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장로, 이요셉

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 3부

by 나라연

며칠 후, 등굣길 빌딩 밖을 나섰는데 진수가 앞에 서 있었다.

“진수야, 여기서 뭐 해?

진수는 나를 보자, 들뜬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오영아, 드디어 허락받았다.”

“나 거기 가도 된대?”

“응, 다음 주 화요일에 오래.”


마침내 ‘그 집’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긴 거였다.


진수가 이어 말했다.

“아, 그리고 그날 올 때 성경책 하나 챙겨 와.”

“성경책? 교회 가면 다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진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내가 말했잖아. 그 교회에 아무나 들이는 데 아니라고.

그래서 너를 같이 다니던 교회 친구라고 둘러댔거든.

그러니까… 모양이라도 좀 갖춰야지.”

“오, 너 좀 센스 있다. 잘했어. 그건 꼭 챙겨갈게.”

진수가 피식 웃었다.


“참, 우리 엄마가 모레 반찬 좀 싸주시겠대.”

“매번 미안해서 어떡하냐.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꼭 전해드려.”

“응.”

“낼모레, 점심도 우리집에서 김치라면 끓여 먹자.”

“나야 좋지, 네가 끓여준 김치라면이 제일 맛있더라.”

진수가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있잖아. 그러지 말고, 내가 내일 차라리 너네 집에 갈까?”

“우리 집엔 왜?”

“맨날 네가 무겁게 학교로 들고 오잖아. 이번엔 내가 직접 반찬 가지러 갈게.”

“그럼 그럴래. 내가 엄마한테 내일 미리 반찬을 싸놓라고 말해놓을게.”

“그래. 고마워.”

“야. 그래도 낼모레 점심엔 너 자취방에서 김치라면 먹는 거다.”

“알았어, 인마. 내가 끝내주게 맛있게 끓여줄게.”

“오케이.”

진수가 씩 웃었다.



다음 날, 보급소 올라가는 길에 미용실에 들러 하나에게 교회에 가는 날짜가 잡혔다고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돌아오는 화요일 저녁 일곱 시 반, 하나네 집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신문배달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진수네 집으로 향했다.

진수네 집은 서정동 주공아파트 6단지 105동 606호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왔어.”

진수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집안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겼다.


“어머니는 안 계셔?”

“오늘은 야간 근무야. 가까운 방직공장에 다니시거든.”

“아, 그렇구나.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인사 대신 전할게.”

“응, 그럼 너네 아버지는 언제쯤 오셔?”

“아버지는 오늘 회사 일이 바빠서 밤늦게 오신다고 했어.”


주방 식탁 위에는 반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거 네가 차린 거야?”

“아니, 엄마가 너 온다고 하니까. 출근 전에 차려놓고 가셨어.”

“와, 진짜 맛있겠다.”

"배고프지? 어서 앉아 밥 먹자."


식탁 위에는 노랗게 윤이 도는 콩나물무침, 가지런히 말린 계란말이, 볶은 멸치와 윤기 도는 비에나 소시지볶음, 열무김치, 구운 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엔 뚜껑이 닫혀있는 뚝배기가 올려져 있었다.

진수가 밥을 두 그릇을 퍼서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난 자리에 앉아 뚝배기 뚜껑을 열었다.

돼지고기와 두부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이었다.

붉은 국물 위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군침을 돌게 했다.


한 숟갈 뜨는 순간, 오랜만에 ‘집밥’의 맛이 입안에 번졌다.

그 익숙한 온기 속에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이렇게 맛있는 밥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려주던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 마음을 찔렀다.


진수가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마시며 말했다.

“야, 설거지는 놔둬. 이따 내가 할 테니.”

“아냐. 이번엔 내가 설거지할게.”


나는 빈 그릇을 개수대 물에 담그고 퐁퐁을 수세미에 짰다.
진수 어머니가 해준 저녁밥에 대한 고마움을, 그나마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진수 방으로 들어갔다.

방 문을 열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와… 이게 다 뭐냐.”


