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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Dec 01. 2017

진로교육의 진로를 묻다

기다림의 진로교육을 위하여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2

진로교육의 진로를 묻다



#1 길을 잃다


“코모리는 도호쿠東北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상점 같은 것은 없어서 시장을 보려면 면사무소가 있는 시내로 나가 농협의 작은 슈퍼나 가게로 갑니다. 가는 길은 대부분 내리막길이라 자전거로 30분. 오는 길은 얼마나 걸릴까요. 겨울엔 눈 때문에 걸어가야 합니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옆 마을에 있는 대형마트로 가는 듯합니다. 제가 거길 가려면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Little Forest. Summer. 2014.


코모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의 풍광과 길을 따라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인공 이치코의 뒷모습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러나 이치코는 길을 잃었다. 코모리에 큰 눈이 내린 날, 엄마가 사라진 것이다. 지독한 상실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치코에게 회사 간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호통을 치는 것뿐이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하지만 이치코는 명령에 따르는 대신 직장을 그만두는 선택을 한다. 그녀의 자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직장이 아니었다. “당신은 집안일은 전부 부인이 다하고 돌아가면 집은 따뜻하고 저녁밥이 기다리고 피곤하다 말만 하면 되겠지. 빨래가 밀리면 불평이나 하면 될 테고. 아무리 피곤해도 난 전부 내가 해야 해. 돈 버는 것도 집안일도 같이 해주는 사람이 없어. 여기서 돈 버는 동안은 집안일은 하나도 못하고 한 번에 하나씩밖에 못해. 눈 치우는 동안엔 절대 장작을 못 패지. 자기 싫은 일은 가족에게 미루는 주제에 바쁜 듯 잘난 척 말라고. 난 뭐든 혼자 해야 하니까. 가족에게 응석 부리는 당신들은 내 심정을 몰라.” 속으로 직장 상사를 욕하다가 이치코는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직장 상사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직장이 오히려 그녀의 자립을 막아왔다는 것을. 이치코는 그녀의 고향 코모리로 돌아간다.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요리를 한다. 사람들을 만나고 먹을 것을 나눈다.


그리고 가을이 지나갈 무렵.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엄마로부터 온 편지다.



#2 농사와 수학의 쓸모


새 천 년의 첫해에 ‘그린 스카우트’라는 이름으로 환경 동아리를 시작했다. 환경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리 활동을 학교 특색 사업으로 키워 보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그리고 보이 스카우트 지도자 경험이 있었던 당시 교감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동갑내기 동료 교사로부터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소개 받았다. 동아리 이름을 ‘오래된 미래’로 바꿨다. 2005년의 일이다. 바로 전해에 전교조 서울 사립 북부 지회에서 분회마다 텃밭을 임대하여 분양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동아리에서 텃밭을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농장을 찾아갔으나 이미 분양이 완료된 뒤였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농장주가 귀띔해 주어 ‘도봉예전농장’에 찾아가 텃밭을 얻었다. 해마다 수확한 배추와 무로는 김장을 담가 독거 노인들께 전달해 드렸다. 올해로 13년째다.


올해도 배추와 무를 수확했다. 도봉예전농장. 2017.


그러나 이것이 정말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인가? 13년 동안 주말 농장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 10평 남짓한 땅에 채소를 심는 것도 농사라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졸업생 중에 도시 농부의 길을 걷는 이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김장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는 배추와 무를 제외한 모든 재료(갓, 마늘, 매실, 미나리, 새우젓, 생강, 양파, 액젓, 쪽파, 그리고 무엇보다 고춧가루)를 돈으로 구입했다. 교육적 경험을 돈으로 산 셈이다. 물론 직접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고 채소를 수확하는 활동이 학생들의 생태적 감수성을 자극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고무장갑에 앞치마를 두르고 배추에 속을 넣으며 김치를 받고 기뻐하실 독거 노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학생들의 봉사 의식을 북돋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참authentic교육과 텃밭 코스프레 사이의 경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호하다.


다른 한편, 수학 교사로서 수학을 가르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수학이 먹고사는 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학은 살아가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인공 지능이 등장하면서 이 논리는 한 단계 진화한다. 사람보다 인공 지능이 더 잘할 수 있는 수학을 중시하는 학교의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또 최근에는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빅 데이터 전문가나 코딩 전문가가 되기 위해 통계학과나 수학과에 진학하겠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변석개가 따로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뿌리는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수학이라는 것을 굉장히 도구적으로 바라본다. 수학의 쓸모를 따진다. 그러나 쓸모없음이야말로 수학의 쓸모가 아닐까.


수학은 앎에 대한 호기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수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과 배움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다른 경우에도 그런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야말로 수학을 배우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수학의 쓸모는 어디에 있을까. 2학년 4반 교실. 2017.


