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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May 23. 2020

교육,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와 생태적 전환

《오늘의 교육》의 10년(2011~2020) 그리고 새로운 10년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20

교육,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와 생태적 전환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이 올해로 십년 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오늘의 교육》이 수행해온 것들은 한마디로 창간호부터 이어진 ‘한국 교육의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교육의 지속 가능/불가능 관점에서 ‘교육 불가능’이라는 시대 규정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원전폭발 참사와 함께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었다.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나는 ‘코로나 시대’의 교육을 논함에 있어 ‘교육의 생태적 전환’ 담론이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앎과 함과 삶의 일치 그리고 자기 생산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적 지혜를 교육과정에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학생자치와 학교민주주의, 교육자치와 교육과정분권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전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우리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의 새로운 10년을 힘차게 준비해야 할 때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툰베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 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 그레타 툰베리, <UN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UN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그레타 툰베리


2018년 8월 20일, 그레타 툰베리는 스웨덴 의회 건물 바깥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사진 속 그녀는 기후 변화에 저항하는 메시지와 당국이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 일이 있기 나흘 전에는 비행기에 대한 경고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결심을 티셔츠 이미지에 담은 것이다.


툰베리는 기후 변화를 인류가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말하지도 않고 실천에 옮기지도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피켓을 들게 했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게 했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걸까? 2019년 9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기후행동 정상회의>는 툰베리를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기성세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1)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긴급함을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슬프고 화가 난다해도,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행동하지 않고 있는 거라면, 여러분은 악마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여전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레타 툰베리, <UN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대멸종의 언저리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부동산과 재테크 그리고 경제성장의 지표에 대한 것들뿐이다. 아마도 기성세대들은 툰베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듣고 있지만 응답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만 행동하지 못한다. 그것이 근대교육체제가 말하는 ‘성장’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여전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리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북유럽 선진국의 학생이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과연 10년 후에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순진함으로 치부된다. 한마디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거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는 사람은 누군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말하지 않는/못하는 사람 아닌가. 외면하거나 왜곡하거나. 이게 이 시대의 성숙이다.


툰베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기후위기를 위한 학교 파업'2)과 같이 미래를 위해 등교를 거부한 행위는 근대교육체제의 불가능성을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학교는 항상 미래를 말해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 앞에서 학생들이 묻는다. “미래가 없는데 왜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하나요?” 지금 우리는 학교의 존재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교육적 야만과 지속 불가능의 사유


《오늘의 교육》 창간호 (2011) /『교육 불가능의 시대』(2011)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라는 특집과 함께 같은 해 3월에 창간된 《오늘의 교육》 첫 번째 특집 글이 이계삼의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였다는 것이 지금도 벗들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교육 불가능’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이라는 개념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1713년 폰 카를로비츠가 최초로 이 개념을 사용했을 때는 산림청장이라는 그의 직업에 걸맞게 “벌목량은 새로 심은 나무의 성장에 의해 보충될 수 있을 만큼만 허용 된다”는 ‘지속 가능한 산림경제’의 관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지속 가능성이란 개념은 인류가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 하며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와 관련이 있다. 오늘날의 세계가 지속 가능성의 원칙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가 ‘지속 불가능’하다고 진단을 내리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미래세대에게 지속 가능성의 의미에서 어떠한 유산을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3)


이를 ‘교육 불가능’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자. 2011년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에서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출간한 이 후 ‘교육 불가능’이라는 개념만큼 현장의 교사들에게 이중적으로 수용되는 말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학교폭력’, ‘교실붕괴’, ‘민원’, ‘교권’ 등의 키워드를 떠올릴 때는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교사 - 특히 아직도 학교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 와 공교육을 공격하는 말이라고 느낄 때에는 부당한 규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을 순전히 가르침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오해일지 모른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있듯이 교육은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작용이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아이들이 의견을 묻는 글쓰기 과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해 버리고 마는 것, 판단에 대한 이유를 물으면 ‘그냥’이라거나, ‘그런 것 같다’라고 얼버무리는 것에는, 아이들이 엎드려 자는 것으로 학교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때워 버리거나 흘려버리는 것으로 학교생활의 무의미함을 잊어버리려는 것과 비슷한 동기가 엎드려 있는 것이다. 요컨대, 아이들의 이러한 무기력과 권태의 뒤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대하고 복잡하고 짜증나는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기력하지만 또한 이 세계와의 대면을 주체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계삼,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 중에서


‘교육 불가능’은 수업 실천의 차원이 아니다. 학교 제도의 범주도 벗어난다. 그것은 야만에 대한 시대적 규정이다. 야만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 창간호에서는 경제의 논리가 교육의 논리를 집어 삼킬 때, 이것을 야만이라고 불렀다.4) 학생의 성적에 따라 행복이 서열화 되고 부모의 소득에 따라 기회의 폭이 달라지는 사회. 공부가 곧 사회・경제적 지위 투쟁이 되는 사회. 그것이 야만 아닌가? 그리고 이는 당연히 교육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


