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육의 ‘미래’를 상상하다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3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학교를 꿈꾸며
이제 인간의 성취란 잘 만들어진 기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제 교육의 주된 결실인, 풍요로운 의미로 충만한 삶의 성취는 무가치한 것으로서 폐기되고 있다.
-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근대의 학교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시키고, 사회를 무지한 상태로부터 탈피시키려 했던 계몽주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교육운동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개명enlighten될 수 있고, 개명된 인간들이 사회의 오래된 폐단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사회로 진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의 가능성과 교육에 의한 사회개조 및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을 확신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회개조나 역사적 진보의 근원은 인간의 이성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철학, 과학, 정치, 경제, 미술, 문학 등에 걸쳐 소위 ‘보편적 지식’이 교육과정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교과목들은 가급적 세분화되었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쉬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복잡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환원주의적 방식이 적용되었다. 문제는 계몽주의가 철저하게 이원론-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은 단순히 수동적인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교사(기성세대)의 입장에서 볼 때 학생(미래세대)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는 대상일 뿐이다. 학생은 단지 교사가 주입한 지식을 열심히 암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막을 내렸다. 인간 이성의 승리와 역사의 진보를 외치던 목소리는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절망과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구의 증가. 생물 다양성의 감소. 피크오일과 자원의 고갈. 넘쳐나는 차별과 혐오. 테러리즘. 거기에 이제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까지 디스토피아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AI를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으로의 재편. 트랜스 휴먼과 인간 없는 세상에 대한 논의들이 가상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옛 방식이 매우 빨리 노화하고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데 새로운 활동은 그 방법조차 개발되지 않은 상태. 무엇이 안 좋은지 알고 제거하고 싶은데 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는 상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영훈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박채연, <여덟 살의 꿈>
부산의 한 초등학생이 지은 동요 노랫말이 한동안 세상에 회자가 된 적이 있다. 이 노래가 어른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안겨준 까닭은 영훈초-국제중-민사고-하버드대라는 이 사회의 학벌에 대한 감춰진 욕망을 들춰낸 것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라는 극적인 반전 때문이다. ‘저렇게 많이 투자하고 고작 미용사라니’라고 생각했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우리나라 학생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거대한 낭비의 체제 그 자체이다.
2017년 11월 30일.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혁신성장을 위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대응계획’을 확정해 발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기획재정부 등 21개 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해 위원회에 상정·의결된 ‘대응계획’은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인 ‘혁신성장’을 뒷받침하고 모두가 참여해 누리는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추진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큰 그림’이다. 그러나 교육 분야에서는 아쉬움이 많다.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해 융합교육 활성화, 맞춤형 교육 실현, 디지털 교육 고도화 등 미래 교육체계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STEAM 등 융합교육 활성화 추진’, ‘SW, 3D프린팅 교육 활성화’, ‘디지털 교과서 보급’, ‘지능형 교수학습 플랫폼 구축’ 등이 과연 우리 교육에 있어서의 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앞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 아니다. 새로운 교육철학과 학교교육의 근본적인 전환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단순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절대평가로 할 것인가 상대평가로 할 것인가를 넘어 대학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대학의 서열화와 이로 인한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가 과연 4차 산업혁명에 어울리는 것인지 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르쳐야/배워야 할 것인가, 왜 가르쳐야/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그동안 미뤄왔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최근 들어 교육과정-수업-평가의 일체화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수업이 교육과정과 평가라는 맥락을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속에 진정한 배움이 없다면, 무엇보다도 국가주도의 교육과정과 변별을 위한 평가라는 암묵적 가정에 수업이 구획된다면, 이 역시 ‘희망고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교육과정, 수업, 평가에 대하여 새롭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까닭이다.
교육과정의 의미는 다양하다. 교육과정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문서로서의 교육과정, 가르침으로서의 교육과정, 평가로서의 교육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은 다시 국가 수준 교육과정, 지역 수준 교육과정, 학교 수준 교육과정, 교사 수준 교육과정으로 나눠진다. 그런데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을 아무리 잘 만들더라도 그것이 교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은 가르침으로서의 교육과정과 평가로서의 교육과정이 반드시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배움이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교육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사유를 통해 교육과정을 깊게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교육과정 재구성이라고 하는데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교사의 능력을 ‘교육과정 문해력’이라고 말한다.
즉 성취기준을 중심으로 교육과정 문서를 읽고 해석하여, 학습자에게 적합하도록 교육과정 재구성과 배움 중심 수업, 성장 중심 평가를 실행하는 교육과정 운영 능력이 곧 교육과정 문해력이다. 이는 학생을 중심에 둔 교육철학을 정립하고 학교 교육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교사 수준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 안팎의 전문적 학습공동체 및 동학년 협의회를 통해 교육과정과 성취기준을 횡적・종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재구성 작업을 하면서 교육과정 문해력을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가야한다.