수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다. 문제란 질문을 형식화한 것이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생한 곳에는 어김없이 수학이 존재했다. 수학은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던진 질문이자, 그것을 추론하고 의사소통하면서 해결해 나간 산물이다. 굳이 수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단순히 지식과 기능의 습득을 넘어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사유의 힘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실 속에서 수학의 쓸모는 수능시험 30문항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100분 동안 30문항의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대학 선발에서 변별력의 보루이자 학생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큰 변수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소위 ‘인공 지능 시대’라는 와중에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3 함부로 나아갈 때가 아니다


진로교육이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이 학생에게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바탕으로 직업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진로를 탐색·설계할 수 있도록 학교와 지역 사회의 협력을 통하여 진로 수업, 진로 심리 검사, 진로 상담, 진로 정보 제공, 진로 체험, 취업 지원 등을 제공하는 활동”을 말한다. 진로교육법 제2조 1항. 그러나 이런 활동을 통해서 진로를 교육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직업 세계라는 말이 너무 모호하다. 직업 세계란 직업의 종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직업의 현실을 말하는 것인가. 직업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을 판별하는 기준을 갖게 하는 것인가.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그 세계는 누가 만든 것인가. 전도유망한 직업과 곧 사라질 운명인 직업을 결정하는 권력은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진로를 체험한다는 말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잡 월드’류의 직업 체험을 말하는 것인가? 혹시 그럴싸한 직업 코스프레를 통해 대학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진로 체험의 목적은 아닌지 묻고 싶다.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되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점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진로교육의 목적인가. “과도한 대학 진학 및 전공 쏠림 현상에 따른 인력 수급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조기 진로교육이 필요하다”는 발상은 지금보다 더 일찍 성적에 따른 줄 세우기를 하겠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제2차 진로교육 5개년 기본 계획. 그런 의미에서 국가 진로교육 체계 확립을 통해서 국가 인적 자원 개발의 효율화를 도모하겠다는 발상은 구시대적이다.


현실 사회와 유리된 교육과정을 극복하기 위해 흔히 교육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 사회의 맥락에 기반하면서 학생 각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교육과정과 진로교육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사회의 진로를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진로만을 고려하는 진로교육이 자기 계발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제 고백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6도의 악몽’과 ‘기술적 특이점’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진로를 장담할 수 없다. 단순히 경제적 불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호황이 불가능한 물적 조건 속에서 여전히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그 미련한 미련이 문제다. 쓰레기 매립지는 이미 포화 상태인데도 일회용품의 사용은 늘어만 간다. 피크 오일의 경고가 나온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석유 사용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참사를 겪고도 핵 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늘어나는 인구, 생물 다양성의 감소, 여전한 핵 전쟁의 공포, 넘쳐나는 차별과 혐오, 테러리즘. 거기에 이제는 인공 지능까지 디스토피아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인공 지능 소유에 따른 계급으로의 재편. 트랜스 휴먼과 인간 없는 세상에 대한 논의들이 가상과 현실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을 학교 밖으로 슥 미뤄 둔 채 수능 개편안, 학종, 내신의 유불리를 저울질하면서 그에 따른 스펙 쌓기 교육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명과 평화, 자유와 존엄을 이야기하지 않는 진로는 참기 힘든 가벼움이다.


“나는 어디까지 가려고 이 차를 탄 걸까요.” 구병모. 어디까지를 묻다. 2015


나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 길의 끝에 낭떠러지가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함부로 걸을 때가 아니다. 길이 없을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6도의 악몽(마크 라이너스, 2008) 지구 평균 기온이 6℃ 상승하게 되면 자연재해가 일상화되며, 사막이 급격히 늘어나고, 세계의 주요 도시들은 물에 잠긴다. 이러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수많은 생물 종들이 대량으로 멸종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적 특이점. Technological Singularity. 은 인공 지능의 발전이 가속화되어 모든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초 인공 지능이 출현하는 시점을 말한다.



#4 기다림의 진로교육


스스로 선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벗을 만드는 것, 벗이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는 것, 그것이 자립이다. 공동체에 산적한 문제들은 외면한 채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발상은 자립과는 거리가 멀다. 기도하는 손과 노동하는 손은 다르지 않다. 노동하는 손에 공동체를 위한 염려를 담아야 한다. 그럴 때 노동하는 손은 곧 기도하는 손이 된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냉난방 기술, 환경 오염을 걱정하는 쓰레기 분리 기술이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기술이나 법률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술과 동등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은 얼마나 천박한가.


우리의 진로교육은 단순히 노동하는 손이 아닌 기도하는 손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삶의 척박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로를 강요하지 않는 진로교육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을 강요할 능력도 권한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학생들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니, 기다림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큰 눈 속에서도 땅 밑으로부터 파란 새싹을 밀고 나온 머위처럼 때가 되어 스스로 돋아날 때까지 지켜볼 수 있는 기다림의 교육,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진로교육이 아닐까.


Little.Forest. Spring. 2015



스스로 선다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기댈 수 있는 벗을 만드는 것, 벗이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는 것, 그것이 자립이다. 공동체에 산적한 문제들은 외면한 채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발상은 자립과는 거리가 멀다. 기도하는 손과 노동하는 손은 다르지 않다. 노동하는 손에 공동체를 위한 염려를 담아야 한다. 그럴 때 노동하는 손은 곧 기도하는 손이 된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냉난방 기술, 환경 오염을 걱정하는 쓰레기 분리 기술이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기술이나 법률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술과 동등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은 얼마나 천박한가.


이 글은 <오늘의 교육> 41호에 실린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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