나는 위 인용절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 (역설적이지만)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 속에 숨겨진 ‘희망의 페다고지’의 단초를 발견한다. 아이들의 ‘교육X’에 대한 무기력은 곧 어떤 세계에 대한 주체적 외면이자 ‘~교육X’에 대한 무의식적 의지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교육X’가 근대교육을 기획한 ‘데카르트적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면, ‘~교육X’는 데카르트적 사유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다고 생각한다.5) 그리고 ‘~교육X’의 핵심은 ‘자기생산’과 ‘자율성’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우리는 자율이란 개념을 흔히 쓰는 뜻으로 쓰고 있다. 곧 자기가 따르는 법칙이나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체계는 자율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6) 자기 생산은 생명을 구성할 뿐 아니라, 인지를 구성하고,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 점에서 ‘앎=함=삶’이라는 등가공식이 성립한다. 객관적 진리에 기반한 계몽주의가 이분법 속에서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교육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면, ‘앎=함=삶’에 기반한 생태적 사유는 수평적인 연결망 속에서 종합적인 지식을 산출한다. 근대의 객관적 진리론이 ‘대답으로서의 지식’을 추구하는 데 반해 생태적 사유는 ‘문제제기로서의 지혜’를 추구한다.7)



가르침의 계보학


앞에서 ‘교육 불가능’에 대한 오해는 결국 교육에 대한 전제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했다. 이를 ‘가르침’이라는 개념에 적용해보자.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있어서 가르침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라떼는 말이야”라는 풍자 혹은 ‘맨스플레인mansplain’ 에 대한 비판은 “누굴 가르치려 들어? 꼰대/한남같이.”라는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은 매우 제한적 개념이다. 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 생태적 지혜와 불일치하는 행위라고 여기지 않는다.


수형도로 본 교수행위 개념의 계보학


브렌트 데이비스는 교수행위의 개념을 우주의 본성에 따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지식의 원천에 따라 그노시스/에피스테메와 간주관성/간객관성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인식론의 관점에서 신비주의/종교, 합리주의/경험주의,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복잡성 과학/생태주의로 나누고 있다.8) 중요한 것은 이 계보도가 프랙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9) 즉, 각 부분의 교수행위는 전체와 닮은꼴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사의 가르침에는 그/그녀가 지향하는 중심 교수행위가 있지만 항상 단일한 것은 아니며 다양한 교수행위가 혼재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브렌트 데이비스의 구분에 따라 간단히 살펴보자.


1. 형이상학적 뿌리


1.1.a 신비주의

☞ 가르침이란 이끌어내는 것이다(educating)

(의미) 사람은 원래 지식을 갖고 태어나지만 충분히 현실화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태초부터 그 존재에 얽혀 있는, 그곳에 이미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1.b 종교

☞ 가르침이란 훈련시키는 것이다(disciplining)

(의미) 가르침은 소명의식을 필요로 한다. 교육이란 약속된 땅을 찾아가는 것, 즉 이미 만들어진 진리의 체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자는 권위가 있어야 하며 그만큼 가르침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1.2.a 합리주의

☞ 가르침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instructing; lecturing)

(의미) 타당한 지식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르침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들을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부터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순서로 교육과정에 담아 잘 설계된 교수법에 의해 구조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1.2.b 경험주의

☞ 가르침은 진단하고 교정하는 것이다(diagnosing; remediating)

(의미) 교육은 (가급적 많은) 미성숙한 아이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정상적인 발달단계가 설정되고 연령 적합도에 따라 교육내용들이 배열된다. 가르침은 평균적인 기준에 따른 진단과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2. 형이하학적 뿌리


2.1.a 구조주의

☞ 가르침은 촉진시키는/본을 보이는 것이다(facilitating; modeling)

(의미) 학습은 지식을 전수받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학습자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또한 학습자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결코 고정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자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인지 주체이다. 따라서 가르침은 배움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수-학습은 학생이 교사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교사가 학생의 학습과정을 조율하는 상호 안무와 같다.


