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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Aug 26. 2016

공동육아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의 두 얼굴> 후속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6 텍스트 비평

서용선. 마을교육공동체란 무엇인가.《오늘의 교육》vol. 32

정용주. 도구화되는 공동체 그리고 저항적 공동체의 종말.《오늘의 교육》vol. 32 

참고도서

문재현.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http://www.gongdong.or.kr/



한계 인식하기     


32호 특집은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의 두 얼굴’이었다. 두 얼굴이라 하니까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겠는데, 그 보다는 우리가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교육적 실천을 하더라도 항상 의도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성찰적 문구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1927년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상보적이다. 즉 둘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원리’를 발표한다. 이로부터 4년 후 수학자 괴델은  “무모순인 공리계에서는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하므로 체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즉 무모순성과 완전성은 동시에 만족될 수 없다”는 ‘불완전성정리’를 발표한다. 물리학과 수학의 법칙이 사회현상에 적용될 리 만무함을 알면서도 이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발견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한다는 것’과 ‘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의 한계에 대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첫째,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 역시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의 내부에서 참여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외부에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두 가지 다 의미가 있다.) 둘째,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하여 논의를 진행할 때 텍스트가 갖는 한계에 대하여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한 면을 강조하는 순간, 다른 한 면은 감춰지거나 간과될 수밖에 없다.     



진짜에 대한 강박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지난 특집에서 논의된 마을공동체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잠시 딴지를 걸고 싶다. 마을공동체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마을공동체는 진짜가 아니야’ 정도가 되겠다. 그럼 왜 진짜가 될 수 없는가? 첫 번째 이유는 사회-경제적인 것으로 마을공동체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섭되어 버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교육-사회적인 것으로 대학입시제도라는 질서에 순응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사회-심리적인 것으로 마을공동체가 자발성을 상실하고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첫째, 자본주의는 일종의 ‘출생의 비밀’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마을 공동체는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영토 안에 포섭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을 공동체의 잘못이 아니다. 마을공동체가 ‘잠정적’으로 설정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필연적이다. 마을 공동체는 ‘이데아’라기 보다는 ‘가설’이며, 가설은 실천(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마을 공동체의 이상은 잠정적이다.

   

둘째, 대학입시제도의 관점에서 마을공동체를 비판할 때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정용주는 “마을공동체 만들기 운동이 교육 문제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대부분의 성공 사례는 학벌 사회를 철폐하기 위한 저항 운동이 아닌 계급적 욕구”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그 전에 학벌 사회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학벌 사회를 어떻게 철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계급적 욕구라는 표현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계급적 욕구를 과연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이것이 마을공동체 비판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좀 더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자발성의 상실은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심리적인 것이다. 자발성이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마을공동체의 실천사례들 속에서 자발성이 거세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민간의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콜라보가 거버넌스가 아닌가. 그런데 거버넌스를 관주도로 본다면, 그리고 콜라보가 간섭으로 치부된다면, 현실적으로 어떤 가능성이 남을 것인지 의문스럽다. 따라서 마을공동체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비판은 마을공동체의 열정적인 기획자들에게는 매우 서운한 지적이 될 것 같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비판은 마을공동체의 기획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리며 결국은 마을공동체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의 한 가지 가능성공동육아운동     


사실 개념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앞서 살펴본 실천들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다. 마을교육공동체가 특히 더 그러하다. 다만 인식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상식적으로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자면, 마을교육공동체는 “함께 키우고, 배움터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 서용선, <마을교육공동체란 무엇인가?>     


서용선은 마을교육공동체를 “함께 키우고배움터가 되고주인이 되는 것”으로 ‘잠정적’으로 정의하면서 ‘마을이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라는 것의 의미,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는 것’의 의미, 그리고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나는 서용선의 이 세 가지 정의에 기반하여 마을교육공동체의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공동육아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공동육아 운동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동육아의 연원은 1978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해 교육운동에 뜻을 모은 일단의 활동가와 학생들이 해송어린이걱정모임을 결성하고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보육시설 운영에 나선다. 어린이걱정모임은 이후 해송보육학교를 설립해 4년 동안 20여명의 보육교사를 양성하고 80년엔 난곡에 해송유아원을 만들어 저소득층 보육활동을 펼치게 된다. 난곡 해송유아원은 이후 관변의 새마을유아원에 편입되는 우여곡절 끝에 84년 창신동의 해송아기둥지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지금과 같은 공동육아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다듬어진 것은 1992년 어린이걱정모임 성원들의 참여로 공동육아연구회가 발족하면서부터다. 여기에서 공동육아의 기본 이념이 짜여지게 된다. 그리고 연구회의 도움으로 94년 3월 서울 신촌지역 공동육아 협동조합 길잡이 모임이 만들어졌고, 9월 우리어린이집이 개원했다. 공동육아연구회는 96년 6월 사단법인 공동육아연구원으로 인가를 받았고, 2001년엔 사단법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이하 공공교)으로 이름을 바꿨다. 산하에 어린이집(73개 터전)과 방과후(18개 터전), 대안초등학교(1개 터전),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지역공동체 학교(6개 터전)가 네트워크로 묶여 있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의 하루흐름은 다음과 같다.                          