사방 벽은 물론, 천장까지 온통 이선희 포스터로 뒤덮여 있었다.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 콘서트 기사까지 빼곡했다.

진수가 이선희 팬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했다.

잠시 후, 진수가 쌕쌕과 봉봉, 치토스 한 봉지를 쟁반에 담아 들고 들어왔다.


“야, 이건 거의 광신도 수준인데?”
“나한텐 이선희 누나가 수호천사야.”

진수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진수가 바닥에 쟁반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카세트 플레이어를 켰다.

그리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테이프가 돌아가며 이선희 노래가 흘러나왔다.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댈 그리워하네…♪


진수는 노래를 소리 내어 따라 부르진 않았지만, 입술이 가만히 움직였다.

나도 가만히 노래를 들으며, 과자와 음료수를 먹었다.


노래가 끝나자 진수가 카세트 플레이어 스톱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이 노래 들으면 꼭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아.”
“뭐? 설마 J가 너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럼 나지. 나 말고 누가 있겠냐.”
“칫, 그래, 착각은 자유니까.”
진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피식 웃었다.


진수가 물었다.

“넌 누구 좋아해? 가수.”

“지금은 누가 뭐래도 서태지와 아이들이지.”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는 지금 울잖아요.”

진수가 갑자기 '난 알아요' 후렴을 불렀다.

“오영아. 이 노래가사, 너무 찌질하지 않냐?”

“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 하하하”

진수도 따라 웃었다.


잠시 웃던 분위기 속에서 내가 슬쩍 물었다.
“진수야, 너네 교회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야?”

진수가 내 얼굴을 잠깐 봤다.
“원래 이전에 우리 교회 장로님이었어.”
“장로면 나이 되게 많은거 아냐?”
“아니, 마흔 중후반쯤.”
“생각보다 젊네. 그럼 교회를 오래다녔네 보네?”
“아냐. 작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셨거든. 그런데 오자마자 장로가 됐어.”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장로는 교회에 오래 다닌 신도가 되는 거 아닌가?”

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말들이 좀 있었어. 겉으론 조용했지만, 뒤에선 다들 수군거렸지.”
“무슨 말?”


진수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그분이 지방에 가지고 있던 과수원이랑 농지, 집까지…
전 재산을 전부 교회에 헌납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 덕분에 장로가 된 게 아니냐고.”

난 그말에 놀라 말했다.

“뭐? 재산을 전부…?”

“응. 왜?"

"아냐 계속 말해봐."


진수가 말을 이었다.

"근데 또 어떤 사람들 말로는, 그분이 2년 전에도 대 여섯 번 정도 우리 교회에 나왔었다고 하더라고.”

“2년 전....”
“응. 근데 나는 전혀 본 기억이 없거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몰라. 그냥 그런 얘기가 돌았었어.”


진수 얘기를 들으니, 머릿속에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시점과 내용이 어딘가 너무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진수야. 혹시 목사님 이름은 뭐야?”
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이름은 왜?”
“목사님 이름 정도는 알아두는 게 낫잖아.”
“하긴, 이요셉이야.”
“이요셉? 그거 가명 아니야?”
“실제 이름인진 나도 몰라. 우리 교회에 처음 왔을 때부터 다 그렇게 불렀으니까. ‘이요셉 장로님.’”


진수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야, 근데 너 왜 이렇게 우리 목사님한테 관심 많냐?”

난 팔짱을 풀며 말했다.
“관심이 아니라 궁금할 뿐이야.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나도 그분이 전하는 말씀을 믿을 수 있을 거 아냐. 너, 다른 사람 말만 듣고서 덮어놓고 믿고 따르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긴, 그건 맞다.”
“이그, 인마.”

난 진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수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십 대 중후반 나이, 2년 전 처음 교회에 발을 들였고, 작년부터 교회에 나왔고, 지방에 있던 땅과 집,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이요셉.

