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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pr 09. 2022

평범한 어른이 그림책을 읽는다면.

'여름이 온다'를 펼쳐보다 생긴 일.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기엔 아직 새벽 공기가 차갑던 초봄의 어느 날, 우연히 여름과 마주하였다. 이수지 작가님이란 분께서 국내 최초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안데르센 아동문학상’을 수상하셨단다. 기사를 좀 더 읽다 보니 작가님의 대표작이 ‘여름이 온다.’란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사실 그림책은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분야라 그냥 그 정도에서 흘려보냈다. 대충 상식 비스무리하게 ‘볼로냐 라가치 상’이 있다는 정도만 들어본 적이 있지, 이 동네에선 큰 감흥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친구 몇 명을 알고 있다. 그들의 기호에 공감할 순 있겠지만, 직접 그림책을 펼쳐보며 정서적으로 감화받는 모습은 영 상상이 가질 않는다. 몸에 맞지 않는 옷과 같다. 


   정서가 메말랐든 애초부터 그만치 감성은 없었든 간에. 아무튼 그러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한번 여름과 마주쳤다. 우연히 회사 도서관 신간 섹션에 기사에서 보았던 ‘여름이 온다’가 꽂혀 있는 게 아닌가. 기사를 읽었던 게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회사 누군가도 같은 내용을 읽고 주문한 것이 틀림없다. 누군지 모를 당신의 실행력에 건배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냥 지나치긴 아깝다. 표지를 매만지다 첫 장을 넘기었다. 그렇게 후루룩 몇 장 넘기어 보았다. 


   분명 단순한 호기심의 발로였다. 그런데 다들 알겠지만, 처음은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않겠는가. 물씬 풍기는 여름 냄새. 순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여름의 청량함.


   휘몰아치는 심상과 감각 너머, 그 시절의 여름과 마주했다. 내가 지나쳐왔던 계절들과 매우 닮아 있다. 놀랍다. 이게 뭐람. 초등학생 때,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의 아이가 책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여름의 냄새, 추억, 아련한 느낌과 마주했다. 옛날에 찍어 지지직거리는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는 기분이다. 부모님이 찍어놓은 사진이라던가 여름방학에 끄적거렸던 해묵은 그림일기를 창고에서 찾아낸 거라 해도 믿을 지경이다. 


   끈적하고 후덥지근하지만 마냥 즐거웠던 시절의 청량감. 그때의 평화로운 일상과 묘한 운율감. 어린아이가 느끼었던 그 순간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문장력이 아쉬울 정도로 나의 여름 그 자체였다. 그랬다. 괜스레 아련하고 아리다. 새삼 작가님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려내셨나.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지금에선, 닳고 닳은 시선에선 더 이상 느끼지 못할 새싹 같은 그리움 이건만, 당신께선 어떻게 담아내실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내면 저럴 수 있을까. 긴 터널의 시작점을 몇십 년간 잊지 않고 계셨던 걸까. 혹은, 초심을 잃지 않은 채 지금도 저런 순수함으로 세상을 살고 계신 걸까.  


   아이에서 어른으로. 과거에서 현실로. 그림책 한 권을 훑고 있자니 몇십 년 치 일기장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계절의 온도와 소리, 박자감. 그리고 냄새의 색채. 


여름의 색채.


   2022년 4월의 평범한 하루. 회사에 출근한 직장인 A 씨의 아침과 무더웠던 1994년 7월 즈음의 꼬마 아이의 시간이 마주쳐버렸다. 벌써부터 축 쳐진 어른의 손가락을 아무것도 모른단 표정으로 쥐어 잡고 배시시 웃는 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래서 당신들은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이 되었겠다 싶다. 평범하게 살아선 결국 잃어버린 모습들을 책장을 넘기며 기억해낼 수도 있구나. 이쪽은 그림책을 마냥 좋아할 수도, 아이의 시선으로 여름을 즐길 수도 없는 메마른 사람이지만. 잠깐이나마 재현된 어린아이의 꿈이 새삼 그럴듯하고 소중해졌다. 나의 여름이 그러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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