아침열기
부모의 출근시간, 가정과 아동의 생활리듬에 따라 7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등원이 이루어지며 아침모듬(10시) 전에 등원한 아이들은 자유놀이를 하고 오전간식을 먹는다. 아침모둠 시간에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다 같이 둘러 앉아 주말 지낸 이야기, 날적이 함께 읽기, 나들이 장소 및 나들이 활동에 대한 계획 등에 대해 방별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나들이
대부분 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의 아이들은 연중 일상적으로 나들이를 나간다. 나들이 장소는 편도 30분 내외의 걸어서 갈 수 있는 주변 야산이나 공원, 놀이터 등 몇몇 정해진 장소로 반복적으로 나감으로써 익숙한 공간 속에서 편안한 탐색과 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보통 월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긴 나들이와 연간으로 계획되는 들살이 등을 통해 좀 더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좀 더 멀리 나가 놀이 환경을 확장하거나 특성화된 나들이로 경험을 확장하기도 한다. 

점심과 간식
점심과 간식은 공동육아의 일상생활 중 신체건강 및 자조기술발달과 관련해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시간이다. 전체 아이들이 함께 모여서 먹기도 하고 방별로 먹기도 한다. 교사가 배식해 주다가 점차 자율배식으로 바꿔가면서 자기조절력과 독립성을 길러간다. 

낮잠
낮잠 자기 전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림동화책을 읽어주는 등 편안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낮잠 전 활동을 하고 난 뒤 보통 2시간 내외의 낮잠을 잔다.

교육활동
교사가 계획하고 준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함께하는 시간으로 보통 3∼40분 정도 실내·실외에서 오후 간식시간 이후에 배정된다. 이 시간에는 주로 다양한 세시절기 활동과 표현예술활동이 이루어진다. 

귀가
오후 5시 반분부터 하원이 시작되어 7시 반까지 이루어지며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이므로 아이들의 자유놀이가 가장 활성화된다. 아마들도 등원시간보다는 좀 더 여유가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아마와 아마, 아마와 교사 사이에 아이들의 일상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마을이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     


‘마을이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라는 말은 사람들의 참여와 실천(기부, 협력, 의사 결정 등)으로 교육에 대해 공동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일로 실현된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배울 수 있도록 어른들이 관심과 배려를 실천하는 소극적 협력에서부터, 교육협동조합을 만들어 아이들의 교육, 복지, 생활 등에 관해 참여하는 적극적인 협력을 실천할 수 있다. 

- 서용선, 앞의 글     


‘공동육아’란 ‘내 아이’를 맡기거나, ‘남의 아이’를 보호해 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우자는 의미이다. ‘우리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것은 작게는 나 자신의 생활의 변화, 크게는 사회문화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공동육아에는 별칭문화가 있다. 모든 교사와 아마들은 서로 별칭을 부른다. 이를 통해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한 암묵적 차별은 억제되며 공동육아의 경험이 가장 중시된다. 

  

 공동육아의 또 다른 특징은 마실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마실 문화라 했지만, 사실은 매우 단순한 거다. 하원 후에 친구 집에 놀러가는 것이 바로 마실이다. 더 놀고 싶은 아이들의 욕구에 따라 마실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갑작스러운 야근과 같은) 아마의 필요에 따라 마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보통은 놀다가 저녁을 먹이고 9~10시쯤 아마가 아이를 데리러 오면 끝나지만 어떨 때는 아이를 맡긴 아마가 감사의 표시로 사온 맥주 한 병에 마실이 더 길어지기도 한다. 친해지다 보면 아예 하룻밤을 자고 가는 경우도 생긴다.

   

마을이 아이들을 키운다고 할 때 그에 가장 적합한 예 중의 하나가 바로 공동육아의 방 문화가 아닐까 싶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매월 1회 연령별 방모임 및 통합방 모임이 이루어진다. 연령별 방모임이 연령별로 아이들의 교육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통합방 모임은 장애, 폭력, 성 등 연령을 벗어난 교육과정 문제를 다룬다. 연령별 방모임에서는 교사와 아마가 함께 모여 월간 계획 및 지난 한달 동안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를 나누게 된다. 여기서 논의된 이야기들은 교사회와 이사회의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난 달 어떤 방모임에서 현재 우리 터전의 미세먼지 대응방안이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는 곧 이사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격론 끝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실천방안이 제시되었다 : ① 빠른 시일 내에 미세먼지 전문가를 초빙하여 마을교양강좌로 추진한다. ② 강연 후 통합방 모임을 통해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한다. ③ 통합방 모임 전까지 한시적으로 통합대기지수가 100을 넘을 경우 외출을 가급적 자제하고 외출 시에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한다.

