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기본소득 포럼 후기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5 텍스트 비평
녹색전환연구소. 교육과 기본소득 포럼
공현. 교육 불가능과 기본소득. 《오늘의 교육》vol. 28
스밀라. 청소년의 권리와 기본소득. 《오늘의 교육》vol. 28
참고도서
앙드레 고르.《에콜로지카》
우치다 타츠루.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또 다른 경제, 또 다른 사회관계, 또 다른 생산양식과 생산방식들, 또 다른 생활양식을 생각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진다. 마치 상품, 월급제도, 금전, 이런 것들 본위의 현 사회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수렴하는 수많은 지표들을 종합해보면, 이러한 ‘뛰어넘음’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자본주의가 문명적 방식으로 퇴장하느냐 못 하느냐는 무엇보다도 그 가능성을 예고하는 경향들과 실천들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
- 앙드레 고르, <자본주의의 퇴조는 이미 시작되었다>
2015년 8월 28일 저녁 6시 반.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 내려 4번 출구로 올라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서울시NPO지원센터가 어딘지 아세요?” 초행길이라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스마트폰 길 찾기 어플리케이션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길을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서울시 신청사와 한국 프레스 센터 사잇길로 들어섰다. 필로티로 되어 있는 신청사 뒤편 보행로를 걸으며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한 음식점들을 스쳐 지나갔다. 회관과 카페가 공존하는 거리. 연륜이 묻어나는 거리 사이사이에 묘한 젊음의 활기가 느껴질 무렵 서울시NPO지원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시NPO지원센터는 ‘서울특별시 시민공익활동의 촉진에 관한 조례’ 제11조에 근거하여 지난 2013년 설립되었다. ‘NPO(Non-profit organization)’는 시민공익활동을 행하거나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비영리민간단체를 말한다. 쉽게 말해 시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공익활동을 주도하고 참여할 권리”를 실행 가능하도록 돕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공현, 스밀라, 하승우. 두 명의 발제자와 한 명의 토론자가 단상에 앉았다. 곧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포럼이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그동안 진행했던 기본소득 포럼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교육에 대한 관심 - 혹은 우려 - 때문이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교육과 기본소득. 교육. 기본소득. 두 가지 모두 어렵지만 특히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생소했다. 그동안 몇 차례 기본소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글들을 볼 기회는 있었지만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제대로 읽지 않았다. 사실 교육공동체 벗과 녹색전환연구소에서 교육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최저임금’이었다.
지난 7월 9일. 대한민국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계의 불참 속에 제12차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2016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을 6030원으로 결정했다. 인상률은 8.1%로 전년도 최저임금 5580원에서 450원 오른 금액이다.
그로부터 2주 후. 미국 뉴욕주 임금위원회가 패스트푸드 체인 레스토랑 종업원들의 시간당 최저임금을 8.75달러에서 15달러로 올리도록 주 정부에 권고했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17000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인상률이 무려 71.4%에 달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다음 날.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채팅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솔직히 말해 최저임금 1만원도 어려운 판국에 기본소득 논의가 가당키나 한가 싶어요. 쉽게 말해서 일하고도 제 값을 못 받는데 일도 안하고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기사를 한 번 보세요. 미국 뉴욕주의 맥도날드 알바노동자는 이제 하루 8시간씩 주 5일 일하고도 연 3천 5백만원을 벌 수 있으니 맞벌이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듯.”
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은 어떻게 다른가. 알다시피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수당이다. 최저임금은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착취를 막기 위해 법률로 정한 최소한의 임금을 말한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의식주 생활이 가능한 급여기준을 정하여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다. 사용자측은 2008년 이후 매년 최저임금 동결을 주장해 왔다. 심지어 2010년에는 5.8% 삭감안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매년 그래왔듯이 올해도 노동자측 위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2015년 최저임금위원회 활동은 막을 내렸다. 이제 내년부터 서울의 맥도널드 노동자는 한 시간 노동의 대가로 빅맥 1.6개를 받을 수 있지만 뉴욕의 맥도널드 노동자는 같은 시간에 3.4개의 빅맥을 받을 수 있다. 이 차이를 극복하지 않고 기본소득을 논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최저임금이 기본소득에 우선한다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나로 하여금 기본소득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 했던 것이다.
