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행, 사진.

인생을 유람하는 사진가의 시선으로.

by Monochrome blues

인생과 여행, 그리고 사진에는 모두 ‘2회 차’가 없다. 한 번 지나가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녹아버린 솜사탕의 여운만 혓바닥에 맴돌 뿐이다. 물론 여행만큼은 두 번째가 있다며 반박할 수도 있겠다. 같은 장소에 몇 번씩 여행을 다니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여행 역시 각각을 독립적으로 보아야 한다. 첫 방문에서의 설렘과 떨림은 그때까지만 유효하다. 첫 번째 여행의 잔향을 두 번째에서도 맡을 수는 있으나, 두 번째 여행만이 가지는 고유한 색채가 실제 주인공이다. 두 번째 삶이 있다한들, 첫 번째와 끊어낼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과 여행, 사진을 대할 때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가짐 역시 서로 닮아있다. 매번 최고의 순간만 마주할 수 없단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진심일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놓쳐버린 순간을 아쉬워할 수는 있되, 너무 오랫동안 끌어안지 말아야 한다.


캐나다 여행은 떠나기 전부터 조마조마했다. 은근히 여행지에 비바람을 몰고 다니는 타입이나, 이번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내내 비 소식이어서 말이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즐길 수 있겠으나 이왕이면 화창한 풍경이 좋으니까. 일기예보가 틀리기만을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다행히 여행 중에는 부슬비 선에서 그치거나,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여행 전 나왔던 일기 예보치고 이 정도면 선방이지’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주려 했다. 이번 여행의 백미라 기대했던 밴프 국립공원에서의 비 확률이 20%에서 100%로 바뀌기 전까진 말이다. 심지어 소나기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진단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악운을 잘 속여왔으나, 내일은 피할 수 없어 보여 이를 악물었다.


역시는 역시. 아침부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오늘만큼은 아니길 바랐는데 말이다. 가장 먹음직스럽던 피자 조각을 흙바닥에 떨어트린 기분이다. 그래, 이래야 인생이지. 어쩐지 잘 풀린다 싶다가도 뒤통수를 쳐주어야 나의 생애지. 씁쓸했지만 최대한 빨리 털어내기로 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 밴프일 수도 있으니까. 인상을 찌푸린 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주어진 선에서 즐기기로 했다. 7월에 만난 진눈깨비에도 굴하지 않았으니,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자부한다.


밴프에서 빠져나오기 몇 시간 전,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가게에서 지역 한정 아이템을 몇 가지 사서 나왔다. 옷가게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가랑비였는데, 거짓말처럼 그치어 있었다. 종일 우산을 쓰고 다니라 하기엔 하늘도 양심에 찔렸나 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시내를 휘적휘적 걷는데, 문득 신호등 근처에 고인 물웅덩이에 시선이 멈추었다. 밴프의 랜드마크인 ‘캐스케이드’ 산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시규어 로스의 노래, ‘Hoppipolla’가 떠올랐다. 아이슬란드 말로, ‘웅덩이에 뛰어들다’란 제목의 노래. 생각난 김에 밴프에서 우연히 마주친 캐스케이드 웅덩이에 빠져 들기로 했다. 카메라를 꺼내 그 순간을 담았다. 여행 전 바랬던 화사함은 없었지만, 이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캐스케이드를 채워 넣었다.


DSCF1784 2.JPG Hoppipolla


운명의 장난처럼 여행 마지막 날만큼은 억울할 정도로 화창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끝까지 해맑지나 말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지막 호텔에 체크인했다. 공항 근처 부둣가에 위치한 호텔이라, 이번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석양은 밖에서 보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여태껏 만나 본 석양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순간과 마주했다. 이름 모를 부둣가에서 기대한 적 없는 7월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버렸다. 심지어 캐나다에서 만난 산타 할아버지는 인심도 후하셨다. 스스로의 단어로는 절대 표현해낼 길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가 한 시간이 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밤, 캐나다의 하늘이 검푸르게 식어가는 모양새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어폰을 꺼내 이기 팝의 ‘The passenger’를 한 곡 반복으로 재생했다. 어디 사는 누구의 선곡인진 몰라도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적당한 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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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F2214.JPG The passenger


인생과 여행, 그리고 사진은 참 심술궂다. 그들은 절대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 주는 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뜻하지 않던 물웅덩이에도 지체 없이 뛰어들 용기를, 우연히 주어진 선물 같은 순간에도 쉽게 젖어들 수 있는 여유로운 감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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