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꽃미남의 도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친구 B와 나, 우리 둘 뿐이었다. 정장을 입은 멀대 같이 키 큰 사람들은 모두 비즈니스 차 다른 나라를 방문했다 입국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여러 나라를 입국해 봤지만 이렇게 여행자가 보이지 않는 공항은 또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가는 표를 사고 관광 안내소를 들렀는데, 영어를 무척 잘하는 직원들은 불친절했다.
"저기, 혹시 무료 지도는 없나요?"
"지도는 2유로인데 사든지 말든지"
"저렴한 교통 카드와 박물 패스가 있다고 들었는데..."
"암스테르담 교통 카드가 엄청 비싼 3일 패스와 덜 비싼 일일 패스가 있는데 사든지 말든지."
물론 직원이 실제로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관광의 도시 암스테르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식의 환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다.
친구와 나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거의 30분 만에 왜 이 곳에 왔을까 후회했다.
왜 암스테르담을 여행의 출발지로 삼았던가?
마약, 매춘이 합법인 암스테르담의 도시에서 마음껏 타락해보자!! 이런 것도 아니고 암스테르담에 온 가장 큰 이유는 고흐 미술관이었다.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거의 '고흐의 발자취 따라가기'에 가까웠던 터라 고흐의 고향이자 고흐의 작품이 가장 많은 암스테르담을 출발지로 삼았던 것이다.
암스테르담 중앙역까지 가는 기차 밖 풍경도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유럽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네모 반듯한 현대식 건물은 여기가 경기도 분당인지, 유럽인지 도통 모르겠고.....
암스테르담은 파리나 런던 로마, 또는 프라하처럼 인기 있는 관광지는 아니다. 유럽 여행 중 잠깐 잠깐 들러가는 정거장 정도지 단지 암스테르담만을 보기 위해 몇 박 며칠씩 휴가를 내고 간다는 사람도 아직은 못 본 것 같다. (있다면 죄송합니다...) 이 생각은 후에 180도 바뀌었지만, 중앙역에 도착해서 숙소를 찾아갈 때까지 침울해진 우리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보트 호텔이 있었다. 보트 호텔은 암스테르담의 독특한 숙박 형태로 부두에 정박된 배에서 실제로 자는 것이다. 배에서 보는 바다의 야경은 얼마나 멋질 것인가! 그러나 기대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와장창 깨졌다.
<암스테르담에서 2박 묵은 보트 호텔, 겉모습은 멋졌지만...>
우리의 숙소는 사실 겉만 보면 멋졌다. 그러나, 지하 선실에 있는 우리 방을 본 순간 우리는 절망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조그만 창문, 어두컴컴한 선실에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좁디좁은 침대 두 개가 ㄱ 자로 겹쳐 있었다. 바닥에는 캐리어 두 개를 펼칠 공간도 없었다.
'안네 프랑크가 숨어 살던 다락방도 여기보단 넓을 거야.'
(실제로 후에 찾아간 안네 프랑크가 살던 집은 숙소보다 더 넓고 쾌적해 보였다.)
애초에 우리를 유혹한 건 '아담한 사이즈의 배에서 낮밤으로 멋진 바다를 바라보며 잠들 수 있는 곳, 조식 메뉴가 훌륭한 곳, 호탕한 주인 아주머니가 친절한 곳'이라는 이라는 투숙자들의 후기였다. 물론 양쪽 창문으로 바다를 볼 수 있는 식당은 나쁘지 않았다. 호탕하고 친절한 주인 아주머니 대신 남편인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는 영어를 잘 하지 못 했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암스테르담 사람은 다 이렇게 불친절한가 봐.'
우리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밖으로 나와 길게 이어지는 운하를 따라 우리는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삿짐 트럭 주변에서 짐을 내리는 일꾼들이 서너 명 있었는데 청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를 입었을 따름인데도 마치 원빈, 강동원, 조인성이 이삿짐을 나르는 듯한 분위기가 났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운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청년들이 보였다. 모델들이 촬영을 위해 배를 타고 있는 듯한 그림이었다. 어느 새 B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의 흔한 뱃놀이하는 청년들>
운하를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이런 비슷한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다. 크기도 다양한 배를 탄 젊은 남녀가 한가롭게 앉아 마시고 먹고 노는 장면. 서울에서 친구들이 만나면 "야, 우리 오랜만에 모였는데 한 잔 하러 가자!"라고 하는 것처럼 암스테르담에서는 "헤이, 우리 오랜만에 모였는데 배나 타러 가자!"라고 하는 걸까. 그런데 유독 남자 비율이 높아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실제로 도시 곳곳에 남자들만 무리 지어 배를 타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장면이 유독 많이 보였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큰 키에 빼어난 미모를 갖춘 자들이었다. 네덜란드는 동성결혼이 허용되는 곳이고, 암스테르담 시내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은 유럽 게이들이 모이는 성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왜냐하면 잘 생긴 남자는 유부남이거나 게이이니까.
<암스테르담의 흔한 자전거 타는 청년들>
자전거가 사람보다 많아 보이는 도로에는 패션잡지에서 빠져나온 모델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나는 점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중앙역을 빠져나오는 키 크고 멋진 남성들을 보며 '여긴 모델의 도시인가?'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정말이었나 보다.
우리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약 한 시간 만에 이 도시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전폭 수정했다.
<암스테르담의 흔한 풍경>
**강물은 실제로 이렇게 파랗지 않습니다. 갈색에 가까운 황토색이지요.
다음 날,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환영은 하이네켄 공장에서도 이어졌다.
우리는 단지 맥주 공장을 구경하고, 맥주 시음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공장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다시 느껴야 했다.
"뭐야, 여기도 직원들 순 얼굴 보고 뽑은 거야?"
<잠시만요, 맥주에 김이 빠지면 안 돼죠, '잘생김'>
우리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장신의 (추정) 전직 모델들의 안내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맥주의 역사, 맥주 만드는 법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 멋진 팔근육을 자랑하며 맥주를 따르던 직원들만 머리(와 사진으로)에 남았다.
<당신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치얼스!>
우리는 시음으로 제공된 하이네켄 생맥주 두 잔 씩을 마시고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으며 공장을 나왔다. 아름다움에 취하고 맥주에 취하고~ 다시 한번 암스테르담에 오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이 아르다운 이유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나는 다시 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로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