공현의 발제가 시작되었다. 공현은 발제의 상당 부분을 ‘교육불가능’론을 설명하는 것에 할애했다. 이번 포럼의 주제가 교육과 기본소득인데다가 교육공동체 벗의 담론의 장에서 교육불가능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불가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학교 교육은 그 의미를 잃었고 다수의 학생들도 학교 교육에 참여할 동기를 잃고 있”으며,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 구조를 고수한 채 학교 교육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혁신’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교육불가능과 기본소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공현의 말을 더 들어보자.
“요컨대 교육을 입시, 취업, 노동-고용시장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교육 가능의 전제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육의 동기가 ‘경제적 필연성’이 아니라 교육적이고 인간적인 향상심, 더 생활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육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변화, 사회적 불안과 노동-소득-생계 모델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부분에서 기본소득과 ‘교육불가능’론이 만납니다.”
그렇다. 현재의 교육이 근대적 사유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는 인식으로부터 교육불가능론이 출발하듯이, 자본주의적 가치판단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틀 속에서 기본소득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는 <경제이성비판>에서 한 사회의 생산력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갈수록 같은 양을 생산하기 위해 더 적은 양의 노동이 요구되므로,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노동 비례 소득을 유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 - 기본소득 – 이다.
근대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는 외적으로 이미 파국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오일피크,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지속불가능, … 파국의 증거는 넘쳐난다. 자본주의는 내적으로도 한계에 봉착했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인한 일자리의 감소는 본질적으로 노동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의 위기이다. 기계가 인간의 생산을 대체할 수는 있으나 소비까지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서 기계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쓰레기 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파국. 그것은 재앙과 축복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독재와 학살이 파국을 맞이한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보여준다면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파국이 불러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교환가치에 기초한 경제의 하강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문제는 경제하강이 끔찍스러운 위기의 형태를 띨 것인가, 아니면 자율적 체계를 갖춘 사회를 선택하여 임금노동자와 상품관계를 뛰어넘은 곳에 다른 경제와 문명을 세우게 될 것인가이다. (중략) 이 점은 분명히 해야겠다. 우리는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노동을 하겠지만 그 노동이 노동/고용과 노동/상품의 형태를 띠지는 않을 것이다. 후기포드주의가 제거하려 들었던 것은 단지 완전고용만이 아니라 고용 그 자체이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소멸을 준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삶의 방식, 욕구,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이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는 새로운 경제로 넘어갈 수 있는 전례 없는 가능성을 열어보이게 한다.
- 앙드레 고르, <세계적 위기, 탈성장, 그리고 자본주의의 퇴조>
기본소득이 파국을 피하기/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기본소득은 소비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의식의 고양과 새로운 행동을 일어나게 한다.
“기본소득의 도입이나 복지제도의 강화 등, 사람들의 생존의 문제를 임노동 외의 형태로 해결하는 사회가 도래했을 때, 지금과 같은 학교 교육은 말 그대로 지속불가능해질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학교 교육이 어떻게 ‘동시에’ 교육적인 것으로 변화해야 하는지는 교육 영역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자본주의적인 노동-고용시장으로부터 해방된 교육은 다른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모색해야 합니다.”
