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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Oct 08. 2015

전환을 위한 사유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소고小考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4 텍스트 비평

이계삼.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교육 불가능의 시대

박복선.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하여. 《오늘의 교육》vol. 4

참고도서

르네 데카르트.《방법서설》

장 자크 루소, 《에밀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대교수학》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트, 《과학과 근대세계

도넬라 H. 메도즈 외, 성장의 한계

데이비드 오어,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무엇인가? 교육을 전환한다는 말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데, 게다가 생태적 전환이라니? 대한민국에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표현은 2011년 가을 《오늘의 교육》 4호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가까운 이웃인 일본의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후쿠시마의 재앙은 우리에게 탈핵을 요구하고, 탈핵은 우리에게 우리 삶에 대한 총제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하고 그것을 가꾸어 가는 것이야말로 파국과 단절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일이며, 그것이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 자연과 인간의 공멸이 현실화된 우리 시대 최고의 비전은 ‘생태 사회로의 전환’이다. 교육은 ‘당연히’ 이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생태 수업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환경’이나 ‘생태’ 같은 교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교육 내용이나 활동은 생태론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육은 생태교육이어야 한다. 

- 박복선,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하여>, 《오늘의 교육》 2011년 9·10월호   

  

이 글에서 박복선은 “물론 이것이 생태 수업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환경’이나 ‘생태’ 같은 교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벗들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계삼이 던진 화두     


오늘날 학교교육이 맞닥뜨린 교육 불가능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전환을 위한 사유를 시작하자. ‘기도와 노동’,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번역인 ‘인문학과 농업’을 고민하자.

 - 이계삼, 《교육 불가능의 시대》, 30쪽     


이계삼은 12세기 카톨릭 세계의 갱신을 꿈꾸었던 베네딕트 성인의 모토였던 ‘기도와 노동’이라는 표현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오늘날의 교육적 맥락으로 번역했을 때 ‘인문학과 농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문학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면, 농업은 ‘인간 생존의 물적 기초’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학교교육이 맞닥뜨린 교육 불가능의 근원에 대하여 살펴보고, 아울러 전환을 위한 사유로서의 ‘기도와 노동’의 의미, 그 현대적 변용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이 작업은 ‘인문학과 농업’의 다른 이름, 또는 좀 더 포괄적인 번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신의 삶’ 그리고 ‘인간 생존의 물적 기초’에 이 글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데카르트적 사유의 세계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방법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 그 능력을 사람들은 양식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이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 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이성은 (그리스의 철인이나 중세의 성직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상의 인권선언’으로 불리게 된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천명함으로써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적 사유의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알렸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유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가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하는 어떤 것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

둘째, 내가 검토하는 각각의 어려움들을 가능한, 그리고 더 잘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한에서 가급적 세분한다.

셋째, 나의 생각을 질서 있게 인도하기 위하여, 즉 인식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대상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넷째, 내가 아무것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전체적인 열거와 일반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데카르트는 전통적인 지식을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유 체계를 수립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천체론Le monde》에서 “나는 자연이 어떤 여신이라고 생각한다든가 또는 다른 환상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고, 내가 사용하는 자연은 물질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자연은 좌표평면에 하나의 순서쌍으로 표현되는 사물에 불과하다. 자연에 대한 그 어떤 신비주의도 거부하면서 모든 자연은 질서와 측정을 연구하는 수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기계적 세계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되고 뉴턴에 의해 완성된 기계적 세계관은 수많은 현대 사상가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며 예측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잘 들어맞는다. 스마트폰과 네비게이션의 세계. 우리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직교 좌표계와 뉴턴의 미적분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고사하고 교육의 ‘전환’조차도 망설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대교육의 기획계몽주의     


