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꾹꾹 눌러 담은 책을 내고, 정확히 5 년이 흘렀다.
책의 말미에, '이제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말을 적었었다. 여전히 나아지려고 애쓰고 있다고, 어쩌면 거의 다 나은 것 같다고 적었던가. 그때는 그럴 줄 알았다.
목표는 명확했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치료 전의 나는 순수한 기쁨이라거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언제 어디에서도 주변의 모든 자극을 피부가 벗겨진 사람처럼 아프게 감각했다. 확실한 미래는 숨이 막혔고 불확실한 미래는 굴러 떨어질 듯 불안했다. 이놈의 우울만 가시면, 불안한 심장만 차분해지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삶의 밝은 면면들이 환히 빛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떠올라야 마땅한 감정들을, 해돋이 기다리듯 매일매일 바라고 또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우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환희가 아닌 공허만 남았다.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 같았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화는 삼십 년 넘는 생을 통틀어 내본 적도 없거니와, 화가 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도 알지 못했다. 완전한 환희를 느낀 적이 있나? 완전한 절망은? 기억의 페이지들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내게 그런 순간은 없었다. 사실 그 어떤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음 안에 조금씩 어둠이 자라날 열 살 무렵부터 나는 겪고 느낀 것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 메모리는 대부분 유년시절의 짧은 단상들이 여전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새로 만난 정신과 선생님이 내린 진단은 '해리'였다.
화가 날 것 같은 순간에 반사적으로 피식 웃어넘기는 것, 아프던 날들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 모두 내가 나 스스로의 감정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아주 종종 내 영혼과 몸이 분리되어 있는 듯 느끼며, 종종 전지적 작가시점 내지는 유체이탈의 상태로 존재하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어쩐지 조금 기쁘기도 했다.
또 해결할 문제가 생겼다니.
그럼 이번 문제만 해결하면 '정말로'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