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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나무 Apr 01. 2016

빨간 코딱지

임신 증상


나는 임신부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 만큼은 아니다. 결혼 전 임신한 동료를 보면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냥 이 한 몸 출퇴근도 힘든데 저 사람은 뱃 속에 아기까지 담고 어떻게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지 신기했다. 내가 임신을하고 보니 매일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있을 수 있기는 했다. 그러기 위해 달라진 것이 있다. 예전에는 퇴근하고 거의 매일 약속이 있었다. 놀다가 집에 12시쯤 들어가 자곤 했다. 임신한 이후에는 바로 집으로 간다. 저녁을 먹고 수저를 놓는 순간부터 자기 시작한다. 임신 초기가 지나고나니 다시 조금씩 놀러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9시쯤 되면 잠이 쏟아져 집으로 향했다. 시간의 양은 줄었지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상상보다는 덜 달라졌다고 생각하나보다.


나는 평생동안 날씬하게 살아본적이 없다. 결혼식 날이 내 인생의 가장 마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날에도 수치상 과체중이었다. 그래서 임신 후 살이 찌고 배가 나오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평생 똥배가 나와본 적이 없어 너무 어색하다는 친구에 비하면 나는 임신 상태가 익숙했다. 몸이 불어나도 평소에 입던 옷 조금 더 살 쪘을 때 입던 옷이 다 맞아서 따로 옷을 살 필요도 없었다. 신발은 조금씩 작아진다. 원래도 발이 큰 편이다. 편하게 신자 하고 255mm신발을 샀다. 하루 한주 지날수록 점점 맞는다. 이제는 밤에 가끔 꽉 끼기도 한다. 다시 굽 있는 구두를 신고 걸어다닐 수 있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만삭사진을찍으러 스튜디오에 갔다. 그 곳에서 신으라고 준 9센티 정도의힐을 신고 사진을 찍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현기증과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단화만 신는 사람이 되어버리는것은 아니겠지.


 평소에 안 먹던 음식이 땡긴다거나 잘 먹던 음식이 꺼려지는 일도 없었다. 임신 전에도 후에도 모든 음식이 다 땡기고 맛있다. 입덧없이 지나간 덕분이다. 누구에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입덧이 없었다는 것은 정말 너무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결혼 전까지 나는 늘 변비상태였다. 신기하게도 결혼 후로 변비가 사라졌다. 임신하고 없던 변비로 고생하는 친구를 보며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변비는 다시 내게 오지 않았다. 철분제를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괜찮다. 초기태동 시기에 배 아래 쪽에서 꾸르륵 하는 것이 태동인지 화장실에 가고 싶은 신호인지 헷갈려 하루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가 된 기분으로 몇 주간 보낸적은 있다. 호르몬 변화로 피부가 안 좋아지는 사람도 봤다. 다행히 그 증상도 나를 비껴갔다.


임신 전까지 생리전 증후군이 심한 편이었다. 한달 에 한 번 기분이 한 없이 가라앉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호르몬의 지배에 휘둘려지는사람이었다. 그래서 임신으로 인한 급격하고 과도한 호르몬 변화에 내 정신세계가 어찌될 것인가는 오래전부터 나의 걱정거리였다. 임신을 하고난 뒤 감정이 더 풍부해졌구나 느낄 때는 있다. 부적절한 순간에 눈물이 나오거나 해서 난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생리전증후군처럼 감정을 넘어 내 존재 자체가 휘둘리는 일은 없었다. 사실 이건 남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한결같이 착하고 무던하고 듬직하게 있어준다. 내가 조금 짜증이나거나 울컥하다가도 남편이 주는 안정감의 기운이 내 호르몬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아 고맙다. 연애도하기 전 남편이 나와 처음 둘이 식사를 했던 날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에요.”라는 문장으로 나를 꼬셨던 것이 생각난다. 인상 깊은 문장이었다. 아직까지 안정을 위한 주문처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잠깐씩 스쳐간 증상들도 있다. 8개월 차에 접어들 때 갑자기 배가 커졌다. 갈비뼈가 아팠다. 출근을 했다. 허리를펴도 굽혀도 갈비뼈가 아파 인상이 써졌다. 일주일쯤 지나니 괜찮아졌다. 9개월차가 시작되었다. 밤에 거실에 누워있는데 가슴이 매웠다. 매운 음식을 먹었나 되짚어 봤다. 저녁으로 매콤한 파스타를 먹었지만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속쓰림인가. 살면서 속쓰림을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옆에 앉았던 임신한 동료가 임신 후기 때 속쓰림 증상이 심해져 잠도 잘 못잔다고했었다. 자궁이 커지면서 위를 압박해서 위산이 역류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괴로웠다. 우유를 마셨더니 조금 낫다. 오늘 하루만 경험해보는 증상이게 해주세요 라고 일기를 쓰고 잤다. 다행히 그 후로 속쓰림은 없다.


 임신 중에 코피가 나는 증상도 나타난다고 한다. 혈류량이 증가하고 코 점막은 약해지기 때문이다. 살면서 코피가 나본 적이 없다. 초등학생 때였나 코피가 나서 신나했던적이 있는 것 같다. 임신 중에도 코피는 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남편과 밥을 먹다가 코 속을 만졌다. 손가락에 빨간 가루가 묻었다. 이게 뭐지 싶었다. 휴지에 물을 적셔 코 속에 넣어보았다. 휴지에 피가 묻었다. 코피가 났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코 속에 피가 났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 날 이후 나는 매일 빨간 코딱지와 마주한다. 아예 코피가 났더라면 어릴 때처럼 신나했을까. 남편앞에서 코피를막으며 약한 척이라도 하며 누워있었을까. 코피 증상도 나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빨간 코딱지는 참 별로다.


 회사 동료가 “저기요. 미식거리고 그런 적이 한번은있었죠?”라고 웃으며 묻는다. 여러 증상으로 고생하는 다른임신부에 비해 나는 너무 수월하게  지내는것 같아 보였나보다. 생각해보니 임신 초기 매일 오후가 되면 속이 불편해서 의자에 기대 인상을 쓰고 일 했었다.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울렁거리기도 하고 기운이 빠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저녁에 뭐 먹을까를 생각했다. 그 생각만 하다가 퇴근하고맛있게 먹었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한 물음표와 느낌표가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입덧이나 임신증상이 심각한 정도가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임신으로 인한 여러 지나가는 증상이나 내 몸의 변화보다 나에게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아직 아기가 뱃 속에 있는이 시간. 혼자인 듯 둘이지만 아직은 나 혼자인 열달의 시간이 귀했다.초조할 정도였다. 임신 사실을 알고나서 초기 두달을 매일 먹고 자며 아무 생각없이 보내고나니 더 조바심이 났다. 임신 초기 울렁 증상에서 먹고 싶은 것들로 관심을 옮겼던 것 처럼 그 후에도하고 싶은 것들에 더 관심을 두며 지낸다. 이제 출산까지 한 달 남았다. 빨간 코딱지는 여전히 마주할때마다 불쾌하다. 하지만 귀한 이 시간에빨간 코딱지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놀러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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