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백만 원만 해줘. 돈이 너무 없어 힘들어. 살기가 실타ㅠㅠ. 부탁하께.“
아침 8시, 엄마의 카톡은 구구절절했고, 오타 투성이었다. 쪼들려서 못 살겠다고 울먹이던 엄마에게 백만 원을 이체한 지 세 달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모른 척하고 싶었던, 그러나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의심을 확인해야 할 순간이었다. 8년 전, 엄마 빚을 갚아줄 때 예상하지 않았나. 엄마가 또 빚을 질 거라는 걸.
“엄마, 솔직히 말해요. 또 빚졌죠?”
“아니야. 죽어도 아니야. 내가 또 빚졌으면 집에서 떨어져 죽고 말지.”
“진짜 아니야? 그럼 내가 다 확인해 봐도 돼?”
“그럼. 나는 진짜 당당해. 다 확인해 봐.”
엄마의 당당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면서도, 또 속아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덮쳐왔다. 8년 전, 처음 엄마의 빚을 알았을 때도 절대 아니라며 잡아떼지 않았나. 그 거짓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그 달콤함과 손을 잡았고, 대가는 가혹했다. 엄마 말을 믿는 사이 연 이자 18%의 사채는 무섭게 불어났었다.
‘엄마 말을 믿어선 안 돼.’ 마음을 다잡으며 인터넷에 “채무 조회“를 검색했다. 많은 사이트 중에 정부 24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개인 채무정보 조회를 골랐다. 정부에서 하는 것이니 공신력이 있겠지. 떨리는 심정으로 엄마에게 받은 핸드폰 인증번호를 입력했다.
“채무 정보가 없습니다.”
진짜 없구나. 맥이 탁 풀렸다. 긴장이 풀리자 눈물이 났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진짜 없네.” 엄마에게 전화를 거니 엄마 목소리는 드높아진다. “거봐, 내가 뭐랬어.” 이렇게 자기 정보를 다 깔 만큼 당당한 거면 정말 없는 거겠지. 없는 거면 좋겠다. 없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엄마, 한 군데만 더 해볼게.”
8년 전, 엄마가 빚을 진 걸 처음 알았을 때 채무를 검색했던 한국신용정보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엄마는 자신감이 붙은 듯 순순하게 인증번호를 불러줬다.
“개인채무정보 111,455천 원“
1억 1천만 원. 믿을 수 없어 천만 원이 아닌지 한참을 세어봤다. 최악의 경우 빚이 4천만 원 되리라 예상했던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난 8년간 엄마의 안색을 살피며 언제 빚 문제가 터질까 홀로 마음 졸이던 시간의 종착을 드디어 맞이한 것이다. 이제 실체 없는 빚에 쫓기며 불안해 하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실체 있는 빚과 싸워야 할 시간이 왔다. 오랜 시간 각오하고 두려워해 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1억이라니. 내 최악의 상상의 두 배가 넘는 돈이다. 운영하던 작은 호프집을 접고 은퇴 4년 차에 접어든, 돈 쓸 데라고는 주민센터 노래교실 회비와 친구들과 사 먹는 커피값, 밥값이 전부인 엄마가 1억을 어디다 썼단 말인가.
“엄마, 조회해 봤는데 빚이 1억이래.”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어. 잘 본 거 맞아?”
“응, 내가 몇 번 확인했어. 정말 아니야?”
“아니지.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 다시 한번 잘 봐봐.”
“정말 아니야? 엄마 이거 보이스피싱 당한 거 아니야? 당장 신고부터 해야지.”
빚이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싶지 않았던 난 마지막 발악을 했다. 엄마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거다. 아무리 사고뭉치 빚쟁이 엄마였지만, 1억이 말이 되나. 8년 전에도 가게 월세나 물품 대금을 내느라 소액 사채 대출을 돌려 막다 4천만 원가량 빚 진 게 다였다. 1억은 말이 안 됐다. 경찰서에 당장 전화해 신고해야 한다며 흥분하는 내게 엄마는 “그럴 리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엄마는 뭐가 그럴 리 없다는 걸까. 빚을 진 적이 없다는 걸까, 빚을 잘 숨겼는데 나올 리가 없다는 걸까. 아니면 보이스피싱을 당한 적이 없다는 걸까. 무엇이든, 모니터 화면에 뜬 숫자는 선명히 알려줬다. 이것이 절망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