교사가 학교현장에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문서로서의 교육과정이 가르침과 평가로서의 교육과정으로 어떻게 변환되는지 그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사 교육과정의 맥락화 구조는 아래와 같이 3가지 단계로 구성된다.
먼저 하부 구조를 이루는 집단 지성 공간은 교사학습공동체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 단계에서는 학교 전체 교육 계획 속에서 교육과정의 책무를 확인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또한 교육의 시장화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지역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을 포용하는 공동의 리더십을 창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개인 역량 공간은 교사 각자의 성찰과 해석의 단계로 각자의 교육 활동에 실천의 지식들을 풀어놓는 단계이다. 여기서 교사는 “실천의 쟁점들을 규명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의 학생들과 교실과 학교를 연구하고, 교육과정을 구성 및 재구성하고, 교실과 학교 및 사회 혁신을 위해” 개인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집단 지성 공간과 개인 역량 공간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이것이 곧 질문이 있는 교실이자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학교이다. 배움과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학교 공동체는 삶 속에서 배움을 창출하고 배움을 통해 삶을 변혁해나가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가르침은 배움으로, 배움은 가르침으로 전환될 수 있다. 배움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말과 학생은 관리와 감독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은 양립할 수 없다. 지식을 공유하고 지혜를 보존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몫이 되려면,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깨달음에 대한 경탄이 배우는 자의 몫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평가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평가는 현재의 요구에 응답하는 동시에 학생들이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학생이 스스로를 책임지는 학습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줄 세우기 위한 평가가 아닌 학습으로서의 평가, 성장을 위한 평가를 지향해야 하는 까닭이다.
과학적 반성 과정을 체계화한 듀이John Dewey를 시작으로 하여 반성은 경험을 학습으로 변환하는 중요한 기제로서 인정받아 왔다. 쇤Donald Schӧn은 반성의 개념을 ‘행위 후 반성reflection on action’과 ‘행위 중 반성reflection in action’으로 구분하여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미 일어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의미하는 '행위 후 반성'이 행위가 종료된 후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살피고 이를 토대로 다음 행위를 위한 준비의 성격을 갖는 반면, 행위 중에 일어나는 반성을 의미하는 '행위 중 반성'은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쇤은 반성의 결과인 앎의 실천성, 즉 특수한 상황 맥락에 적용 가능한 실천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행위 중 반성'을 통해 반성 내용을 다시 행위로 옮기는 실천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반성적 실천, 특히 행위 중 반성은 교사의 수업전문성의 영역에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교사와 학생 사이의 학습동맹의 관점에서 수업을 바라보게 되면 반성적 실천은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에게도 열려있는 개념이 된다. 평가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상상 속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2015개정교육과정 총론의 ‘교육과정 구성의 중점'을 보면 “교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학생 참여형 수업을 활성화하여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기르고 학습의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하며, “학습의 과정을 중시하는 평가를 강화하여 학생이 자신의 학습을 성찰하도록 하고, 평가 결과를 활용하여 교수・학습의 질을 개선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학생이 자신의 학습을 성찰하도록 한다는 말은 학생 역시 수업에 있어서의 반성적 실천의 주체임을 암시한다. 서울시교육청 역시 성장과 발달을 지원하는 평가를 강조하면서 21세기 미래역량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ㆍ수업ㆍ평가가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하며, 학생들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교육과정, 학생이 중심이 되어 참여하고 상호작용하며 협력하는 수업, 학생의 학습과정에 대한 진단과 피드백으로 성장과 발달을 지원하는 평가 사이에 순환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미래역량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과정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이를 가르치는 수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교과 영역 및 창의적 체험활동 등을 통해 어떻게 길러줄 것인지, 삶의 맥락에서 의미 있는 지식과 역량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평가하고 피드백 할 것인지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하그리브스Andy Hargreaves와 셜리Dennis Shirley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학교교육의 변화와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범주화 하였다.