공현은 기본소득의 도입이 가져올 교육의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삶의 변화이기도 하다. 두 번째 발제를 맡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 스밀라도 비슷한 말을 했다.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 자율성과 책임이 강조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윤리의 등장, 교육의 변화 또한 절실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상대방과 내가 동등하다는 감각에서 출발한 대화법을 배울 것이고, 막연한 경쟁을 선택하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법과 그에 필요한 기술들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파국을 피하기/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기본소득은 ‘성장’이 아닌 ‘탈성장’을 촉진시킬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성장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북돋을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복지의 문제를 넘어 인간 해방의 문제가 된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탈성장 시대의 교육은 해방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적 탈성장과 부 없는 가치라는 생태적 규범을 제시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포럼을 마치고도 한동안 열띤 질의응답이 진행되었다. 인상 깊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나의 특출한 망각능력 덕택에 있는 그대로 옮기지 않고 내가 느낀 점 위주로 서술했다. 토론자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쉽게 낭비하지 않을까? : 이 질문 속에는 사실 이 돈은 내가 하사한 돈이니 너는 소중하게 써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받은 사람의 것이다. 어떻게 쓰든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주식 배당금을 받는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흥청망청 돈을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비판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압수하거나 배당을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둘째, 기본소득을 받으면 정상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남자 혼자만 일해도 먹고 살았는데, 예전에는 알바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시각들. 정상적인 삶이 가부장제나 학력지상주의와 같은 기존의 사회적 관습을 복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에 앞서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셋째, 기본소득은 어떤 자격을 필요로 한다? : 예를 들어, 예술가나 시민단체 활동가 등과 같이 뭔가 의미 있고 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기본소득이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선후가 바뀐 생각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시민들의 삶이 의미 있게 바뀔 것이다. 기본소득 만능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은 하사금이 아니라 종자돈의 개념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크지 않은 강의실이었지만 어쨌든 빈 좌석은 없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뒤풀이에서 나누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벗 조합원들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왔다. 이 날 공동육아협동조합 조합원 동기의 집들이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시청에서 지하철 5호선이 다니는 광화문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던 비도 그치고 지나치는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도 경쾌하게 느껴졌다. 약속 시간보다 좀 많이 늦었지만 아마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밤새 맥주잔을 기울이며 터전의 확장문제와 어린이집 운영문제 그리고 육아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다음 날 오전에는 한 아마의 제안으로 아이들과 함께 번개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8월 5일부터 9일까지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홍동면에서 제2회 교육농축제 <교육農∝村>이 열렸다.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내고자 했던 지역과 학교, 농촌의 일상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만나며 ‘교육농’이 학교와 텃밭을 넘어 구체적인 삶의 자리와 모양으로 어떻게 확장될 수 있을지 함께 궁리해보는” 자리였다.
이보다 며칠 전인 8월 1일부터 3일까지 충청북도 옥천군 배바우 도농교류센터에서는 ‘삶의 전환을 모색하다’를 주제로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여름연수가 열렸다. “오랜 시간 아래로부터 자급과 자치의 기반을 만들어 온 옥천 주민들의 이야기, 청주에서 지역과 마을을 중심으로 삶과 작업, 일상과 교육을 함께하는 실험을 꾸려 온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이야기” 등을 나누는 자리였다.
우치다 타츠루는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작은 커뮤니티를 조물조물 만들어 나가고 싶답니다. 오백 명 쯤 되는 규모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는, 젊은이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지요.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인맥이 풍부한 사람은 연줄을 소개해주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이디어를 내고, “이것만 배우면 밥은 먹을 수 있어” 하며 기술을 가르쳐주는 등 상호 부조의 호혜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싶어요. 문제는 규모입니다. “이것 좀 부탁해” 하면 “알았어, 해줄게” 하고 들어줄 수 있는 집단이 되려면 거대하게 부풀릴 수는 없어요.”
어떻게 절망의 시대를 건널 수 있을까? 먼저 이 시대가 절망의 시대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없을 때 상상은 곧 망상이 되는 법이다. 그런 다음에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절망의 시대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뿐이다.
우리를 구할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바로 그것이다
- 장 피에르 뒤피
파국을 피하기/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기본소득은 ‘성장’이 아닌 ‘탈성장’을 촉진시킬 것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성장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북돋을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복지의 문제를 넘어 인간 해방의 문제가 된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탈성장 시대의 교육은 해방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적 탈성장과 부 없는 가치라는 생태적 규범을 제시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이를 위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