그의 얼굴을 빨리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진수가 물었다.
“참, 너네 아버지 소식은 아직 없지?”
“응, 여전히.”
“야, 신고한 지가 언젠데. 경찰은 뭐 하냐.”
“글쎄 말이야. 진짜 UFO가 납치해 간 거 아닐까 싶다.”
“야,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농담이야.”
진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진짜 꼭 다시 연락 닿았으면 좋겠다.”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진수가 카세트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를 가져와 끼워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세상은 YO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진수와 나는 '환상 속의 그대'를 목청 껏 따라 불렀다.




신문배달을 마친 뒤, 나는 하나슈퍼 평상에 앉아 쥐색 정장남을 기다렸다.
지난주엔 경황이 없어 아무것도 묻지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빨간 대문집에 드나드는 이유를 직접 들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섯 시가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슈퍼 안에는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조금 있다 어떤 남자가 이 신문 찾으러 올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신문을 맡긴 뒤 서둘러 보급소로 향했다.


보급소에 자전거를 올려다 놓고 근처 구멍가게에서 야채빵과 딸기우유를 사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하나슈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퇴근길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가 하나슈퍼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은 일곱 시 십 분.
함께 내린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은 모두 골목 쪽으로 향했다.
그 골목 끝엔, 빨간 대문집이 있었다.


난 잠시 슈퍼에 들러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그 남자, 신문 찾아갔나요?”
“응, 삼십 분 전에 어떤 젊은 남자가 와서 가져갔어.”

나는 슈퍼를 나와 하나네 집으로 향했다.


저 멀리 조금 전 버스에서 내렸던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빨간 대문집 앞에서 멈춰 서더니, 차례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집 대문 앞을 지나 하나네 집 앞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 십 분 전이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조용한 골목에선 그 소리마저 묘하게 부풀려졌다.


잠시 후, 하나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흰 티셔츠 위에 흰색 후드티, 청바지, 오른쪽 어깨에 백팩을 메고, 흰 모자를 쓴 차림이었다.
가로등에 비친 얼굴은 화장기가 하나 없어보였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더 어려 보였다.

동갑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였다.

나는 하나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다.

“와!”
나도 모르게 순간, 짧은 감탄사가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러자 하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뭘 그리 놀라?”
“안녕하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치, 싱겁긴.”
“그건 챙겨 왔어요?”
“응.”
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천천히 빨간 대문집 쪽으로 걸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림이 점점 뚜렷하게 들려왔다.
대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거실 유리창 너머로 희미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오갔다.


때마침,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진수가 나왔다.

난 손가락으로 대문 틈을 가리켰다.

“저기 나오는 애 보여요?”
“어디?”
“저기요, 저 애.”
“아, 쟤.”
“네, 쟤가 진수예요.”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서 진수를 기다렸다.

잠시 후, 진수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나를 보더니 잠시 시선을 멈췄다가, 이내 하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누구야, 이 사람은?”

“아, 인사해. 내 친구 하나야.”

하나가 나를 슬쩍 흘겨보더니, 곧 미소를 지으며 진수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진수야 안녕. 난 하나라고 해.”
“어.... 안녕. 반가워.”

진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진수는 곧 내 팔을 잡아당겨 대문 옆으로 데려갔다.

진수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누굴 데려온다는 얘긴 없었잖아.”
“그게... 이곳 얘기를 했더니 같이 가보고 싶다고 고집부려서 어쩔 수 없었어.”
진수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아무나 데려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나, 너 한 명만 데려오겠다고 했단 말이야.”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근데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 그냥 돌려보낼 순 없잖아.”


진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잠깐만. 나 안에 들어갔다 올게.”


진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친구? 졸지에 학생을 만들어 버리네.”
“미안해요. 둘러댄다는 게 그만…”
“괜찮아. 뭐, 어딜 가도 학생으로 보긴 하더라.”
“제가 그랬잖아요. 처음 봤을 때 제 또래인 줄 알았다고.”
“그래도, 아까 그 친구 표정 좀 봐. 정말 긴장했던데?”
"오늘 나 혼자만 오기로 돼있거든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잠시 후, 진수가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열고 손짓했다.
“들어와.”


하나와 나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빨간 대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장편소설 '스페셜 미드나잇'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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