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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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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Oct 05. 2021

내겐 너무 조용한 아이

[455일] 아빠라는 그 흔한 말


 누군가를 이토록 애타게 불러본 적 있던가.

이제 15개월 된 내 아이는 불러도 도무지 쳐다보지 않는다.

간혹 "과자"나 "물"에 돌아볼 때가 있긴 하지만 본인 이름에는 영 관심이 없다.

바로 옆에서 아빠가 애타게 부르는데도 못 들은 척 장난감만 매만질 때면 보는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탄다.

게다가 '까치발'을 하거나 팔을 파닥파닥 하기라도 하면 심장이 자이로드롭을 타듯 내려앉는다.

병원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판단을 하기는 너무 어리다며 3개월 후에 심화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아내는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밤낮으로 찾았고, 나는 같은 증상이 있었지만 자폐 스펙트럼이 아니었다는 후기 글을 찾느라 무진 애썼다.

수요가 많아져서 그쪽 방면으로 유명한 의사는 외래를 잡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스마트폰이나 TV 등 기계에 노출될 일이 많아서인지 예전보다 자신의 아이가 잘 크고 있는지 의심하는 부모가 많아졌다고 한다.

옛날이라고 크게 달랐겠냐만 그땐 살기 바빠서 그냥 애가 늦나 보다 했을 테다.

우리 부부도 TV 프로그램을 보고 처음 심장이 두근거렸다.


 호명반응 뿐만 아니라 아이는 월령에 비해 말이 늦다.

이제 가까스로 '엄마' 비슷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의미는 아직 모르는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소리는 안 내고 하루 종일 손가락을 빨다 보니 얘가 언제 말을 배우나 싶어 조바심이 난다.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는 애가 너무 조용하다고 걱정했고, 할머니는 못내 걱정이 되셨는지 며칠 뒤에 전화하셔서는 "아빠, 엄마"라는 말을 많이 해주라며 조언을 해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하루에도 수 없이 아이 이름을 부르고, 아빠, 엄마, 맘마를 입에 달고 다니듯 한다.

어떤 날에는 너무나 절박해 보였는지 아내가 짠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기도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답답함이 매일 같이 반복됐다.

만약에, 혹시라도, 아이가 특별하다면 TV에서나 보던 그 대단한 부모들처럼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아이가 너무 걱정된 나머지 얼마 전까지 날 옭아매던 내 집 마련이나 커리어 따위의 고민들은 다 하찮게만 느껴졌다.

9월에 피는 장미도 있단다.



 그리고 오늘, 평소와 다르게 아침부터 옹알이가 잦았다.

아이는 좁은 집을 뛰어다니며 혼자 뭐라고 뭐라고 외쳤다.

아내는 그런 아이를 품에 안고 "아빠", "아빠" 부질없게 또 말을 시켰다.  


그때였다.

"아, 바바바바."


아이의 입이 아주 약하게 닫히고 열리면서 태어나 처음 내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엄마"와는 확실히 달랐고, "네네" 등과도 분명 달랐다.

누가 들어도 "아빠"라고 생각할만한 소리였다.

아내는 놀라며 아이 잘했다, 아이 잘했다 아이를 칭찬했다.

반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가슴 한 편에서 뜨끈뜨끈한 게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눈으로 번졌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서둘러 두 눈을 가렸지만 눈물이 손바닥 사이로 흘러내렸다.

주책맞게 아빠 소리 한번 들었다고 울다니.

아내에게 평생 놀림당할 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지금껏 키워온 455일, 특히 휴직 후 홀로 분투했던 나날, 내가 사라지는 기분에 끝없이 침전하던 시간, 혹시 아이가 남과 다른 것은 아닌지 불안에 떨던 밤이 뒤섞여 뜨겁게 흘러내렸다.

김춘수의 시처럼 아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자 내가 하나의 몸짓에서 비로소 아빠가 된 것만 같았다.


아이가 하나의 소리를 내기까지 부모는 그 소리를 수 백 수 천 번 되뇌야 한다는 것을 왜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 그런 줄 알았으면 크면서 예쁜 말, 사랑스러운 말을 부모님께 보답으로 들려드렸을 텐데.


혹시 우리 부부가 우려하는 일이 현실이 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아빠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다. 설사 우연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소중한 우연을 희망으로 만들어보련다.

천천히, 한 골만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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