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에 걸린 너를 사랑해
더운 숨을 가쁘게 내뱉는 강아지들, 진료를 마친 강아지의 보호자를 찾는 수의사들의 높은 음성이 한 데 뒤엉켜 어수선하다. 품 안에 옹송그린 너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판판한 이마 위 흰 털이 손가락 사이를 가득 채웠다 스르르 빠져나간다. 어디에 가든 궁금한 게 많아 코가 아리도록 킁킁대기 바쁜 너인데 어쩐지 여기에 오면 아무런 기척이 없이 조용하다. 사실 너는 다 알고 있는 거지.
이곳은 2차 진료 동물병원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대학병원쯤. 늘 가던 병원에서 좋지 않은 검사결과지를 받아 들고 허둥지둥 ‘큰 병원’을 찾은 사람과 개들로 가득하다. 보호자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려 괜히 낯선 강아지의 이름을 묻고 인사를 건넨다.
주위를 둘러보며 괜히 다른 개들과 너의 얼굴을 비교해 본다. 그래, 너 정도면 나이에 비해 어리고 예쁜 편이지. 이 와중에 미모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네 병이 짙지 않다는 증거일 거야.
- 저희 개는 열세 살이에요. 백혈병 걸려서 왔어요. 그래도 만성이라 몇 년 더 산대요.
- 어머 세상에, 세 살인 줄 알았네. 하나도 안 아파 보여요. 오래 살 거야. 아줌마가 개 많이 키워봐서 잘 안다 얘.
- 그렇죠 아직 애기에요. 요새도 산책 나가면 뛰어놀고 그래요.
- 맞아요. 영원히 애기죠.
너는 궁금하지 않을까? 너른 제주 들판에서 뛰놀던 너를 갑자기 조그마한 서울의 아파트로 데려와 몇 날 며칠을 울고, 갑자기 어느 날에는 밥도 물도 주지 않고는 낯선 병원의 진료실에 몇 시간씩 떼어두는 게 왜 그런지. 당연히도 말이 없는 너는 내 팔과 몸 사이에 조그만 코를 콕 집어넣고는 기척도 하지 않는다. 너도 나처럼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 거겠지.
진료실이 일순 어수선하다. 심장을 할퀴는 듯한 거친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대기실엔 정적이 가득하다. 누군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중얼거리고, 나는 괜히 너의 두 귀를 살포시 막아본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두 눈이 빨개진 보호자가 작은 상자를 조심히 들고 진료실에서 나온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굳이 보거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랜 사랑이 상자 안에 잠들었구나.
유독 중력이 짙어진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금세 다시 다음 진료가 이어진다. 의료진은 빨개진 코를 쓱 닦아내고 새로운 그러나 여전히 늙은 생명을 반긴다. 멋쩍어진 옆 자리 보호자와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떤다.
- 아유, 다시는 강아지 기르지 말아야죠.
- 맞아요.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 그런데 그게 될까요?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 짧은 대화는, 너의 약을 챙겨주는 테크니션의 등장에 얼버무려진다. 주차장을 향하는 품 속 한 팔에는 약봉지가, 다른 팔에는 너의 온기가 가득하다.
괴로운 순간에는 늘 해리를 택하곤 했다. 슬픔을 마주하는 대신 멀리 떨어져 남의 일처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견딘 순간은 기억에 좀처럼 남지 않아, 나의 시간은 텅 빈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기로 한다. 채 몇 년 남지 않은 시간임을 알고 있다. 고통의 순간마저 그리울 것을 알고 있다. 하여 기록을 하기로 한다. 기억할 수 있는 너의 모든 요소들을. 아주 별 것 아닌 일수록 더욱더.
집에 돌아와 지친 너를 내려두고 그제야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몇 번 뒤척이더니 팔다리를 편히 쿠션 위에 늘어뜨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너는 가끔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
가만한 호흡에서 생명의 신호를 발견하기까지 찰나의 시간 동안 나는 무척 두려워졌다가 안도한다.
나의 사랑. 우리 집 털복숭이 막내 할배 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