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기가 바뀐 건 아닐까?’
잠든 아기 얼굴 옆에 쪼그리고 누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면 이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남편이 찍은 사진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눈앞에 번쩍 떠올랐다. 엄마 뱃속에서 이제 막 나와 으앙, 두 주먹을 꼭 쥐고 울음을 터트린 사진 속 아기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작다.
‘넌 내 아들이 맞겠구나.’
엄마가 된 것이, 우리 집에 아기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아기의 손이 다르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출산 후 한 달 동안은 그러곤 했다. 그런데 공상은 거기에서 더 나아갔다.
‘아기가 바뀐 거라면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원래 부모에게 보내고, 내 아기를 새롭게 만나야 하겠지? 서로 돌려보낼 때 기분이 어떨까?’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주인공이 되어 나라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꽤나 담백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떠오르면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그 공상이 아기가 백일을 맞을 쯤엔, 미쳐버릴 것 같은 큰일 날 일이 되고 말았다. 백일을 키우고 나니, 설사 아기가 바뀌었다고 해도 '내 새끼 아무 데도 못 보낸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다. 스스로에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얘기를 남편에게 꺼내니 그가 물었다.
“만약에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못 보내. 상상도 하기 싫어. 얘도 내가 키우고, 걔도 내가 키워야지.”
상대방 부모는 어쩌라고, 말도 안 되는 무대포 같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는 상상만 해도 내가 못 살 것 같았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백일 여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동안 아기는 애지중지 보물이 되었다. 뱃속에서 열 달을 품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의 깊이였다. 그 변화에 나도 적잖이 놀랐다.
‘모성애’는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걸까, 차츰 발달하는 걸까? 내 경험으로는, 작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씨앗 같았던 모성애가 출산과 양육의 시간을 지나면서 싹을 틔우고 점점 더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게 있어 ‘백일의 기적’은 아기가 통잠을 자는 시기를 만나 반가운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향하는 사랑이 불쑥 커짐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상황을 의연하게, 기꺼이 맞서 볼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낫고, 나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