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세이가주 Feb 05. 2023

나만의 방이 있나요

자기만의 방

   

남편과 딸이 함께 외출했던 어느 주말, 거실에 있는 책장의 책들을 다 꺼내 먼지를 털고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작은 책장 하나였지만 책을 빼고 넣고 하다 보니 다른 방에 있는 책장도 신경이 쓰였다. 한꺼번에 다 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다 꺼내 보니 어마어마했다. 아이들 아가 때부터 본 그림책, 물려받은 전집, 월간지, 문제집, 내 책들. 더는 보지 않는 책들은 알라딘에 중고 책으로 팔고, 버리기 아까운 책들은 한쪽에 분류해서 꽂아두었다. 손목이 시큰시큰해지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아. 괜히 시작해서 이 고생이야.’


후회했으나 이미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내 책들만 따로 골라두고 이참에 내 전용 책장을 만들기로 했다. 책장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내 공간에 대한 로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내 책장이랑 내 책상도 두고 내 전용 공간을 만들자.’


갑자기 무슨 힘이 솟았는지 거실에 있던 제일 크고 튼튼한 책장을 혼자 낑낑대고 옮겼다. 아이들 방 사이 작은 공간이 제격일 것 같았다. 비록 화장실 바로 앞이긴 했지만.

내친김에 책장 앞에 책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아들 방 한구석에 있던 작은 책상을 꺼내 반들반들하게 닦았다.


‘진작 이렇게 꾸며 둘 걸.’     


 그때까지는 부엌 식탁 위가 내 공간이었다. 가족들이 다 나가고 간 아침, 식탁 위를 정리하고 내 살림을 가져다 놓았다. 책 몇 권과 노트북, 볼펜과 노트 그리고 커피 한잔까지. 딸 책상보다는 꽤 넓어서 이리저리 책을 펴놓고 잔뜩 어지러도 괜찮았다. 가족들이 들어올 시간이면 다시 깨끗하게 비워둬야 했지만. 거실 한쪽에라도 내 공간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맨날 생각만 했다. 그동안 멋진 서재가 생기기만을 상상했었나보다. 사실 내 책상과 책장만 있으면 다른 건 당장 필요 없었는데도 말이다.


책상까지 가져다 놓으니 그럴듯한 서재가 완성되었다. 한쪽 벽에는 예전에 사 두었던 꽃 그림 액자를 걸어 두고, 책장 옆에는 작은 화분을 옮겨다 놓았다. 안 쓰던 식탁 의자를 가져다 두고 푹신하게 예쁜 러그도 깔아놓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마음에 드는 조명 스탠드도 주문했다. 내 공간의 완성이었다.


“여기는 이제 엄마 방이야. 엄마가 여기 앉아 있을 때는 엄마 방해하지 마!”


엄마의 공간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하니 책상에 앉아 보기도 하고 책장에 무슨 책이 꽂혀있나 보기도 했다. 아들은 내 책상 앞에 자기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도토리 책상이네!”



책상이 작고 앙증맞아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내 책상을 도토리 책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각자의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내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책장 한 칸이었지만 아이들의 책이 아니라 내 책들만 꽂혀있어서 더 좋았다. 책상에 앉아 오른쪽에 있는 넓은 창으로 밖을 보면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으면 깜깜한 하늘에 동이 트며 붉은빛이 번지는 광경을 감상했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와 있으면 어둡고 적막한 산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혼자 고요함을 즐기는 시간. 내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이었다.


나만의 방은 낮에는 오로지 ‘나’만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내 공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이들 방 사이에 있는 곳이라 들락날락하는 아이들이 언제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수시로 보고 말을 걸었다. 엄마 책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럴수록 나와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 모두가 잠들어있는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만이 ‘진정한 나만의 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부엌을 다 정리해놓으면 바로 따뜻한 차 한잔을 가지고 내 책상으로 달려갔다. 온종일 왔다 갔다 하며 잠깐 엉덩이만 붙였던 내 자리는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 온전한 나의 자리가 되었다. 내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나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 삶을 계획하고 앞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 나만의 방에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꿈을 꾸어도 좋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에는 여성들이 글을 쓰거나 돈을 벌기가 더 힘들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경제권은 남성들만 가지고 있었고 여성들은 가사에만 전념하며 ‘자기 생각’을 갖는 시간과 공간이 부족했다. 자유롭게 여행하며, 책을 읽고, 성찰하며, 공상에 잠기고, 깊이 사색하기 위해 충분한 돈과 공간을 소유하라고 울프는 말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꼭 경제력을 갖추고 홀로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살 수 있는 돈과 나만의 방! 나는 나만의 돈과 공간을 꿈꾼다.


내 공간이라 이름 붙어진 곳에서 나는 당당한 내가 될 준비를 한다. 내 목표를 향해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차곡차곡 쌓여 나가는 곳, 그곳은 나의 조그마한 세계이다. 책에 둘러싸여 있는 방, 넓직한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한다. 햇볕이 잘 드는 넓은 창과 창 밖엔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 한 그루도 있으면 좋겠다.     


어떤 글을 쓸까, 어떤 책을 읽을까 혼자 있을 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골라 형광펜으로 그어두고 짧은 메모도 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그리고 공간. 혼자 멍때리며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에 눈물도 흘리고, 지난 시간 생각하며 후회도 하고, 앞으로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혼자 있는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자기만의방

작가의 이전글 프리웨이를 타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