첫째, ‘혁신성과 불균질성의 길’로 요약되는 ‘제1의 길’은 국가의 자원이 풍부하고 교사의 자율성이 넘치며 혁신이 일어나긴 했지만 교육의 내용, 방법, 질 등이 지역마다 편차가 커서 균질성, 균등성이 부족했던 길이다. 둘째 ‘시장주의와 표준화의 길’로 요약되는 ‘제2의 길’은 시장주의 경쟁이 강하게 도입되고 국가가 교육의 표준화를 추구하면서 교사가 자율성을 상실하게 된 길이다. 셋째, ‘성과와 파트너십의 길’로 요약되는 ‘제3의 길’은 시장주의의 장점과 국가의 풍부한 자원을 결합해 교사의 자율성과 책무성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 했던 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노선들 중에서 간직해야할 것과 버릴 것을 정리하여 새롭게 제안하는 길이 바로 ‘제4의 길’이다.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1) 방향을 제시하고 지원하는 국가, (2) 학교개선 네트워크, (3) 조직화된 지역사회, (4) 지역 단위의 개발전략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그리브스와 셜리의 시각이 영미권의 학교교육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 현실과는 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미국교육사절단American Educational Mission이 우리 교육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가 참고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교육은 공식적으로는 줄곧 ‘시장주의와 표준화의 길’에 머물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등장한 참교육 운동이나 2000년대 이후 등장한 혁신학교 운동과 같이 대안적인 흐름도 존재한다. 하그리브스-셜리의 모델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각각 제1의 길, 제3의 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의 변화의 역사는 영미권의 역사와 분명히 다르다. 따라서 하그리브스-셜리 모델에서 아이디어를 얻되 우리에게 적합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 윤상혁(2017).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수업혁신의 의미를 생각한다」. 『오늘의 교육』 40호, 93~108쪽. '경계를 넘어선 배움' 부분 인용.
전환기적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각성이 없이는 인식론과 세계관의 변화를 추동하기 어렵다. 혁신innovation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을 뜻한다. 즉 혁신은 교육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성체제와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부터 혁신은 시작되어야 한다. 교사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수업혁신이 학교혁신과 교육혁신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업과 학교가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이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배움이 필요하다.
첫 번째 경계 - 공간
학교는 지역사회 혹은 마을로부터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배움 역시 학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사회는 그 자체가 기회와 자원이 충만한 학습 환경이다. 마을은 학생들이 성공적인 예술가, 장인, 지도자, 상인, 과학자, 그밖에 그들이 되고 싶은 시민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도전과 지원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 미래의 교육과정은 학교 교과 간, 더 나아가 학교 교과와 학교 밖의 세계 간의 새로운 관계를 염두에 두고 개발되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에 대하여 좀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 이제 ‘배움의 공동체’라는 말은 학교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교사는 학교 밖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교실의 경계도 허물어져야 한다. 왜 모든 교실은 천편일률적이어야만 하는가. 과목별로 다른 크기와 다른 형태의 교실을 상상할 수는 없는가. 칠판과 책상이 없는 교실을 상상할 수는 없는가. 얼마 전에 초등학교의 빈 교실을 어린이집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국민청원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묻고 싶다. 초등학교에 빈 교실이 있으면 안 되나? 학생들에게 그곳을 ‘무한상상실’로 개방할 수는 없는 걸까. 공터는 쓸모가 없는 공간이 아니다. 학생과 교사에게 맡겨두면 그 곳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배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두 번째 경계 - 시간
배움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상대적이다. 배움이 학생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학생의 학습능력을 연령에 따라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 학년이라는 이름으로 구획된 교육과정은 단순히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을 위계적으로 연결해놓은 하나의 규준規準일 뿐이다. 성취기준이 진정 학생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배움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학생이 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격려하면서 기다려 줘야지 시계만 바라보다가 시간이 지났다고 푯대를 빼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2009개정교육과정에서 도입되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인 학년군제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교실의 시간도 학생의 관점에서 재조정되어야 한다. 배움이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어 종소리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배움이 45분 만에 이루어질 리는 없다. 두 과목을 통합하여 90분 수업을 진행하거나 네 과목을 융합하여 180분 수업을 진행하는 상상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시간표를 계획하는 상상은 불가능한 걸까. ‘융합교육 활성화’, ‘맞춤형 교육 실현’이 진정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추진을 위한 큰 그림이 되려면 이러한 상상이 현실로 구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경계 – 힘/관계
