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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ry Taewoong Um Feb 03. 2022

소공녀

당신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요?

2022년 설날 아침, 세상에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풍경을 보면, 늘 눈이 소복히 덮여있던 캐나다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눈이 오는 날이면, 4년전,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슬픔을 함께했던 뮤직비디오가 생각난다. 자이언티와 이문세가 부른 "눈"이다. 


눈 - 자이언티 (feat. 이문세)


특히 뮤직비디오에 나온 안재홍의 눈빛울 잊을 수 없다.

이 술을 마시면 떠나갔던 행복을 환각에서라도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이 밤이 지나면 그토록 우리가 기다렸던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모든 순간이 지나가고, 모든 타이밍이 어긋났지만, 이렇게 폐인이 되어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한다면, 내게 하룻밤이라도 행복했던 기억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건가요.


어제도 소복히 쌓인 눈을 보며 자이언티의 "눈" 뮤직비디오를 보았고, 그러다가 이 뮤직비디오가 영화 "소공녀"와 이어지는 이야기(=Sequel)란 것을 알게되었다. 영화 "소공녀"에도 안재홍이 주인공 이솜의 남자친구로 나오는데, 똑같은 옷을 입고 이솜과 아기자기한 사랑을 나눴으며, 이 뮤직비디오는 몇년 후 그들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MV "눈"의 감독 이요섭은 영화 "소공녀"의 감독 전고은의 남편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영화 "소공녀"를 안볼 수가 없었다. 참고로 2018년에 나온 영화 "소공녀"는 영화배우 이솜의 인생작이라 할 수 있는 영화로 그 해 각종 신임감독상과 독립영화상을 휩쓸었으며, 이동진 평론가는 2018년에 나온 베스트 무비 5위로 꼽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


(이하 스포 있음)





쌓아둔 돈 없이 하루하루를 가사도우미로 번 돈 45000원으로 해결하는 주인공 미소(=이솜). 하지만 그녀에게 포기할 수 없는 세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남자친구 한솔(=안재홍)과 에세 담배, 그리고 위스키바에서 마시는 글렌피딕 한잔이었다. 이 세가지만 있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고 행복할 수 있던 그녀, 하지만 그녀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새해들어 갑자기 담배값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된 것이다. 게다가 난방도 안드는 추운 셋방의 월셋값도 올라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게다가 그녀는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희귀병이 있어 매일 약값까지 드는 상황이다. 모든 물가가 올라버린 주인공 미소의 위기, 여기서 미소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도 1) 45000원보다 더 많은 일당을 벌기위해 애쓰거나, 2) 그녀의 형편엔 걸맞지 않은 12000원짜리 한잔의 사치,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리고 새해를 맞아 건강도 생각할 겸 3) 담배를 끊는다면 가난한 그녀도 어찌저찌 살아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과감한 선택을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위스키와 담배를 버릴 순 없지... 그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행복이니까.
그래, 방을 빼자.


그렇게 방을 빼기로 한 그녀는 대학 시절 함께 밴드를 하며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하룻밤을 구걸하게 된다.





모두가 버젓한 집을 가지고 사는 친구들. 하지만 그들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고있을까? 감독은 밴드 멤버 다섯명의 다른 모습의 삶을 보여주며 정작 "집"은 가졌지만 가장 필요한 내 인생 행복의 "핵심"은 놓치고 사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버젓한 대기업에 다니지만 쉬는시간마다 틈틈이 스스로 링겔을 꽂으며 몸과 연봉을 바꿔야 했던 최문영.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 시부모를 모시고 살며 살림살이 하는 기계로 살아가는 친구 정현정.


8개월 전 결혼을 해 깨끗한 신혼집 아파트에서 잘 살고만 있는 줄 알았던 동생 한대용은 결혼 얼마 후 이혼을 하고 술과 눈물로 폐인처럼 살고있단 사실을 알게된다. 특히 대용은 "한달에 월세가 190만원인데, 매달 100만원씩 20년을 갚아야 이 아파트가 내 것이 된대. 그 때가 되면 이 아파트는 헌 아파트가 되어있겠지. 여긴 내겐 감옥이야"라며 "좋은 집"에 인생을 내주고 노예가 되어버린 '하우스푸어'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노총각 김록이는 아들의 며느리를 구하겠단 예비시부모님(?)의 광적인 집착에 마주쳐 하룻밤만에 탈출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찾은 최정미.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 그녀는 흔쾌히 아랫층을 미소에게 내준다. 부잣집에 공짜로 살게되며 조금씩 안정된 삶을 찾아가는 미소. 하지만 그녀는 묘한 불편감을 느낀다. 

미소 :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안좋기도 해"
한솔 : "좋은데, 편하게 있으면 좋은거지"
미소 : "아니야, 기분이 안좋다는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 같은거야"


역시나 정미의 삶도 행복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뜨거웠던 과거를 감추고 부잣집 며느리로 살아가던 정미. 하지만 미소에 의해 자신의 옛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자 그녀는 그동안 감춰왔던 자신의 불안함을 그대로 노출하며 미소에게 모진 말을 던진다.

정미 : "요즘 담뱃값이 많이 올랐다는데, 집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으면 나같으면 독하게 끊었겠다"
미소 : "알잖아. 나 술담배 사랑하는거"
정미 : "아이고.. 그 사랑 참 염치 없다... 솔직히 말할게. 난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네가 제일 좋아하는게 술담배라는 것도 진짜 한심하고, 그것 때문에 집도 하나 못구해서 우리집에 지내면서 그런 것까지 다 이해해주길 바라는 네가 뭔가 좀 잘못됐다는 생각 안드니?"


