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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Aug 09. 2021

오리 엄마

미운 아기 오리는 모르는 이야기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출품작


 안나는 내 오랜 친구였다. 같은 호수라도 백조 무리는 호수 남쪽에, 우리 오리들은 북쪽에 살아 웬만해선 마주칠 일이 없었다. 우리가 만나게 된 건 순전히 그녀가 길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안나가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 길을 잃고 독수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내가 그녀를 숨겨주었고, 나이가 비슷한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안나는 가을이 되면 무리와 떠났다가 봄이 되면 호수로 돌아왔는데, 그녀에게 듣는 남쪽 나라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겨우내 얼음이 녹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그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한낮엔 물속으로 머리를 박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알을 곧 낳을 참이었는데 그녀 또한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배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풉. 안나 네 배 좀 봐. 곧 터지겠다 얘. 예정일이 언제야?"

 "웃지 마. 네 배도 만만치 않으니까… 아마 난 오늘 밤이면 나올 것 같아."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어휴. 낳고 난 뒤가 문제야. 여우도 걱정이고... 얼마 전엔 사냥꾼이 기러기를 잡으러 와서 괜히 다른 짐승들도 재미 삼아 죽이고 갔다잖아. 정말 인간이란 족속들은 잔인해."

 그녀는 인간이라면 치를 떨었다.

 "에이,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나는 설마 하는 그런 일이 우리에겐 일어날 리 없다고, 우리 인생은 남들처럼 지루하리만치 평범할 거라 그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탕! 타앙-!"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호수 남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말리는 남편을 뒤로하고 안나의 집으로 내달렸다. 그 후에도 총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기러기 떼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안나 집 근처에 도착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원래 출산이 임박하면 남편들은 집 앞에서 보초를 서게 마련인데 안나의 남편이 보이질 않았다. 숨이 차서 그런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안나!!!"

 갈대 더미를 헤치고 들어서자 모로 쓰러져 있는 안나가 보였다. 날개 부근에서 선홍빛 피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안나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 안나의 알들은 보이지 않고 여우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나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농장에서 남편이 걱정하고 있을 테고, 배가 뭉쳐오는 게 아무래도 알이 곧 나올 것 같았다. 그녀를 덮어주고 갈 요량으로 주변의 마른 갈대를 주워 모았다. 그때, 하얀 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품어보니 아직 온기가 따스했다. 나는 안나의 알을 입에 물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다섯 알을 낳았다.


 며칠 후 드디어 알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반장 오리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둥지를 기웃거렸다.

 "가정 조사 나왔습니다. 이 댁 알이 모두 깨어났나요?"

 "아직 한 아이가 깨어나지 않았어요. 좀 더딘 아이인가 봐요."

 "어디 좀 봅시다. 이런, 알이 무척 크네요. 다른 집 알이 잘못 들어온 건 아니겠죠?"

 반장 오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 순간 안나의 알이 깨졌다.

 "삑! 삑! 삑!"

 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안나처럼 희고 예쁜 얼굴을 기대했는데 웬걸 잿빛 털에 부리는 검은 데다 어딘지 못생긴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를 엄마로 여기는 모양인지 그 큰 덩치로 아장아장 걸어와 내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오리 새끼였다.

 반장 오리가 아이를 보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구구… 고놈 참 못생겼다. 머리도 크고 털도 촌스럽고, 희한한 녀석이 태어났네."

 "어머, 애가 들어요!"

 "아, 아니, 내 말은 귀엽다는 뜻이었어요… 근데 애 이름이 뭐예요?"

 반장 오리가 멋쩍은 듯 날개로 민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미처 이름을 짓지 못한 터라 머뭇머뭇하고 있는데 마침 농장 스피커에서 '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왔다.

 "차이콥스키, 이 아이 이름은 차이콥스키예요."


 농장에서 차이콥스키는 유명해졌다. 눈에 띄는 외모 덕에 멀리서 아이가 나타나면 저마다 수군거렸다.

 "못난이 왔다, 못난이."

 "거인 오리 납시요."

 닭들은 아이가 지나가면 대놓고 놀려 대고 오리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가족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굴 닮은 거야? 뭐 문제 있는 거 아냐? 내 씨를 받았으면 저렇게 생겼을 리가 없는데."

