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밤 Oct 20. 2023

할아버지의 자전거

59년생 아빠는 나이가 들며 점점 말이 많아진다. 며칠 전, 마트에서 보리를 고르던 아빠가 말했다.

- 나는 어릴 때부터 보리밥을 그렇게 좋아했어. 다섯 살 땐가. 엄마만 보면 “검은 밥 해줘, 검은 밥 해줘” 이랬대.

- 그 시대에는 보리밥이 기본 아니야? 아빠 그럼 쌀밥 먹었어? 아빠 부자였구나!

나의 감탄에 엄마가 말을 덧붙인다.

- 영순이 언니도 만날 때마다 너네 남편집이 제일가는 부자였다고 말해.

- 뭐야. 그럼 아빠 도련님이었어?

농사를 지어 손톱 밑이 맨날 검고, 수염도 깎지 않아 도사님처럼 지저분하고, 바지에는 늘 담배 구멍이 뚫려 있는 아빠가 도련님이었다니! 내가 감탄하는데 동생이 김을 뺀다.

- 그럼 뭐 해. 유산 한 푼 안 받았는데. 아빠 왜 그랬어?

동생 질문에 아빠가 허허 웃는다. 아빠는 중학교 가기 전부터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모두 스무 살도 더 많은 첫째 형 때문. 도박, 술, 사치. 스무 살이 넘어서도 돈 벌기는커녕 갖다 쓰기 바쁜 형이 집안을 말아먹었다고. 나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만났던 큰 아빠를 떠올렸다. 이불에 누워 가래침을 뱉던 사람.

첫째 부인이 죽자 할아버지는 스무 살 어린 할머니와 재혼했다고 한다. 큰 형보다 두 살이 어렸던 아빠의 엄마.

- 그때 아버지가 미친 거지. 그렇게 미쳐서 내가 나온 거야. 너도 나오고.

- 나는 왜 끌어들여?

할아버지의 재혼 비결은 예의바름이었다.

-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늘 자전거 타고 다녔는데, 다른 놈들은 다 자전거 탄 채로 인사를 했는데, 할아버지만 볼 때마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인사를 했다는 거야. 그래서 그 어른이 할아버지한테 딸을 준 거야. 그때는 다 그랬어. 아버지가 돈을 받고 딸을 내다 팔든 어쨌든 시집가라면 가는 거야.

딸을 줬다는 아빠의 말에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큰집에 가면 5:5 가르마로 가지런히 머리를 빗겨 넘긴 할머니 사진이 있었다. 고혈압이 아니라 스트레스에 돌아가셨을 거란 아빠의 말에 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나였어도 자식 열을 키우고는 오래 못 살았을 거 같다.

할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는데, 종종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바퀴가 크고 뒤에는 초록색 보조석이 있던 자전거였다. 열 살도 안 된 때였는데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의 모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보리밥 좋아하는 도련님이었던 아빠가 태어난 이유가 그 자전거에 있었다니.

작가의 이전글 다음에는 제가 다치게 해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