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사교육포럼2017(CITEF) : 수업비평과 수업혁신 다시 묻기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1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수업 혁신의 의미를 생각한다
2011년에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책이 교육공동체 벗에서 나왔다. 이 시대를 교육 불가능이라는 키워드로 규정하고 있는 이 책은 사실 ‘교육 불가능 선언’만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교육 불가능’은 교육을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한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원인들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교육체제를 설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가깝다. 그것은 제대로 된 교육을 막는 소위 ‘교육적폐’들을 외면한 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교육적 사기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에 너무나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나머지 질병의 근본 원인을 발본색원할 기회와 의지를 모두 놓쳐버린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혁신革新, innovation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을 뜻한다. 즉 “불가능”의 선포가 없이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교육을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하겠다는 말은 교육의 디폴트default를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기존의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는 선언인 동시에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글을 통해 나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혁신, 특히 수업 혁신이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과거에 이계삼이 한겨레에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라는 칼럼을 썼다가 전교조, 특히 혁신학교에 투신한 교육실천가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혁신학교는 ‘배움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수업 과정과 학교문화의 개선 운동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설정이 매우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학교교육이 강요하는 배움 그 자체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그리고 한 존재의 내적 성장과 사실상 무관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계삼.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 한겨레 2014년 10월 28일자.
이 짧은 글에서 이계삼은 혁신학교의 전제를 ‘배움에서 도피하는 아이들’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쓴 사토 마나부佐藤 学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수업 과정과 학교문화의 개선 운동이라 함은 배움의 공동체 운동을 의미하는 것일 터. 만약 이계삼이 ‘사토 마나부와 배움의 공동체 운동은 혁신학교 운동의 답이 아니다’라고 칼럼의 제목을 뽑았다면 그 정도의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계삼의 혁신학교 비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미 혁신학교 내부에서 혁신에 대한 피로를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차마 답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 길을 지속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수업의 혁신이 이루어져 왔던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수업의 혁신이 학교의 혁신, 교육의 혁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는 ‘따위’로 치부될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얼마나 강고하고 뿌리 깊은 것들인지에 대해서는 혁신학교를 겪어본 교사들뿐만 아니라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교사들이 이미 체득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업혁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학교혁신, 더 넓게는 교육혁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교육혁신은 일반적으로 학교혁신을 의미한다. 사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교육혁신은 학교혁신을 포함하는 상위개념인데 두 개념 사이의 관계가 확실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혁신의 방향과 범위 설정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학교혁신’에서의 ‘학교’는 일반적으로 초중등학교를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교육문제가 단순히 초중등학교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긴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혁신학교 운동에서와 같이 수업혁신은 학교혁신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쩌면 이는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라고 주창하고 있는 사토 마나부와 그로부터 시작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업이 바뀌었는데도 학교는 요지부동이다. 이유가 뭘까? 수업이 아직 덜 바뀌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업이 바뀌어도 학교는 바뀔 수 없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계삼의 말대로 오늘날 학교교육이 강요하고 있는 ‘수업’이 사실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에 그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 존재의 내적 성장과도 무관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까?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수업의 의미에 대한 역사적 변천과정을 짚어보아야 한다. 이는 수업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의 뿌리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코메니우스Comenius, 1592~1670, 헤르바르트Herbart, 1776~1841, 그리고 사토 마나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인간은 먼저 인간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인간의 교육은 이른 나이에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공동으로 교육되어야 한다”, “남녀 모든 아이들은 학교에 맡겨져야 한다”, “학교에서의 수업은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학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는 개혁될 수 있다” …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 말들은 사실 코메니우스가 400여 년 전에 한 이야기들이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Pampaedia』에서 교육이란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사람omnes에게 모든 것omnia을 철저히omnino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옴네스, 학교 수업은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의 옴니아, 그리고 빠짐없이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의 옴니노는 보편적 공교육 체제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즉 가르치는 대상, 가르치는 내용,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차별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가능한 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적이 된 것이다.
수업혁신에 대한 이야기를 코메니우스로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아직도 우리 교육이 모든 학생들에게 모든 지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어떤 지식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좋은 교과서와 좋은 교수법만 있다면 학교는 개혁될 수 있다는 생각도 어쩌면 코메니우스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헤르바르트에게 있어서 교육은 곧 수업이었다. 그는 『일반교육학Allgemeine Padagogik』에서 ‘수업이 바탕이 되는 교육에 관한 이론’을 이야기 하면서 이를 ‘교육적 수업erziehender unterricht’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과 수업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교육적 행위였다.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려고 하는 수업은 학습자의 인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식, 그러한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의미 있는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입니다. (…) 우리가 여기서 관심 갖는 수업은 사람의 생각과 의식을 바꿀 수 있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헤르바르트. 김창환(1998). 헤르바르트의 교육의 개념: 수업에서 재인용.
