자식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모 마리아, 성모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죽은 예수를 힘겹게 옮기고 있는 세 명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 요한, 니고데모가 그들이다.     


그들은 핏기 하나 없는 살덩어리가 되어 버린 예수의 몸을 보면서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느끼고 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슬픔이 있다. 두 손을 꼬옥 마주잡은 채 죽은 아들을 쳐다보는 성모 마리아의 시선. 아직도 예수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예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니고데모의 시선. (뒤통수만 보고도 그의 표정이 느껴진다.) 분노와 슬픔이 섞인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요한의 시선.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는 다부지게 예수의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시선이다. 그는 슬퍼한다. 분노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예수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일이다. 나는 이 일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과 함께 아리마대 요셉은 그리스도에게 무언가 맹세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여. 가장 고귀한 이름이여. 그러나 동시에 가장 멸시받는 이름이여.     


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진지한 눈빛이 마음에 든다.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는 그의 강인한 팔뚝이 마음에 든다.     

희생자가 되느니 듣보잡이 되겠다.

성자가 되느니 잡놈이 되겠다.

겸손한 척 자만을 떨지 않겠다.

뒷짐 지고 앉아서 잔소리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

직접 부딪히고 깨져서 나의 얕은 밑바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

좌절과 실패의 예언자가 되지 않겠다.

제 고집만 내세우는 우둔한 황소가 되지 않겠다.

결코 짖지 않지만

쉽게 꼬리를 내리고 내빼지도 않는

낡고 닳은 길고양이가 되겠다.     



나는 반대한다


나는

교육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반-지성주의에 반대한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반-지성주의는 오히려

신화적 혹은 교조적 사고이거나,

허무주의 혹은 냉소주의에 가깝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이 인간의 자유를 드높이도록 허용하지 않고,

지식을 도구화하며 사유화한다.      

나는 반대한다.     

한 명의 인재가 백 명을 먹여 살린다는 엘리트주의에 반대한다.

백 명의 평등을 위해 한 명의 재능을 경시하는 평등주의에 반대한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교직 신성론에 반대한다.

자신의 게으름을 '교육 불가능'의 증거로 삼는 교사 불가능론에 반대한다.     

교육이론의 당위를 외래의 이론에서만 찾는 지적 종속성에 반대한다.

교육실천의 권위를 우리의 울타리에서만 찾는 진영 종속성에 반대한다.

자신의 유능함을 뽐내기 위한 학생들의 도구화에 반대한다.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학생들의 대상화에 반대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자기계발론에 반대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미래도 발견할 수 없다는 체제비관론에 반대한다.     

나의 과거는 너의 현재보다 아름다웠다는 꼰대스러움에 반대한다.

나의 현재는 너의 과거로부터 자유롭다는 애송이스러움에 반대한다.     

‘우리’를 말하지만 ‘우리’와는 말과 글을 섞지 않는 지적 오만함에 반대한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 눈에 보이는 해답만을 구하는 지적 게으름에 반대한다.    



경계에 선 시시포스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가? 아니, 우리는 항상 출발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출발선은 어제와는 다른 출발선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우리도 쉼 없이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안식을 취할 영토가 없다. 오직 경계만 있을 뿐.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 아닌 균형이다. 줄다리기의 균형 말이다. 줄을 놓아버리는 것은 균형이 아니라 방임 혹은 포기이다. 경계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좀 더 치열한 논쟁, 좀 더 열정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하게 실천하며 다양하게 현실을 포착해야 하고 그렇게 포착한 현실들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현실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리좀’ - 시작도 끝도 없는 평등한 관계망 - 이며 ‘기관 없는 몸체’ - 자율적이며 실천적인 개인 - 가 되어야 한다."

- 윤상혁, 앞의 글 62쪽     


우리는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논쟁은 주장이 아닌 고백의 형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실천은 당위가 아닌 증언의 형식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고백과 증언은 일종의 지도 그리기와 같다. 우리는 결코 저 높은 곳에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바로 이 곳 – 내가 선 자리 – 에서 그린 다양성과 이질성이 접속하여 마침내 우리가 꿈꾸던 그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는 교육 불가능성 담론과 '증언'으로서의 기록이 가지는 의미는 한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언이 없는 담론은 허황된 선언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여전히 교육 불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결을 드러내는 증언들이 필요하고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언의 부족이 담론의 완성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론이 아니라 증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증언은 이른바 진보성만이 아니라 일반성(뭐랄까요..탁월함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 나왔던 이야기처럼 교육 불가능성에 대해서 교육가능성을 언급할 수도 있어야하며, 또한 교육 불가능성 안에서도 생태적 전환만이 아닌 평범한, 어쩌면 이기적으로 비춰질지도 모르는 저 같은 혁신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은 교사들의 생각까지도 논의의 장에서 활개 칠 수 있는 증언들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좋은 교사 콤플렉스만큼 이나 진보연한 교사 코스프레(이건 저에 대한 용어입니다..진보적이지 못한데 진보연한 것처럼 보이려는 저의 욕망에 대한 표현입니다요~)도 논의를 확장시키지 못하는 한계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담론이 선언적으로 설파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완결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 저는 선언적 언표가 지닌 상징성에서 수용했을 뿐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수많은 현실내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혀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기남부 모임의 동준샘의 표현처럼 수많은 결들이 존재하는 데, 그 결들을 드러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교육 불가능성 담론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논의로 진입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는 데에 저는 동의 했습니다."

