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에 필름 카메라를 찍습니다.
전 부치는 날, 어머니께서는 늘 신기해하신다. 우유에 딸려오는 요구르트에 더 눈독 들이는 아들의 식성을 말이다. 당신께서는 전을 다 부치시고 나서 남은 계란 물을 얇게 피신 뒤, 마지막으로 부쳐내신다. 우리 집에서는 이 계란 프라이도, 부침개도 아닌 자투리를 ‘숙제’라 부르는데, 언제나 이 ‘숙제’를 가장 기대하는 아들의 식성이 신기하신 모양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숙제다. 어머니께서는 아무 간도 되지 않은 그 밍밍한 게 뭐가 그리 좋냐 매번 물으신다. 숙제에 묘하게 얹힌 재료의 향과 그 애매함이 삼삼하고 재미있는데, 그 오묘한 경계를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어 대답은 매번 ‘그냥 좋아요’로 끝낸다.
김치의 꽁지 부분이 좋다. 어두육미란 말이 있지만, 생선 부위에서 최고는 역시 볼 살이다. 아무도 닭 목을 좋아하지 않아 너무 행복하다. 분명 본 메뉴에 딸려오거나 환대받지 못할 자투리인데, 그쪽이 더 좋다. 김밥의 끄트머리나 참치 뱃살을 더 좋아하는 ‘일반적인 자투리 선호도’보다 괴상망측하다. 본 품에 비해 한정되게 나오는 양이 매력적이라 그렇다. 본품과 비슷한 듯 다르다. 싱거운데도 깊은 무언가가 있다. 맛도 느낌도 재밌으니 좋아할 수밖에 없지.
필름 한 롤은 대개 스물네 장, 혹은 서른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메라에 필름 끼우는데 숙달된 사람은 보통 한 두 장 정도 더 찍을 수 있게 감아 넣는다는데, 이 손으로는 아직 딱 정해진 수밖에 채우질 못한다. 그나마도 꼭 한 장씩은 내 손과 무관하게, 가을 나무 까치밥 마냥 남겨놓아야 한다. 필름은 빛에 반응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카메라 속 완벽한 어둠에서 준비하다 셔터에 맞춰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장면을 담아내는 원리다. 카메라에 필름을 고정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름을 빼낸 뒤 끼워야 하는데, 그동안 빛에 노출된 필름 끄트머리는 새하얘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까치밥이 생기는 거다. 새하얘진 일부는 첫 번째 사진과 이어진다. 많게는 사진의 반 이상 빛에 먹힌 채 찍힌다. 사진 자체로만 보면 실패작이다. 분명 실패인데 괴상망측함을 부르는 무언가의 맛을 담고 있다.
이미 빛을 먹고 들어와 새하얗다. 경계로 갈수록 타는듯한 석양을 맞이한다. 남은 부분만큼만 순간을 담는다. 의도와 우연이 만나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생각한 대로 절대 찍히지 않는 탓에 늘 새롭다. 붉게 타들어가고 하얗게 물든 공백은 뭔가 따스하다. 이 느낌이 ‘숙제’의 선호도와 닿는다. ‘숙제’는 그 날 재료와 쓰고 남은 계란물 양에 따라 그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요리 자체의 성공 여부와 다른, 그 날 만의 우연한 요소가 깔린다. 그래서 재미있다. 필름 사진도 이와 같은 거다. 본 메뉴는 본 메뉴대로 맛있고, 자투리는 자투리대로 좋다. 아날로그의 색채와 감성이 디지털과 달라 생기는 일이지만, 필름 첫 장만큼의 재미라 놓칠 수 없다.
이렇게 눈꺼풀에 햇살이 닿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다고요.
눈꺼풀은 햇볕을 쪼이는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해줄 필요가 있어요.
좋아하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이 작가의 소재는 지극히 일상적인데 문체와 표현은 서정적이라 좋다. 그중에서도 위의 문장을 좋아한다. 처음 저 소설을 읽던 순간, 창문을 열고 눈을 감았다. 해가 떠있는 쪽으로 고개를 드니 붉은 따스함이 눈꺼풀 밑으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어둠이 새하얗게 물들고 붉게 타들어갔지. 그 이후로도 가끔씩은 저런 식으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필름 첫 장에서 만나는 재미를 마주하는 기분이라 서다. 의도적으로 쉼표를 찍는 공백의 시간. 그때의 따스함. 잠깐 동안 만나는 순간의 경계는 딱 어머니의 ‘숙제’, 그리고 필름 첫 장과 닿아 좋아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