“학교와 교사는 자신이 체득한 지식을 학생들과 공유함으로써 평가 권력의 일부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교사주도 평가가 가져다주었던 교실통제와 권위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교사와 학습자 사이에 진실한 협상이 없다면, ‘공유하는 학습목표들’이 단지 기준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뀔 위험이 있다.” 스토바르트Gordon Stobart의 말대로 학습의 주요 장애물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다. 학생이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장애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수사적 표현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학습동맹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은 가르치는 시민과 배우는 시민으로 만나야 한다. 이는 교육주체들 사이에 힘/관계의 새로운 배치agencement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배치agencement: 배치(아장스망)는 들뢰즈ㆍ가타리의 개념으로 소위 전문가에 의해 입안된 어떤 절대적 모델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교육주체들 사이의 기존의 힘/관계를 해체하는 것을 유일무이한 절대선으로 고착시킨다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배치는 유한하며 국지적이고 한편으로는 다양하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구성주의적 개념이다. 따라서 배치는 국가가 아닌 교육당사자들의 자율성에 근거해야 한다. 이는 학교의 공간과 시간을 배치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분권과 자치는 시대정신이다. 학교교육이 이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017년 새 학기를 맞아 ‘학교자치시대’를 선언하고 이를 구현할 방법으로 ‘학교자율운영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 업무 정상화, 공모사업 학교선택제, 전문적 학습공동체, 토론이 있는 교직원회 운영, 학부모회 조례 제정 및 운영비 지원, 학생참여위원회 운영, 학생회 운영비 지원 등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들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한계는 명확하다. 학교 구성원의 입장에서 볼 때 학교자치는 여전히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왜 그런가. 거시적으로는 교육부>시도교육청>지역교육청>학교라는 구조를 통해, 미시적으로는 교장>교감>부장교사>평교사라는 구조를 통해 모든 정보와 권한이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과 역량을 갖추고 말 그대로 학교운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가 민주적인 의사소통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교직원회, 학부모회, 학생회가 학교운영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에 걸맞은 권한과 책무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학생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학교자치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닌 수동적인 학습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문제다. 학생을 어떻게 교육의 주체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왜 학교정책과 교원정책만 있고 학생정책은 없을까? 교육복지라는 시혜적 입장이 아닌, 학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정책으로서의 학생정책. 이것이 너무 허황된 생각일까? 그렇지 않다. 교육기본법 제5조 2항을 보면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존중되며, 교직원ㆍ학생ㆍ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은 법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초중등교육법 제17조에 보면 “학생의 자치활동은 권장ㆍ보호”되며 동법 시행령 제9조에서는 학교의 학교규칙에서 학교자치활동의 조직 및 운영을 기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20조 1항에서도 “학생은 학교의 운영 및 서울특별시교육청의 교육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1966년 미국에서 60만 명 이상의 학생과 4천 개의 학교를 표집 대상으로 하여 교육 성취와 다양한 요인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른바 ‘콜먼 보고서Coleman report’이다. 이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이었다. 학교보다는 가정 배경이나 또래 집단이 학업 성취에 더 큰 영향을 미침을 드러낸 것이다. 한마디로 학교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 보고서의 결함이 드러났다. 그것은 이 보고서가 교실의 물리적 시설이나 도서관의 장서 수와 같은 교육의 투입 요소들만을 주로 살펴보았지 ‘교사의 수업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50년이 지난 콜먼 보고서를 언급하는 이유는–우리에게 그에 버금가는 보고서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이 시점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학교와 지역사회는 함께 성장해야 한다. 둘째, 또래 집단의 협력과 모방을 통한 발달이 일어날 수 있도록 구성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셋째, 공적인/공동의 책무성과 탈사유화된/집단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교사학습공동체, 이른바 교사의 ‘전문적 자본professional capital’이 학교를 바꾸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문적 자본professional capital: 하그리브스와 풀란은 『교직과 교사의 전문적 자본』에서 교사의 존재(being)와 역할(doing)에 대하여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교사 문화를 어떻게 재창조할지에 관하여 탐구하면서 이를 인적 자본human capital,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의사결정적 자본decisional capital의 집합으로 구성된 전문적 자본이라 부르고 있다. 전문적 자본을 공식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PC=f(HC, SC, DC)
(단, PC=Professional Capital, HC=Human Capital, SC=Social Capital, DC=Decisional Capital)
표준과 획일성을 벗어난 성취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학생 각자의 상황에 맞는 독특한 능력에 집중할 수 있을까? 배우기에 적당한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을까? 배움과 삶이 일치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수업과 평가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경직된 교육과정과 획일화된 학교의 시간-공간 속에 상상력이 발붙일 여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학교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교육주체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가르침과 배움의 당사자-교사와 학생-가 혁신의 주체로 설 때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혁신이자 미래의 학교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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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스토바르트(2016). 손준종ㆍ김범석ㆍ김희정ㆍ이성민(역).『시험의 시대』. 박영스토리.
이혁규(2013).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수업』. 교육공동체 벗.
앤디 하그리브스ㆍ마이클 풀란(2014). 진동섭(역).『교직과 교사의 전문적 자본』. 교육과학사.
황현정 외(2018). 『학교 자치 실현을 위한 지역 교육과정 구성 방안』. 경기도교육연구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 아니다. 새로운 교육철학과 학교교육의 근본적인 전환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단순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절대평가로 할 것인가 상대평가로 할 것인가를 넘어 대학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대학의 서열화와 이로 인한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가 과연 4차 산업혁명에 어울리는 것인지 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