‘이성을 올바르게 이끌어, 여러 가지 학문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이 완성되자 로크와 스미스에 의해 정치와 경제의 패러다임을 기계적 세계관에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루소Jean-Jacques Rousseau에 의해 기계적 세계관에 조화되는 교육철학, 즉 계몽주의가 체계를 갖추게 된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소명은 인간의 신분, 곧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되도록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과 관련된 어떤 직업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부모의 직업을 계승하여 장차 군인, 성직자, 변호사가 될 운명이라고 말하기 전에 자연은 그에게 인간의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한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장 자크 루소, <에밀>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시키고, 사회를 무지한 상태로부터 탈피시키려 했던 계몽주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교육운동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개명될 수 있고, 개명된 인간들이 사회의 오래된 폐단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사회로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의 가능성과 교육에 의한 사회개조 및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을 확신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회개조나 역사적 진전의 근원은 인간의 이성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모든 사물을 그들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육의 목적을 두었으며, 이를 통하여 모든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철학, 과학, 정치, 경제, 미술, 문학, 사교상의 예법 등을 가르치는 대신 종교나 실제 생활상의 현실은 교육과정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교육 방법은 데카르트적 방법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교과목들은 필요한 한에서 가급적 세분되었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원주의적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물론 그 종착역이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교육은 학교교육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나는 이계삼이 ‘교육 불가능’을 논한 글에서 한 가지가 목에 걸렸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유’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학교와 교육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왜 목에 걸렸을까? ‘근본적 질문’ 이전에 ‘근본’이 무엇인지를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윤지형, <‘교육 불가능’과 《녹색평론》적 사유에 대한 소고>, 《오늘의 교육》 2011년 9·10월호  

   

‘교육의 근본을 묻는 것’에 대하여 윤지형은 “도대체 근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근본에 대하여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부분은 여전히 벗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 부분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을 학교교육으로 한정 짓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정용주가 말했듯이 “교육은 본래 특정화된 것이 아니며, 직업을 위한 것도 아니고, 훈련을 위한 것도 아니다. 교육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 근대적 의미에서의 교육은 학교교육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었다.”(〈계급은 교육으로 작동한다〉, 《오늘의 교육》 2014년 7·8월호) 계몽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모든 교육은 부정되었다. 일리치Ivan Illich가 말했듯이 학교는 중세의 교회를 대체한 새로운 세계 종교의 성소가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교회의 예배가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했으나 이제는 학교의 수업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먼저 인간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인간의 교육은 이른 나이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공동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남녀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 맡겨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수업은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학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는 개혁될 수 있다” ……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400년 전에 이야기한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과 얼마나 유사한가! 이는 지금의 학교교육이 사실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기획된 근대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에서 학교교육의 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첫째, 아동은 원래부터 존재했는가. 둘째, 아동은 학교(또는 교사)를 필요로 하는가. 셋째, 학교는 아동을 십 수 년에 걸쳐 물리적으로 강제 유폐시킬 권한이 있는가.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재개념화해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학교란 무엇인가’,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학교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아마도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를 ‘어른들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 이계삼, 《교육 불가능의 시대》, 28~29쪽   


학교는 근대의 산물이다. 교육은 곧 학교교육이라는 믿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말할 때, (이계삼의 말대로) 교육은 학교교육을 의미한다.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 이제 무엇이 학교를, 그리고 교육을 대체할 것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데카르트적 사유로부터의 탈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과연 이 명제는 참인가. 데카르트는 신체와 정신은 상호간의 연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리에 따라 별도로 존재하며 독립된 개별적 실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신체와 정신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자연을 추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로 보고, 각 부분들을 쪼개어 분석하는 기계적 세계관에 대하여 전체적 연관성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각 유기체가 그 환경과 맺는 올바른 관계를 무시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계적 세계관의 결함은 근대 세계에 중대한 위기를 불러 온다고 보았다.     


“유용한 지식이란 전문 지식이며, 이것은 이에 속하는 유용한 주제에 정통한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상황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틀에 박힌 정신을 낳는다. 각 전문 분야는 진보하지만, 이 진보는 자신만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전문화되는 것은 추상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틀은 폭넓은 영역을 정신에 제공하지 못하며, 추상은 사전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 지식의 전문화가 야기하는 폐단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심각하다. 이성의 지도력은 약해지고 지도적 입장에 있는 지식인들은 균형을 상실하게 된다. 상황의 어느 일면만을 보고 좀처럼 양면을 보지 못한다. 요컨대 사회가 전문적인 여러 분야에서는 훌륭하게 기능하고 진보하지만, 전체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지니지 못한다. 세부적인 것에 편중된 진보는 통합의 기능이 미약한 데서 오는 갖가지 위험을 증대시킨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트, 《과학과 근대세계》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트, <과학과 근대세계>