- 방외인, <나에게 벗과 오늘의 교육이란?>

(http://cafe.daum.net/communebut/n3g7/501)     


이론과 실천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다. 원래 이론(theory)이라는 것은 수없이 많은 도전과 거듭된 실패를 뚫고 얻어낸 결과물의 고갱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이론을 등한시하고(아니 이론을 만드는 것 자체를 등한시하고) 외부로부터의 수입에만 급급하다보니 '이론적'이라는 말은 '현실과는 유리된 허황된 이야기'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론과 실천, 전망과 참여를 대립항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계속된 실천을 통하여 이론을 성장시켜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론에 근거하여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론을 어떻게 성장시켜나가야 할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이야기가 좀 더 밀도 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텍스트에 대한 적극적인 인용과 끊임없는 비평을 통해 우리의 담론을 재생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의 교육 17호에 실린 글 <'교육 불가능의 시대' 이후를 사유하기>에서 이혁규 벗은 교육 불가능 담론의 뿌리를 이야기하면서 전교조에서 시작된 '교실붕괴담론', 탈학교 논쟁에 불을 붙인 이한의 <학교를 넘어서>와 교육 불가능 담론의 차별성은 무엇이냐고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왜 우리는 자꾸만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일까? 이반 일리치, 파울로 프레이리, 마이클 애플, 사토 마나부, 비고츠키도 읽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영모, 함석헌, 이오덕, 조한혜정, 이한의 글들도 함께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교육공동체 벗이 생산해내고 있는 텍스트들을 "빠져 읽고 따져 읽어야" 한다.   



오늘, 다시 출발선에 서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다시 꺼내 든다. 그리고 안준철 벗의 <이계삼 선생님께>를 펼쳐 본다. ‘교육 불가능’에 대한 안준철 벗의 절반의 공감과 절반의 우려. 이에 대한 이계삼 벗의 답변은 무얼까. 이번에는 이계삼 벗의 <안준철 선생님께>를 펼쳐 본다. 그런데 다음 한 구절이 가슴에 꽂혔다.     



"제 글에 대해 어느 블로그에서 평해 높은 걸 보니 '하나 마나 한,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고 혹평을 가한 분이 있더군요. 그런 반응은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차피 제 자신에게는 '총론'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각론은 제가 이후의 글쓰기와 실천으로 채워 놓으면 될 일이고, 어차피 10년 이상 바라보고 시작한 이야기니까요."

- 이계삼, <안준철 선생님께>, 『교육 불가능의 시대』 275쪽     


문득 『오늘의 교육』 22호에 실린 이계삼 벗의 글이 떠올랐다.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무척 지쳐있었다. 3년의 쉼 없는 일들, 잠시 들어왔다 일을 도운 뒤에 원래 가려 했던 길로 돌아가리라 했으나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송전탑과 탈핵, 주민운동의 최일선에서 나는 조금씩 내 존재가 이전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계삼,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싸워도 괜찮아요 무서우면 함께해요> 143쪽   


이계삼 벗이 원래 가려 했던 길은 무엇이었을까?    


"선생님, 요즘 저는 덴마크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와 '노동'이라고 던져 본 그 화두는 제가 여러 차례 다녀온 충남 홍성의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풀무학교는 덴마크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그룬투비라는 교육 사상가와 그가 설립한 '국민고등학교'를 본받은 것입니다.

덴마크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덴마크는 핀란드 같은 북유럽과는 확실히 바탕부터 다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덴마크는 '복지 국가'가 아니라 '복지 사회'입니다. 국부가 빵빵하고, 물산이 풍부하고, 그래서 그 힘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챙겨 주는 사회는 아닙니다. …(중략)… 덴마크에서는 1973년 오일쇼크를 겪고 나서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원자력 발전이 아니라 재생 가능 에너지를 선택했습니다.  …(중략)… 그 힘은 '시민합의회의'라는 풀뿌리 자치 단위에서부터 이루어진 끊임없는 토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 덴마크 사회의 화두는 '에너지를 풍요롭게 쓰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였다는 것입니다."

- 이계삼, <안준철 선생님께>, 『교육 불가능의 시대』 280쪽     


교육 불가능 담론이 나온 지 이제 햇수로 5년. 이계삼 벗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밀양에 있다. 원전마피아들과 싸우며 또 다른 불가능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한겨레를 통해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나왔을 때, 우리는 왜 그렇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은 것일까? 혹시 우리는 그가 "하나마나 한 이야기, 공허한 이야기"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아파하지 않고 10년을 바라보며 만들려 했던 세부적인 각론이 씨앗으로 뿌려지기도 전에, 교육 불가능 무용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계삼 벗이 던져 놓은 사유이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의 사유가 되어야 한다. 그에게 결자해지를 요구하기는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 그가 10년을 바라보며 만들려 했던 각론을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세월이 좋아지면, 그래서 그가 드디어 씨앗을 뿌릴 채비를 할 때, 이미 솟아오른 새싹을 보여주고 싶다. 


불행하게도 교육이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우리의 선언은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단순히 교육을 넘어 삶 자체가 무너져 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우리의 전망을 훨씬 뛰어 넘는 코퍼라토크라시(corporatocracy) 시대의 파고 앞에서 우리의 행로는 항상 제 자리 걸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을 고민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교육을 상상하는 우리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안다. 지난 4년, 스물 세 권의 《오늘의 교육》과 스물 세 권의 단행본들의 면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오늘, 내가 선 자리에서 벗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리고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평등한 이들의 우정”(엄기호) 속에서 새로운 삶은 이미 시작 되고 있다.


오늘,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 벗과 함께.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가? 아니, 우리는 항상 출발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출발선은 어제와는 다른 출발선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우리도 쉼 없이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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