‘수업’은 ‘교육적’이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수업이 단순한 지식 전달에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르바르트는 수업이 없는 교육을 논외의 대상으로 치부하였다. 반대로 그는 교육적이지 못한 수업은 수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헤르바르트는 국가주도 교육을 반대하고 교육의 자율성을 주창하였다. 또한 교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교육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헤르바르트에 의해 수업이라는 행위는 지식이나 기술을 매개하는 차원에서 좀 더 차원이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육이라는 것이 수업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축소됨으로써 교수주의instructivism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김창환(1998). 위의 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헤르바르트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수업에 대한 그의 혁신적인 생각이다.
교사들이 효과적으로 강의하기 위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수업원칙이다. 이 원칙에서는 수업이 목적이고, 관심이 수단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이제 바꾸어져야 한다. 수업은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수업은 일정시간 동안만 진행되지만, 관심은 학생의 일평생의 삶 동안 유지되어야 한다. 헤르바르트. 위의 글에서 재인용.
수업을 위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수업이 기여해야한다는 그의 견해는 시대가 바뀌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도 달라진 지금 우리에게 수업이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사토 마나부와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우리나라의 혁신학교 운동에 끼친 영향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의미에서의 수업 혁신을 말할 때 그 첫걸음은 당연히 배움의 공동체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사토 마나부는 그의 책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에서 배움의 대화적 구조에 착안하여 배움을 교육내용인 대상세계(사물)와의 만남과 대화, 그 과정에서 수행되는 다른 아이들의 인식이나 교사의 인식과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새로운 자기 자신과의 만남과 대화로 특징짓고 있다. 즉, 배움은 세계 만들기(인지적 실천)와 친구 만들기(대인적 실천)와 자기 만들기(자기내적 실천)의 세 가지 대화적 실천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교육과정curriculum은 곧 ‘배움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이력서를 가리켜 커리큘럼 바이티curriculum vitae라고 하는데서 보다시피 교육과정은 배움의 이력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그래서 사토 마나부는 교육과정이 교무실에서 목표나 계획의 일람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실의 일상 속에서 나날이 창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교육과정 창발emergence의 주체가 ‘배움의 공동체’이며 방법론이 ‘총합학습’인 것이다. 총합학습이란 현실적인 주제(문제)를 핵으로 하여 지식과 경험을 단원으로 조직한 배움이라는 점에서 프로젝트기반학습Project Based Learning 또는 문제중심학습Problem-based learning과 유사하다.
배움의 공동체 운동 이전에 수업혁신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열린교육운동’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열린교육운동은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수업혁신운동으로 이를 통해 토의・토론 학습, 협력 학습, 프로젝트 학습 등 다양한 학습 방법이 실험되고 확산되었다. 이혁규(2013).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수업. 그러나 ‘수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과거의 수업혁신 운동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것이 교수주의instructivism가 아닌 구성주의constructivism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구성주의는 실제 세계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통하여 학습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시한다. 구성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수업은 학습자로 하여금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반성활동을 하게하고, 그 반성 활동을 통하여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개발하도록 하며, 나아가 사회적 통념이나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지식을 검증하고 그 결과에 터하여 지속적으로 지식을 변형, 생성해 나가도록 돕는다. 최욱 외(1998). 교수체제개발에서의 구성주의와 교수주의. 실제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학습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육체제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이 수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육 불가능’ 선언을 수업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경우 교수주의 패러다임의 종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육불가능의 이야기는 (…)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라는 ‘다른 배움’의 이야기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의 교육 체제를 어떻게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체제 전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실제의 사회경제적 삶과 연관되는 ‘삶의 기술’, 앞으로 닥쳐올 세상을 미리 살아가는 ‘연습’의 과정들을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계삼. 앞의 글.
사토 마나부와 그가 주창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은 혁신학교 운동에 있어서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서근원은 사토 마나부의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교육철학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교육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는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에 전파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말한다. 즉 배움의 공동체가 지향하는 것과는 모순되는 과정과 방식으로 배움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수업의 혁신을 단순히 교수법의 혁신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학교에서 혁신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제라도 학교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헌 부대에 헌 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교수주의의 패러다임을 다시 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근원(2011). 배움의 공동체는 학교 혁신의 길인가.