1973년 베르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는 데카르트적 사유에 대비되는 새로운 사유체계인 일반체계이론을 발표한다. 일반체계이론은 지식을 이루는 개별 요소가 ‘체계’라는 전체에 속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며, 이 ‘체계’는 개별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속성을 갖는다. 보다 정확히 말해 ‘체계’란 곧 서로 간에 상호작용을 하고 외부 환경과도 상호작용을 하는 개체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관점에서) 개체가 모여 전에 없던 새로운 포괄적 특성을 가진 조직으로서의 총체이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작다는 관점에서) 전체가 개체에 피드백 효과를 미치는 총체를 의미한다.     



생태적 사유의 탄생     


이러한 체계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사상이 바로 생태학ecology이다. 생태학이 환경environment 또는 환경보호주의environmentalism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게 말하면 생태학은 자연을 탐구하고, 자연 속의 무생물 요소들(공기, 물, 토양, 원자, 분자)과 생물 요소들(식물, 동물, 박테리아, 곰팡이) 사이의 수많은 복합적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인도의 녹색환경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쿠마르는 다음과 같이 멋진 말로 생태학을 정의내린 바 있다.     


“에코스(Ecos)는 그리스어로 집이란 뜻이다. 로고스(Logos)는 지식을 뜻하고, 노모스(Nomos)는 다루다라는 뜻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지구를 집(Ecos)으로 인식(Logos)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룰(Nomos)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태학(Ecology)이 경제학(Economy)에 우선한다.” 

- 사티쉬 쿠마르, 〈내가 사랑하는 지구〉,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8년 6월호     


생태학이 경제학에 우선한다는 쿠마르의 선언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생태학 관련 서적과 지구의 생태에 대한 보고서들 – 예를 들어 《성장의 한계》나 〈IPCC 제4차 기후변화 종합 보고서〉와 같은 - 은 생태계는 한계를 초과하였으며, 자연의 약탈에 바탕을 둔 기존의 성장 개념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 로마 클럽은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출간한다. 처음으로 ‘탈성장’의 개념을 소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보고서에는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1970년부터 2100년까지의 인구, 식량, 산업생산, 오염 그리고 재생할 수 없는 에너지의 추이를 예측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월드 3〉가 나온다. 메도즈Donella H. Meadows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12가지의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100년의 미래를 예측했는데, “지금과 같은 추세로 세계 인구와 산업화, 오염, 식량생산, 자원 약탈이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앞으로 100년 안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인구와 산업의 생산력이 가장 먼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락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도넬라 H. 메도즈 외, <성장의 한계>


그 후 30여 년이 지난 2008년, 호주 연방과학기술연구원CSIRO의 그레이엄 터너Graham Turner는 19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제 데이터를 《성장의 한계》의 예측 데이터와 비교・검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실제의 추이와 40년 전의 예측이 거의 일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적이게도) 앞으로의 추세 역시 과거의 예측과 상당히 유사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래프를 보면 2030년을 전후로 하여 대부분의 지표가 하락세로 접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은 지속 불가능하다.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지구 생태계는 곧 붕괴에 이를 것이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관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인간의 사유와 실천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조와 체계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사유해야 한다.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사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교육을 분절적이 아닌 통합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태적 사유이다. 생태적 사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집으로서의 지구를 지키는 사유이다. 나와 지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바로 지구라는 인식이 생태적 사유의 바탕을 이룬다.  

   


생태적 사유우리 공동의 미래를 묻다     


1987년 4월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WCED는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난 직후였다. 이 보고서는 ‘인간의 생산과 소비를 유지하는 지구 자연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 정책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우리 인류 전체의 장래를 위협하는 주요 요소로 ①대중적인 빈곤 ②인구 성장 ③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④환경질의 파괴 등 네 가지를 들었다. 이어 이 같은 위협에 대한 대안으로 ‘미래 세대의 욕구를 제약하지 않으면서도 현세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개발’이라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였다. 