2.1.b 후기구조주의

☞ 가르침은 해방/전복시키는 것이다(emancipating; empowering)
(의미) 진리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따라서 지식은 문화적으로 우세한 해석과 선호의 습관을 구현하고 실행하는 지배적인 일련의 정체성들을 마스터하는 것이다. 서양의 지식이 동양의 지식보다 권위를 갖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남성의 지식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여성의 지식보다 선호된다. 가르침은 ‘정상성’에 도전하는 것이며, 지식의 감춰진 권력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2.2.a 복잡성 과학

☞ 가르침은 불러일으키는/참여하는 것이다(occasioning; participating)

(의미) 우리 모두는 행위자들agents의 집합체이며, 일관된 단위체이고 동시에 다른 창발된 단위체들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 지식과 집단적 지식의 생산,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형태의 진화, 그리고 개인적 행위와 집단적 가능성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2.2.b 생태주의

☞ 가르침은 대화하는/경청하는 것이다(conversing; caring)

(의미) 앎과 함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기술이 아니라 교사의 태도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삶과 배움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가르침/배움은 삶의 현장에 마음을 다해 참여하는 것이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존재론적 전회


교수법이 어떻게 가르칠/배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면, 교육과정은 무엇을 가르칠/배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즉 교육과정은 방법론을 넘어 세계관과 연결된다. 오늘날 지식(앎)과 실천(함)과 존재(삶)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간객관적 인식론의 학습 모형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마투라나는 다음과 같은 모형을 제시한다.10) 우선 존재론적으로 주체도 객관적이고 객체도 객관적이다. 그리고 두 객관은 구조적으로 접속되어 있다. 주체는 삶을 통해 다양한 여러 객관들과 접속하고 소통한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변하지만 그를 둘러싼 다른 객관들도 변하고 진화한다. 여기서 주체가 변하고 학습하고 진화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학습자는 구조화하는 구조화된 구조structuring structured structure이다. 학습을 통해 주체도 변하고 객체도 변하며, 세상 전체가 변한다. 학습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객관과 객관의 관계이다. 그래서 간객관적이다. 학습은 이제 삶이 된다. ‘앎’은 단순히 학습자의 뇌나 신체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함’이 되고 ‘삶’이 된다.Learning is Doing is Being.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생태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상은 어제의 세상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도 나를 변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르침과 배움은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영역을 탐색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재귀적 과정이다. 교실은 재생산 또는 복제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하는 일이며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일에 가깝다. 이런 틀 안에서 교육이란 이미 존재하는 진리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개인 단위에서 지구 단위에 이른다. 교육은 그 의미에 진중히 참여하는 것이다.11)


2011~2019년 『오늘의 교육』 특집에서 언급된 키워드들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이 올해로 십년 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오늘의 교육》이 수행해온 것들은 한마디로 창간호부터 이어진 ‘한국 교육의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교육의 지속 가능/불가능 관점에서 ‘교육 불가능’이라는 시대 규정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원전폭발 참사와 함께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었다.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금, 나는 ‘코로나 시대’의 교육을 논함에 있어 ‘교육의 생태적 전환’ 담론이 한걸음 더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앎과 함과 삶의 일치 그리고 자기 생산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적 지혜를 교육과정에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학생자치와 학교민주주의, 교육자치와 교육과정분권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전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우리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교육공동체 벗과 《오늘의 교육》의 새로운 10년을 힘차게 준비해야 할 때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1) https://youtu.be/BvF8yG7G3mU


2)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School strike for climate): 정부, 화석연료 산업에 관여하는 기업 등을 대상으로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전 세계 청소년들의 결석 시위를 말한다.


3) 오르트빈 렌, 안냐 크나우스, 한스 카스텐 홀츠(2000). 지속 가능한 미래로의 길. 『아젠다 21』 생각의 나무.


4) 《오늘의 교육》 창간호 특집의 제목은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였다.


5) 윤상혁(2015). 전환을 위한 사유: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소고小考. 『오늘의 교육』 vol.26. ‘교육X’는 데카르트 - 방정식의 미지수에 x를 사용한 - 의 사유를 기반으로 한 근대교육을 상징하며 ‘~교육X’는 그것의 부정을 의미한다.


6) 움베르토 마투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2007). 『앎의 나무』 갈무리. 신승철(2017), 『구성주의와 자율성』(알렙)에서 재인용.


7) 신승철(2017). 『구성주의와 자율성』 알렙.


8) 브렌트 데이비스(2014). 구성주의를 넘어선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계보학. 씨아이알.


9) 프랙탈이란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말한다. 프랙탈 구조는 자연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복잡성 과학은 이제까지의 과학이 이해하지 못했던 불규칙적인 자연의 복잡성을 연구하여 그 안의 숨은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복잡성 과학을 대표하는 혼돈 이론에도 프랙탈로 표현될 수 있는 질서가 나타난다. 프랙탈의 4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재귀적 정교화recursive elaboration, ②척도독립성scale free, ③자기유사성self similarity, ④중첩내포성nestedness.


10) 브렌트 데이비스(2014). 앞의 책.


11) 브렌트 데이비스, 레베카 루스 케플러, 데니스 수마라(2017). 마음과 학습. 교육과학사.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생태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상은 어제의 세상과 다르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도 나를 변화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르침과 배움은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영역을 탐색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재귀적 과정이다.


* 이 글은 《오늘의 교육》2020년 5+6월호(vol.56)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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