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절
아마 어린 날 중 언젠가,
잦은 전학으로 잔뜩 겁만 늘어서는
새로 개교한 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도시 아이들은 섬 애들이랑은 아주 딴판으로
삐딱하게 다르고
티나게 무관심했다.
몇번인가 짝이 바뀌도록 한참을
친구하나 만들지 못하고 어영부영했다.
어느 날,
공부는 곧잘 하는데 너무 조용해서
자꾸만 눈에 띄던 아이와 함께 앉았다.
덜도 더도 없이 무난히 사는 탓에
주변 살필줄은 모르던 내게
어쩌다
그 아이가 보였다.
수업시간에 주눅 드는 법이 없던 아이가
꼭 구겨진 휴지마냥
꼼짝않고 웅크린 것을 보았다.
교과서를 베껴쓰는 쓰기 시간,
아이의 손에 들린 연필은 짧둥하고 초라했다.
지우개도 가지고 오질 않았는지 못했는지
틀리지 않으려고 무던 애를 쓰는 것이
손에 힘이 하얗게 들어있었다.
빌려달랄 법도 한데 항상 아무 말이 없어서
이내 아 갚지를 못할테니 빌리지도 않는 모양이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 아이의 분투를 어깨너머로 지켜만 보았다.
집에 돌아와 한동안 새 연필 새 지우개 자 따위를
새 필통에 넣었다 뺐다 했다.
결국 그 다음 날이 되어선
밤새 준비했던 새 필통은 꺼내지도 못하다가
내 필통 안에서 길다랗게 새로 깎은 것을 불쑥
너 쓸래? 네 건 안깎아서 불편해 보인다.
내밀었다.
생각보다 덤덤히 하지만 기쁜 듯이
아이는 연필을 받아 들었다.
어렴풋이 밝아지는 얼굴에
이것도 써도 돼. 다른 연필도 색연필도 주었다.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앞 뒤로 무관심하던 아이들이 우르르
어 나도 줘 나도 줘.
야 전학생이 연필 준다.
그 날 내 필통은 동이 났다.
곧 또 짝이 바뀔테지
다음 쓰기 시간엔 네가 웅크리지 않아도 되었으면.
그 날 짝이 바뀌고 처음으로 그 아이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쓰기시간이 나는 학교가
조금 편해졌던 날.
동정도 친절도 사라진 지금
하루 하루 딱 남들만큼 사느라
이리저리 치이다
간혹 떠오르는 그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