이어 1992년 6월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환경과 개발에 관한 유엔 회의UNCED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환경에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확립되고, 여기에서 리우 선언문과 의제 21이 채택되었다. 참가 국가들이 합의한 의제 21은 환경 보전과 경제 개발을 지구적 수준은 물론 국가적・지역적 수준으로 연계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려면 지속 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발전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우리는 ‘지속 가능한 사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87년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욕구에 잘 대응하는 사회.” 전 지구적 생태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속 가능한 사회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기호가 말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을 생각해내는 ‘상상력과 공감능력’이다. 경쟁, 일중독, 소비생활, 세계화, 타율성 등 소유와 지배를 추구하는 가치는 지양하는 한편, 협력, 여가, 사회생활, 지역 경제, 자율성 등 삶과 해방을 추구하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생태적 사유는 자연에 대한 소유와 지배가 인종, 계급, 젠더에 따른 인간에 대한 지배를 수반한다는 새로운 자각에 기반하고 있다. 이 사유에 의하면 생태 위기는 오늘날 사회 속에 내재한 모순에서부터 야기된다. 첫 번째 모순은 경제적 생산력과 지역의 생태적 조건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한다. (이산화탄소의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두 번째 모순은 재생산과 생산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세 가지 – 근본 생태론, 영성 생태론, 사회 생태론 – 의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근본 생태론자들은 지배라는 기계론적 틀을 상호 연관성과 호혜성이라는 생태적 틀로 대체하는, 과학과 세계관의 완전한 변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기계적 세계관에서 지식, 존재, 윤리, 심리, 종교, 과학을 변화시키는 생태적 세계관으로 의식 변혁을 요구한다. 영성 생태론자들은 종교를 새로운 생태사상에 주입시켜 자연을 경외하는 옛 방식을 다시 되살릴 필요성을 본다.  사회 생태론자들은 정치경제의 완전한 변혁을 최선의 접근법으로 본다. 그들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새로운 생산양식과 민주적인 정치적 재생산양식에 기반한 정치경제로의 변혁을 요구한다. 이러한 세 가지 접근 방법은 독립적이기보다는 보완적이며 위계적이기보다는 병렬적이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 지구적으로 사고하고지역적으로 실천하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말하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이 근대적 사유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 사유와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배태된 인간의 정치・경제적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불러왔다. 근대적 사유는 한계에 봉착했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 학교는 계속 존재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매우 다를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내용 등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서당과 학교의 차이만큼이나 -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오어David W. Orr는 ‘자기 장소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국가적, 국제적 측면에 불균등하게 더 관심을 두며, 지역적 측면에는 충분한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교가 대표적이다. 지금은 모든 지역의 학교에서 동일한 내용 – 삶과 괴리된 – 을 배우지만, 생태적 전환이 이루어진 학교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내용 – 삶과 연관된 - 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식량을 키우고, 보금자리를 짓고,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동네의 토양과 식물상과 동물상과 유역에 관한 지식들. 물론 이와 같은 목록이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것들을 도외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어가 제시하고 있듯이 ▲열역학 법칙 ▲생태학의 기본 원리 ▲환경용량 ▲에너지학 ▲최소비용 ▲기술의 한계 ▲적절한 규모 ▲지속 가능한 농업과 임업 ▲균형상태 경제학 ▲환경윤리학 등이 목록에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오어, <작은 지구를 위한 마음>


〈교육을 다시 생각함〉이라는 글에서 오어가 “인간 생존이라는 명제에 비추어” 제시한 여섯 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이 원칙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유용한 아이디어가 되리라 확신한다.      


원칙 1. 모든 교육은 생태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원칙 2. 교육의 목표는 어떤 과목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정통하는 데 있다.

원칙 3. 지식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올바로 쓰이는지 지켜볼 책임이 따른다.

원칙 4. 우리는 지식이 사람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때까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원칙 5. 교육자와 교육 기관은 자신의 이상을 철저하게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칙 6. 학습의 과정과 결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폰팅은 그의 책 《녹색세계사》에서 생태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가 기존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와 얼마나 다른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피크 오일과 지구 온난화의 추세를 볼 때 ‘탈성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탈성장은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탈성장이 결핍, 불행, 파국의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역 사회가 되살아나고 문화가 다시 생명력을 얻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탈성장 시대의 교육은 해방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적 탈성장과 부 없는 가치라는 생태적 규범을 제시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문학과 농업’이며 ‘기도와 노동’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그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탈성장 시대의 교육은 해방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적 탈성장과 부 없는 가치라는 생태적 규범을 제시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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