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chrome blues Jan 24. 2022

[단편소설] 10퍼센트짜리 인간의 삶.

지옥에서 보내는 근하신년.

어우, 이번엔 연봉 잘 나왔네.


   혓바닥이 길면 빨리 죽는 게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클리셰 건만 팀장만은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다. 그러게 평소 영화라도 챙겨보며 문화생활 좀 하시지. 심지어 회의실이란 밀실 속에서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있단 말이다. 억하심정에 총 한 자루라도 품고 왔으면 어쩌려고 저러시나. 아무래도 저 양반은 곱게 천수를 누리다 죽긴 힘드시지 싶다. 너스레를 떨며 연봉계약서를 내미는 저 몸동작 한 프레임 프레임마다 총부리를 겨눠주고 싶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번 속는 셈 쳐볼까. 대체 얼마나 잘 줬길래 저러시나. 심호흡 한번 하고 눈을 아래로 깔아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몸을 뒤로 젖혀야만 했다. 작년에 비해 달라지긴 달라졌다. 근데 이게 잘 나온 게 맞나? 이성적으로, 곰곰이 따져보자. 인상률로 따지자면 대충 10% 언저리. 그래, 나쁘진 않은데. 아아. 나쁘지 않아서 문제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 이마를 부여잡고 싶어졌다. 요새 부쩍 이런 편두통이 잦아졌다. 만병과 만악의 근원. 이놈의 회사. 


   경우에 따라 이게 어느 정도 받은 건지 감이 오지 않을 테니 조금의 설명을 보태겠다. 이 회사는 포괄임금제란 명목 하에 야근수당이 없고 성과급의 개념도 없다. 오로지 연봉이 받을 수 있는 돈의 전부란 소리다. 다시 말해 나의 능력치와 성과에 대한 보상이 하나의 숫자에 달려있는 거다.  


   어찌 보면 종이에 쓰여있는 숫자 자체는 나쁘지 않다. 여태까지 받았던 적 중엔 제일 높긴 하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이유는 작년 성과에 비해 잘 받은 것이 맞냐에 대한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걸 다 떠나 감사하지 않고 뭐하냔 표정을 짓고 있는 건너편 사람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려 미치겠다. 짖고 싶다. 팀장의 안경 너머로 눈알이 떼굴떼굴 굴러다니는 게 보인다. 지금 내가 괜한 오기를 부리고 있는 건가. 뭐라고 입을 열까 고민하는 사원의 혓바닥도 그 박자에 맞춰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일행을 잃고 홀로 사막에 낙오된 기분. 입 속에 가득 찬 모래를 뱉어내고 싶어졌다.  


   저 양반은 이쪽이 하고 있는 치열한 고민의 서사를 전혀 이해 못 하겠지. 쟤가 오늘 점심에 간에 좋은 음식을 먹었나 싶고 말 거다. 


   혹여 오해를 살까 미리 짚고 가자면, 뭐 말도 안 되게 거지 같은 곳에 다니고 있는 것까진 아니다. 오히려 워라밸 좋은 IT 회사에 속한다. 연차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편이며, 칼퇴해도 어쩌다 마주치는 사장님 말곤 딱히 뭐라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설립연도는 오래돼서 이래저래 구시대적 마인드가 만연하다. 그리고 틀린 그림 찾기 하듯 돋보기를 들이밀고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꼽자면, 털어서 무수히 많은 먼지가 나올 거다. 결론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곳이란 건데, 세상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적당히 괜찮은 회사. 그리고 워라밸이 중요했던 나.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고, 이전까진 연봉에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작년이 되기 전까진 말이다. 


   일 년 내내 업무량이 살인적으로 늘었다. TF라는 미명 하에 대충 재작년에 비해 1.73배 정도 더 일했다. 52시간 근무제도를 꽉꽉 채우기 위해선 매일 두 시간씩 야근하고 이틀은 한 시간씩 더 해야 한다. 이게 법적으론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8시간 근무 후 30분의 휴게시간은 야근에서 제외되더라. 즉, 52시간을 꽉꽉 채워 일하려면 대충 아홉 시 열 시에 퇴근해야 하는데 작년에 딱 그랬다. 그러고 집에 가면 열 시 열한 시. 씻고 뭐하면 내일 출근해야 하니 자야지. 어떨 땐 일 뭉치를 들고 나와 퇴근 후나 주말에도 싸매고 있어야 했다. '68시간 근로제'란 야생을 살던 선배님들께선 이런 푸념이 귀여우실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삶이 있듯, 여긴 우리만의 삶이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대다수가 주 40시간 근무를 지향하는 회사 분위기에서 52시간을 일해야 하는 소수의 입장에 속하고 나니 이게 뭔가 싶었다. 같은 돈 받고 일하는데 무료 봉사하는 기분? 원래부터 그렇게 살았으면 또 모를까 안 그러던 애가 일 년 내내 그러고 살려니 죽을 맛이었다. 포괄임금이란 말의 속뜻은 네가 얼마나 야근하든 그건 이 안에 포함된단 말이니깐. 이쪽의 초과 근무는 이름 없는 무덤이 되어버렸다. 또는, 너무 주저앉아버린 나머지 물을 타도 티 하나 안나는 내 비트코인 계좌와 같다던가. 