   

공동육아에서는 아이들이 “가정, 이웃, 지역사회라는 중층적 환경 속에서 접하게 되는 생활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하여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익히는 동시에 놀이를 통해 늘 새롭게 재구성해 가는 역동적 과정 그 자체”를 교육으로 본다. 따라서 마을은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넘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된다.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는 것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는 것’은 마을이 가지고 있는 교육 자원과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이들이 학교뿐만 아니라 마을의 자연, 사회, 삶 속에서 살아 있는 배움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적 기회와 공간을 제공받는 일이다. 

- 서용선, 앞의 글     


공동육아에서는 아이들이 지내는 장소를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이 아닌 ‘터전’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의 활동하는 공간을 단순한 배움터가 아닌 삶의 터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터전의 개념은 어린이집을 넘어 아이들이 활동하는 장소로 확장된다. 

   

대표적인 것이 나들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공동육아어린이집의 아이들은 연중 일상적으로 나들이를 나간다. 편도 30분 내외의 걸어서 갈 수 있는 주변 야산이나 공원, 놀이터 등 몇몇 정해진 장소로 반복적으로 나간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곳에 갔느냐가 아니라 어떤 곳으로 가는 과정이다. 터전을 벗어나 미지의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밟는 곳이 곧 터전이 된다. 아이들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나들이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삶의 터전으로서 장소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아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중략) 아이들하고 관계를 맺으려면 아이들의 생활 세계에 발을 내딛고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야 합니다. 의미는 관계로부터 나오고 관계는 우리가 나의 가족, 이웃, 그 바탕이 되는 자연환경, 문화 환경과 깊이 있게 교류하는 데서부터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 문재현,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마을은 아이들의 배움터를 넘어 아마들의 배움터가 되기도 한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터전의 경우, 이 외에도 나쁜 나라 공동체 상영, 송파 지역 단오잔치, 아빠 어디가(아빠와 아이가 함께 하는 놀이 워크숍), 성내천 벼룩시장 등 지역주민이 참여하는 행사에 함께 하거나 스스로 기획해왔다. 공동육아 운동에서 마을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공동체 교육의 확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삶을 시작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마들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그림 1] 공동육아 운동에서 마을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공동체 교육의 확장으로 이해된다.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것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것’은 진정한 교육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교육적인 신념과 실천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다른 공동체에 확산함으로써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일이다. 지속 가능성이란 그 안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의 학습 결과로 검증받을 수 있으며, 그 학습의 결과는 아이들이 그 지역 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고 정주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 서용선, 앞의 글    

 

공동육아운동은 “아이들이 백지가 아니라 아이들이 그려가는 세상이 백지”라고 보는 아동관과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아동 역시 자기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아동 권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공동육아운동의 핵심과제로 “우리 아이들이 지금 살아가는 삶,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며 육아를 통해 아이와 어른들이 함께 변화하고 함께 힘을 합쳐 세상을 바꾸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만들어 낼 ‘삶의 조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이는 어른들이 먼저 행동으로 옮겨야 할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지역 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고 정주하는 것” 이전에 아마들이 먼저 그런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를 위해 공동육아운동이 채택한 방식이 ‘협동조합 모델’이다. 알다시피 민간의 재원을 모으는 방법으로 협동조합 방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운동의 자율성을 위해서나, 정주의 기반 마련을 위해서나 협동조합 방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협동조합 방식은 사람과 사람 간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중시한다. 지금 이 글을 쓸 지면을 제공해준 교육공동체 벗을 비롯한 많은 운동단체들이 협동조합 모델을 채택하는 이유이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의 조직체계는 [그림 2]와 같다.


[그림 2] 공동육아 협동조합 조직도

  

공동육아협동조합을 운영하는 일은 그 자체로 지역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고 정주하는 훈련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교육적이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소정의 출자금과 조합비를 부담하는 것 외에도 조모임(소위활동), 방모임, 교육아마, 자원아마, 하원아마, 주말청소, 대청소, 조합원교육, 개원잔치, 모꼬지, 총회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여 의견을 모으고 투표를 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마을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을은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마을교육공동체가 쉽게 말해 ‘마을을 기반으로 한 교육공동체’라 생각한다. 교육을 위해 공동체가 필요한 것인지, 공동체를 위해 교육을 필요한 것인지 모를 만큼 교육과 공동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공동육아운동은 아이와 아마가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 다층적이고 교육이 발생하는 지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중첩적이다. 그러나 이는 공동육아운동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돌봄, 소통, 협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복원해줄 가능성을 공동육아운동 역시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공동육아 운동이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에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공동육아운동은 아이와 아마가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 다층적이고 교육이 발생하는 지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중첩적이다. 그러나 이는 공동육아운동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돌봄, 소통, 협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복원해줄 가능성을 공동육아운동 역시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공동육아 운동이 마을교육공동체 만들기에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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