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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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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Nov 17. 2021

알아서 커라

[498일] 혼자서 크는 아이가 어딨겠냐만

 부랴부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거지처럼 아침을 대충 때운 다음 노트북과 책을 들고 호기롭게 카페로 향했다.

아이의 흔적이 거실 바닥에도, 부엌에도, 심지어 화장실에도 남아 있어 집을 떠나야만 내 시간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홀린 듯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있는데 200일 전후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은 엄마 넷이 쪼르르 카페로 들어왔다.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에 비슷한 나이대의 엄마들, 100% 조리원 동기 모임이구나 싶었다.

넓은 테이블에 유아석을 붙여 놓고 엄마들은 각자의 아이를, 서로의 아이를 쳐다보며 수다를 쏟아냈다.

아이들 중 몇은 엄마를 보며 까르르 웃고, 또 몇은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들을 보니 내 아이가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저렇게 매달려 있던 시절이 너무나 먼 과거였던 것처럼, 마치 태어날 때부터 서서 걸었던 것처럼 익숙하다.

저 시절에 우리는 감히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집에서 꽁꽁 숨어있었더랬다. 어느 틈에 커서 집 안팎을 내달리는 사고뭉치가 된 건지...

아이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알아서 무럭무럭 커주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들도 참 어리구나 싶다. 아직 사회 초년생 티를 못 벗은 것 같은 저들의 미래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가기에 괜히 마음이 짠하. (마치 내가 엄마인 것 마냥)

내 마음과 달리 아이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 빛이 났다.

저 엄마들처럼 아이가 웃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욕심이 많아져 '아빠', '엄마' 해보라며 아이를 닦달하느라 바쁘다.


내 아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빠는 이제야 아이가 궁금하다.

어린이집 정규 시간이 지난 후(복직 전 예행연습차) 아이를 찾으러 갈 때면 마음을 단단히 먹는다.  

어린이집 문이 열리고 아이들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한 가운데 내 아이가 걸어 나올 때 밀려오는 먹먹함과 미안함.

아이는 이 적막 속에서 초인종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돌렸겠구나 싶어 마음이 약해진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中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가수 이적 엄마로 유명한 박혜란 작가가 나와서 한 말은 삼 남매의 막내인 내가 자라며 늘 듣던 말이다.

"알아서 커라."


아마도 자식 셋을 키우는 집은 의도치 않아도 방임에 가까운 가풍이 생길 수밖에 없으리라.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알아서 커라'는 말을 하 부모는 참 대단해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는 알아서 자랄 수 없기에 부모는 늘 걱정을 달고 살고, 나처럼 아이를 잠시나마 잊고 살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늘 흔들리면서도 아이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알아서 커라"라고 강한 척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존경스럽다. 



오래전 누나 결혼식 날을 기억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세 버스 안에서 아버지는 술과 안주를 들고 자리를 돌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 지인과 아버지가 나눈 대화가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남는다.


"아 키우느라 고생 많았네."

"지들이 알아서 컸지. 우리가 뭐 한 게 있나."

"지 혼자 크는 아가 어디 있나. 다 부모덕에 큰 거지."

"...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무뚝뚝한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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