 나는 남편을 한번 째려보고는 축 처진 아이의 어깨를 붙잡고 나지막이 일렀다.

 "아들, 저런 말은 귀담아듣지 마. 알았지?"

 "아니에요, 엄마. 전 형들처럼 소리를 예쁘게 내지도 못하고, 털 색깔도 촌스러운걸요."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얘야 남들과 다른 건 창피한 게 아니란다. 두고 보렴. 넌 누구보다 멋지게 자랄 테니까. 우리 아들은 대기만성형이야."

 차이콥스키는 그 후로도 형들의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열심히 따라 했지만, 백조가 아무리 노력한들 결코 오리가 될 수는 없었다. 난 아이가 오리나 백조 중의 하나가 아닌 특별한 존재로 자라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멀리 가버리면 좋겠구나."

 차이콥스키를 불러 이 말을 꺼내기까지 며칠 밤을 지새웠다. 내 말이 아이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언제까지고 오리들 틈에 섞여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를 등진 채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차이콥스키가 없었다. 정작 보내고 나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그 아이는 내게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결국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아들을 따라나섰다.


 발자국을 따라 갈대밭에 이르자 별안간 총소리가 울렸다.

 "탕! 탕!" 기러기 두 마리가 갈대밭 사이로 떨어졌다. 순간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던 안나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없이 갈대밭을 뒤졌다. 쓰러진 차이콥스키를 발견했을 때 사냥개 한 마리가 다가서고 있었다.

 “물러서!” 나는 날개를 활짝 펴고 아이 앞을 막아섰다.

 가까이서 본 사냥개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욱 사납고 무서웠다. 송곳니는 툭 튀어나왔고 눈은 양쪽으로 쭉 찢어져 인정이라곤 없어 보였다.

 “난 얘 엄마야. 아이를 가만 놔둬!”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지만 애써 겁먹지 않은 척 큰소리를 쳤다.

 “아줌마가 저놈 어미라고? 하나도 닮질 않았는걸?”

 “닮고 안 닮고가 뭐가 중요해? 내가 저 아이 엄마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지. 허튼소리 말고 저리 꺼져!

 사냥개는 신기한 듯 우리 둘을 바라보다 멀리서 들리는 휘파람 소리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쓰러졌다. 차이콥스키는 잠시 기절했을 뿐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었다. 아이를 근처 가축우리에 맡겼다. 주인 노파가 인상이 좋았다. 그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 멀리서 아이를 지켜보곤 했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날이 추워져 따뜻한 옷이나 한 벌 전해줄 겸 가축우리를 다시 찾았을 때, 차이콥스키가 떠났다는 걸 알았다. 엄동설한에 홀로 방황하고 있을 아이 생각에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꽁꽁 언 호수를 언 발로 헤쳐가며 아이를 애타게 찾았다. 그렇게 며칠을 헤맨 끝에 호수 한 구석에서 얼어붙은 차이콥스키를 찾았다. 아이를 붙잡고 용을 써보았지만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꽥! 꽤액! 오리 살려!"

 나는 온몸으로 소리쳤다. 이대로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널 포기하지 않았다고.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 품에 계속 둘 걸 후회가 몰려왔다. 그때였다. 희뿌연 눈발 사이로 농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자꾸만 눈이 감겼다. 그해 겨울은 정말이지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호수에 봄이 왔다. 백조 무리도 남쪽 나라에서 돌아왔다. 차이콥스키는 쭈뼛쭈뼛하며 그들 사이로 들어서더니 어느새 고개를 들고 늠름하게 헤엄을 쳤다. 무리 중 누구보다 기품 있고 성숙해 보였다. 아이의 얼굴에서 더 이상 천덕꾸러기 미운 오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백조라는 걸 깨달았을 테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지금 어떤 모습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만 안다면.

 먼발치에서 아이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물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늙고 못생긴 오리 한 마리가 보였다. 물이 일렁이더니 내 얼굴이 순간 안나의 얼굴로 바뀌었다. 안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 호수가 황혼빛으로 물들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https://pxhere.com/ko/photo/1196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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