그리고 사랑하는 한솔이마저 웹툰작가의 꿈을 접고 돈을 모으기 위해 2년간 사우디아라비아로 발령을 가게 되었다며 그녀에게 이해를 구한다.

한솔 : "(웹툰작가 도전은) 해볼만큼 해본 것 같아서, 이젠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미소 : "사람답게 사는게 뭔데?" 
한솔 : "알잖아. 남들 다 하고 사는 것들 우리도 해보고 싶어서.."
미소 : "난 이대로가 좋은데..."
한솔 : "6개월에 한번씩은 한국 보내준대"
미소 : "나는...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한솔이 너, 그게 내 유일한 안식처야. 너도 알잖아. 근데 네가 없으면 어떡하라고..?"
한솔 : "나도 그런거 알잖아. 근데 거기가면 생명수당 붙어서 월급 3배로 준대. 그래서 계산해보잖아? 그럼 2년동안 5천만원이 모이겠더라고. 그걸로 대출금 다 갚고, 너랑 살 집 구할거야"
미소 : "... 배신자 ..."


보일러 땔 돈이 없어 추운 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내고, 남들 다하는 제대로 된 맛집 데이트 한번 못해 미안했던 남자친구 한솔이가 배고픈 웹툰작가 지망생을 그만두고 사우디로 넘어가 5천만원을 벌어오겠다는 말, 그래서 학자금 대출도 갚고 미소와 함께 살 집도 구해 남들 다하는 버젓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말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스윗하고 책임감 넘치는 말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미소에게 그 말은 "배신"이었다. 왜냐하면 미소가 원한 것은 따뜻한 집이나 근사한 맛집 데이트가 아니라 매일마다 마시는 한잔의 위스키와 한모금의 담배, 그리고 내 곁에 있어주는 한솔이었기 때문이다. 위스키와 담배를 지키기 위해 방까지 뺐던 미소였다. 그런 그녀에게 '미래의 안정'을 위해 '미소와의 만남'을 포기헀다는 한솔의 우선순위는 말 그대로 "배신"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시간, 돈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꼭 영화처럼 '하루 45000원의 씀씀이를 분배하는 문제'로 귀결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시시각각 우리는 원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잣대들로 이미 많이 잠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경쟁에서 이겨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 그래서 모두가 가고싶은 대학에 입학해 좋은 성적을 받아 남들이 모두 알아주는 직장에 가는 것, 그래서 높은 연봉을 받고 모두가 부러워 할만한 멋진 배우자를 만나 그럴듯한 집에서 그럴싸한 삶을 살아가는 것...


하지만 영화 속 친구들의 삶에서 엿보았듯, 그렇게 세상이 원하는 것을 맞춰주다가 정작 내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삶을 살고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직장을 다니고, 비싼 아파트를 가지고, 부자인 배우자를 만난다한들, 과연 친구들은 여전 함께 담배 한모금을 빨았던 사진 속 우리들의 모습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많은 것들이 더해졌지만, 과연 우리의 삶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자면, 나는 '오늘의 행복만이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YOLO 맹신자 또는 소확행 맹신자는 아니다. 나는 '미래의 일 따위는 안중요하고, 오늘의 술과 담배 한모금이 주는 행복이 중요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의 우선순위는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미소의 입장에서도 경제적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쉬운 선택은 '45000원보다 더 버는 것'일테고, 그 다음은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술과 담배'가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면, 사람들의 말처럼 돈을 더 벌고, 술과 담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집을 없애는 것'는 것과 같은 용기있는 선택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당신은 (미소처럼) 잠잘 곳은 포기해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사회적 관념에 따라 더 벌고 더 성공하는 것에만 기계적으로 에너지를 쏟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지켜야만 하는 무언가를 모르며 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사랑하는 삶이 꼭 사회적인 시선에서 성공적이고 더 유리한 삶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해 EPFL에서 박사를 받은 가수 루시드폴에게 더 "상식적인" 선택은 박사 관련된 일을 하는 선택일 것이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너의 가창력은 평범해. 세상에 노래 잘부르는 가수가 너무 많아. 박사까지 했는데 전업 가수를 한다는건 너무 낭만에 빠진 선택 아니겠니?'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해도 루시드폴은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이 좋았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감귤농사 지으며 노래 부르는 삶을 선택했고, 오히려 이런 선택이 더 루시드폴의 삶을 그 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어야 하니까.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루시드 폴


남들이 뭐라하더라도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내가 정하는 것이 맞다. 설령 그 우선순위가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모금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내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뭐라 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오로지 나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그럴듯하게' 살면서도 정작 핵심이 뻥 뚤려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된다. 화려한 학력과 직업을 가질수록, 집안에 돈이 많고 명성이 높아 주변의 기대가 큰 사람일수록 정작 그 사람의 삶은 많은 것들이 왜곡되고 스스로 선택한 행복 하나 없이 불행 속을 걷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직도 화려한 허명 속에 헤어나오지 못한 그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삶에서 헤쳐나오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선순위를 찾으시라. 그리고 누가 뭐라한들, 그것을 가장 우선에 두는 삶을 사시라. 내 삶은 (남들이 아닌) 내가 부여하는 의미들로 채워가는 것이 맞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들로 행복을 꿈꾸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덧) 나는 얼마전 7년 동안 끌어온 박사과정에서 자퇴를 결정한 바 있다. (박사를 자퇴하며 남긴 페이스북 글) 많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해온 것이 아깝다'며 자퇴를 만류하기도 했고, 책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의 저자로서 박사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끝낸다는 것이 참 아쉽기도 했지만, 남들이 아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했다. 그런 와중에 영화 "소공녀"를 만나 더욱 반가웠던 것 같다. 아직 안보신 분이라면 영화 "소공녀"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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