   해낸 일은 이인분, 성과는 성공적. 관리직 업무를 수행하는 사원급 연봉.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하고 있는 일부터 진짜 문제였다. 재미도 없고, 본인의 성장에 기여했는지 모르겠다. 분갈이할 때가 지난 식물이 돼버린 기분이다. 쭉쭉 성장해도 모자랄 시기에 정체되어 있다. 사람은 사람대로 갈아 넣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처음부터 지옥도가 펼쳐졌다면 이토록 시커멓게 문드러진 바나나와 같은 낯빛으로 매일같이 출근하진 않았을 거다. 일치감치 화들짝 놀라 정신 차리고 도망갔겠지. 근데 ‘나쁘지 않다’는 품평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땐 악수에 가깝단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야금야금 우하향, 또는 횡보하는 코스피라던가 주식 종목을 매수한 사람의 심정이다. 처음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만족한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런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적당한 합리화와 눈 가리고 아웅으로 다닐 수 있던 곳. 천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위기의식을 느낄 수 없게 한 곳. 정신 차려보니 조금만 더 있으면 살이 야들야들해지다 못해 뼈와 분리될 지경까지 와버렸다. 이러다 포기하고 안주하면 냄비 속 물이 졸아들 때까지 달달 볶이다 타버릴 거고 말겠지.  


   회사원이란 원래 다 이런 건가. 그저 그런 회사에 다니는 사람 역시 그저 그런 생애인 걸까. 푸념이 늘어갈수록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단 생각들에 자꾸만 확신이 더해져 간다. 


   눈떠보니 10퍼센트짜리 인간이 되어있는 삶이란 이런 걸까? 작년에 한건 오로지 일밖에 없었는데. 그 하나에 대한 값어치는 10%. 몇백만 원. 이게 셈이 맞는 걸까. 팀장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들 이러고 사는 게 맞는듯하여 아찔해졌다. 모르겠다. 회사 최고 성과를 이룩했다며, 박수갈채를 받으며 20%짜리 인간이 되었다면 만족하고 살았으려나.  


   팀장은 올해 우리 직군 평균 인상률이 5% 정도 안된다고 어르기도 했고, 성과를 내거나 실패하는 일이 오롯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잘했다고 20%를 줄 수도 없고 못했다 동결할 수도 없단 나름의 합리적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자기로선 너 이직해도 아쉬울 거 하나 없다며 목을 조르기도 했으며,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지래도 우린 대기업이 아니고 우리 회사는 이거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다 자학하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의 언변과 완급 조절에 혀를 내둘렀다.  


   어지럽다. 그래 뭐, 그는 그의 일을 하는 거겠지. 꼬리칸 열차에 탄 사람들을 후려치고 꾹꾹 눌러줘야 잘했다 칭찬받겠지. 그럭저럭 인정받고 살아 언젠가 관리자로 승진한다면, 매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서글퍼졌다. 


   아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대로 평탄히 살면 길어야 이십 년 정도 더 일하지 싶은데, 남은 몇십 년을 또 어떻게 살아내야 하나. 모든 시간을 쏟아봤자 10%, 평균 5%짜리 인간. 어쩌다 삐끗하면 2, 3%짜리의 생애. 그 와중에 집도 없어 벼락 거지에 주식에 신경도 못써 파란불이 뜬 통장 잔고. 아니, 애초에 남은 이십 년 이렇게 살아낼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어쩌려고 멀뚱히 앉아있냐는 팀장의 말이 귓가를 때린다. 끝까지 사인하지 않고 버티려다 제풀에 지쳐 대충 휘갈기고 일어섰다. 그와 입싸움이 길어질수록 암울한 현실의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라 버틸 수 없었다. 대충 ‘예, 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이렇게 살 순 없어.


   제목은 까먹었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중 한 소설에서 인상 깊은 첫 구절이라 늘 가슴속에 품고 사는데, 이걸 이렇게 써먹네. 근데 진심이다. 자꾸 이렇게 살 순 없단 말만 되뇌어진다. 그래, 이렇게 살 순 없다. 최소한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수치의 인간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말이다. 이렇게 살다 간 언제 5%짜리 인간으로 후려쳐질지 모를 일이다. 이곳에서는 대박 쳐봤자 10퍼센트짜리 인생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 여울져 가는 세월 속에 나의 생애는 빙글빙글 돈다. 


   이쪽은 영화 '원티드' 속 주인공과 같은 생애가 아니다. 컴퓨터 키보드로 직장 상사 머리를 개박살 낸 뒤, 기막히게 잘빠진 스포츠카를 탄 채 날 기다리는 그녀 품으로 달려갈 수 없다. 쓸데없는 잡생각은 덜어내고, 본인이 써먹을 수 있는 전략을 고심해보자. 문득 책장 속 먼지 덮인 책들이 생각났다. 언젠가부터 안정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착각하고서 덮어놓았던 친구들. 집에 갈 때 먼지떨이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보통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진짜 늦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마음을 고쳐먹고서 말이다.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 창부터 켜본다. 이런저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수강 사이트 몇 곳을 기웃거리다 하나를 구독했다. 나 같은 호구들이 많은 건지 연초부터 세일 중이길래 충동구매해버렸다. 새해 목표 정하는 일 따위 좋아하지 않는데, 본의 아니게 새해 다짐을 이런 식으로 해버리다니. 서글퍼졌다. 하지만 지금 마음 그대로 내년에도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앉아 주억거리며 사인하고 있어야만 한다면 그보다 서글픈 일은 없을 테니깐. 그땐 정말 지금만치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여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만 같아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러니 별 수 있겠는가. 누구 좋자고 죽을 순 없으니 10퍼센트짜리 인간은 이만 이곳에서 꺼져줄 작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선문답(禪問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