앞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수업의 역사에 있어서 교수주의 패러다임의 뿌리는 대단히 깊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나라의 수업혁신 운동, 대표적으로 배움의 공동체 운동이 여전히 구성주의 인식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 배움의 공동체 운동에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다. 아무리 혁신적인 교수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관리와 훈육이라는 교수주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교육혁신의 답이 될 수 없다.
전환기적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각성이 없이는 인식론과 세계관의 변화를 추동하기 어렵다. 혁신은 기성체제와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로 규정짓는 것은 교육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사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수업혁신이 학교혁신과 교육혁신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업과 학교가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이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배움이 필요하다.
첫 번째 경계 - 공간
학교는 지역사회 혹은 마을로부터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배움 역시 학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사회는 그 자체가 기회와 자원이 충만한 학습 환경이다. 마을은 학생들이 성공적인 예술가, 장인, 지도자, 상인, 과학자, 그밖에 그들이 되고 싶은 시민으로 자라는데 필요한 도전과 지원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 엘리엇 워셔, 찰스 모즈카우스키(2016). 넘나들며 배우기. 미래의 교육과정은 학교 교과 간, 더 나아가 학교 교과와 학교 밖의 세계 간의 새로운 관계를 염두에 두고 개발되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에 대하여 좀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 이제 ‘배움의 공동체’라는 말은 학교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교사는 학교 밖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두 번째 경계 - 시간
배움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상대적이다. 배움이 학생에게 도달하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따라서 학생의 학습능력을 연령에 따라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 학년이라는 이름으로 구획된 교육과정은 단순히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들을 위계적으로 연결해놓은 하나의 규준規準일 뿐이다. 성취기준이 진정 학생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배움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학생이 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격려하면서 기다려 줘야지 시계만 바라보다가 시간이 지났다고 푯대를 빼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2009개정교육과정에서 도입되었으나 유명무실한 상태인 학년군제를 현실화하거나 (무학년제와 같이) 확대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경계 – 힘/관계
가르침과 배움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가르침은 배움으로, 배움은 가르침으로 전환할 수 있다. 배움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말과 학생은 관리와 감독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은 양립할 수 없다. 지식을 공유하고 지혜를 보존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몫이 되려면,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깨달음에 대한 경탄이 배우는 자의 몫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평가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평가는 현재의 요구에 응답하는 동시에 학생들이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학생이 스스로를 책임지는 학습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줄 세우기 위한 평가가 아닌 학습으로서의 평가, 성장을 위한 평가를 지향해야 하는 까닭이다. “학교와 교사는 자신이 체득한 지식을 학생들과 공유함으로써 평가 권력의 일부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교사주도 평가가 가져다주었던 교실통제와 권위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교사와 학습자 사이에 진실한 협상이 없다면, ‘공유하는 학습목표들’이 단지 기준에 순응하는 것으로 바뀔 위험이 있다.”고든 스토바르트(2016). 시험의 시대. 고든 스토바르트의 말대로 학습의 주요 장애물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다. 학생이 배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장애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수사적 표현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학습동맹이 필요하다. 이는 교육주체들 사이의 힘/관계의 새로운 배치agencement를 의미한다.
최근 들어 교육과정-수업-평가의 일체화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수업이 교육과정과 평가라는 맥락을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속에 진정한 배움이 없다면, 국가주도의 교육과정과 변별을 위한 평가라는 암묵적 가정을 외면한다면, 이 역시 희망고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대학입시가 수업의 형태를 강제해왔다. 즉 평가가 잠재적 교육과정이었던 셈이다. 평가의 서열화는 대학의 서열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평가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대학과 초・중등학교의 힘/관계 역시 새롭게 배치되어야 한다.
표준과 획일성을 벗어난 성취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까? 학생 각자의 상황에 맞는 독특한 능력에 집중할 수 있을까? 배우기에 적당한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을까? 학교는 교육과정과 수업과 평가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경직된 교육과정과 획일화된 학교의 시간-공간 속에 상상력이 발붙일 여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학교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교육주체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새롭게 배치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업혁신이자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전환기적 시대에 살고 있다는 각성이 없이는 인식론과 세계관의 변화를 추동하기 어렵다. 혁신은 기성체제와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로 규정짓는 것은 교육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사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수업혁신이 학교혁신과 교육혁신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업과 학교가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이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배움이 필요하다.
이 글은 <청주교사교육포럼2017(CITEF) : 수업비평과 수업혁신 다시 묻기>에서 발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