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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EGGIE Dec 09. 2022

화가의 아침 루틴

아침에 카페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펜으로 마음의 흐름을 표현하는 방법

 지난여름 아침 5시에 일어나 집 앞 카페에서 78장의 드로잉을 했다. 봄에 한국을 다녀온 뒤 시차 적응에 실패하여 아침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새벽 5시만 되면 잠에서 깼다. 한두 달 정도 일찍 일어났는데, 눈이 떠지면 의도적으로 벌떡 일어나 세수했다. 렌즈를 끼고 로션과 선크림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잠에서 깼다. 작은 에코백에 손바닥만 한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를 챙겨 집을 나섰다.   

 

 집에서 3분 남짓 걸으면 미시간주의 앤아버Ann Arbor 다운타운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로컬 카페가 있었다. 그 카페는 아티스트와 함께 카페 로고를 만들고 브랜딩을 했다. 게다가 내부 전체가 거친 선과 물감이 두텁게 발린 알록달록한 아티스트의 그림으로 전시 중이었다. 그야말로 한 명의 아티스트가 카페를 작품처럼 표현한 공간이었다. 커피는 맛있었지만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이 보이면 나는 정서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색이 진하고 대비가 강한 작품들은 잔상이 남아 마음을 어지럽혔다. 카페 안에서의 시각적 자극을 최대한 피하려고 야외의 작은 테이블로 나와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카페인에 취약한 공복의 위장에 빠르게 흡수되었고, 아침의 느려진 심장을 운동시켰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 가로수 그늘에 최대한 몸을 꾸겨 넣고 앉아 드로잉을 시작했다.


 ‘젤리 롤 문라이트 06’이라는 달빛처럼 옅은 회색 펜으로 손바닥만 한 얇은 종이에 드로잉을 했다. ‘젤리 롤 문라이트 06’은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1.30달러짜리 젤 펜이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는 앤아버에 위치한 캐리타운kerry town의 마켓에서 10달러 남짓 주고 구매한 메모장이었다. 혹시 그림을 망치면 어쩌나 고민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려내기에 적당했다.    

메모장과 ‘젤리 롤 문라이트 06’

 여름 아침 시원한 바람과 자그마한 새들의 가벼운 목소리는 내가 즉흥적인 스케치를 하는 데 도움을 줬다. 머리 위로 새들이 사방팔방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소리에 맞춰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새들이 대화하듯 내뱉는 리듬에 따라 종이를 가르는 선이 그어졌다. 한두 마리 새들이 지저귈 때는 모나지 않은 유기적인 모양이 듬성듬성 그려져 여백이 많았다. 여러 새들이 합창하면 종이 위에 면, 선 그리고 점까지 모두 등장했다. 그 모두가 합쳐져 하나의 도형을 만들어 냈다. 맞닿은 선들로 뾰족한 산이 생기기도 했고, 동그란 면들이 합쳐져 물결을 이루기도 했다. 까맣게 칠해져 흩뿌려진 점들은 돌이 되기도 하고 별이 되기도 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그림이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희미하게 각자의 의미가 생겼다.


 “자연현상을 예술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예술가, 그리고 그의 내면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원하며, 또 표현해야만 하는 창조자는 이와 같은 목표들이 오늘날의 비물질적인 예술-음악-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고 용이하게 달성되는가를 선망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열화당, 권영필 옮김, 2021. P44-45


 ‘현대 추상화의 창시자’라는 별명을 가진 칸딘스키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는 간단한 도형을 리듬감 있게 배치해 율동감을 줬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을 그림으로 그려낸 작가이며 콘서트를 다녀온 뒤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림은 시각을 통해 관찰 가능한 대상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다른 감각을 활용해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다.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그림을 위한 시도였다.    


 나는 카페에 앉아 미국 다운타운의 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언어가 없는 불규칙한 패턴의 소리가 주는 편안함이 오히려 나의 머릿속을 자극했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칸딘스키의 작품은 리듬이 느껴지고 색채가 다채롭다. 칸딘스키는 화려한 색과 기하학적 무늬로 클래식 음악의 웅장한 소리를 그렸다. 나는 아침 카페의 고요하고 수수한 소리를 얇고 가녀린 선으로 표현했다. 단단하고 응축된 물성으로 가득한 세상엔 부드럽고 연약한 선의 역할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드로잉은 페인팅의 영감이 되었다. 드로잉 속 작은 도형을 활용해 커다란 페인팅 전체를 채우기도 했다. 젤 펜으로 종이에 끄적이듯 그린 드로잉은 내 작품의 시작점이 되었다. 재료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물감 148mL(물감 튜브 하나의 양)와 잉크 0.1g의 가치는 동등했다.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새소리를 들으며 드로잉 하는 일은 나의 루틴이 되었다. 카페에 머무르며 새소리 아래 앉아, 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처럼, 종이와 나 사이의 대화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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