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뒤에 남는 그리움.

깊어지는 그리움에 대하여.

by Monochrome blues

인천과 경기도를 가르는 바다 언저리에는 할아버지의 생가가 있다. 당신과 또 당신의 형제들께서 나고 자라셨던 그곳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하여 당신을 추억하는 공간이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그곳을 통해 당신 어머니를 추억하셨듯이 말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추억하는 공간이 있다. 그곳은 할아버지의 생가처럼 수많은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무언가를 형상화할 수 있게 해 준다. 단 한 번의 스침에도 태양처럼 강렬하게 다가와 뇌리에 박힌다.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학교 앞에 나와서 살기 전까지, 대학교 일이 학년 즈음에는 인천에 계신 할아버지 댁에서 통학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타고 나와 마을버스로 한번 갈아타야 했다. 보통은 노량진 역에서 환승했다. 매일 이른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에서 옆 사람 등에 부대끼며 노량진에 내렸다. 이미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육교를 건너 마을버스를 탔다. 그리고 어김없이 테이프 되감듯 지나온 길 그대로 다시 인천으로 넘어가 하루를 마감했다. 배고픈 시간이라면 여정 사이사이에 노점에서의 주전부리가 추가되곤 했다. 사실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스쳐 지나듯 노량진이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이 가지는 냄새와 분위기는 대학 시절과 함께 했다. 매일매일 같지만 달랐던 대학교 안에서의 시간과 달리, 노량진에서의 시간은 똑같은 길이와 시간대로 중첩되었다. 빗물에 패인 처마 밑 돌멩이처럼 찰나의 순간들이 하나의 의미로 머릿속에 단단히 쌓여갔다.


11_4.JPG 똑같은 하루, 똑같은 일상.


노량진에 대한 기억이 한 번에 뒤바뀐 순간은 안전상 노량진 육교가 사라진단 뉴스 기사 몇 줄을 통해서였다. 순간, '노량진'이란 지명이 매우 낯설어졌다. 혹자는 육교 하나에 호들갑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매일같이 걷던 발자취 일부가 통째로 도려진다는 사실에, 노량진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 되었다. 마치 늘 가던 길만 가다가 빗물에 길이 끊겨 어찌할 바 모르는 개미 행렬의 ‘일개미 1’이 되어 버린 느낌. 다행히 당장 철거하지는 않는단다. 얼마 간의 여유를 두고 공사를 시작한다 적혀 있었다.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학 시절 내내 걸었던 그곳을 걸어보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지 않은가? 얕은 다짐은 그대로 고이 접어 버렸다. 이런저런 핑계 사이에 꽂아둔 채로 까맣게 잊어버렸지.


몇 달 뒤, 이삿짐을 싸다 우연히 필름 한 롤을 발견했다. 다른 물건에 휩쓸려 들어간 바람에 서랍 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언제 찍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필름을 맡겼다. 며칠 뒤, 결과물을 받아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중 몇 장에는 생각지 못한 노량진이 담겨 있었다. 언제 저 풍경을 찍었는지 도통 기억나질 않는데도 말이다. 마지막 장에는 철거된 육교가 담겨 있었다. 사라질 줄 알고 어떻게 딱 육교를 찍었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고서 필름 딱 한 장을 훔쳐 담아온 기분이다. 토이 카메라로 찍은 필름인지 여기저기 뭉개지고 빛바랜 사진인데도 추억을 손에 쥘 수 있어 좋았다. 가끔씩 생각날 때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되어주었음에 감사했다.


11_1.JPG 우연히 손에 쥔 추억.


추억에 관한 그리움은 부재에서부터 시작한다.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차일피일 미룬다. 없어진 뒤에야 다시는 되돌리지 못할 후회를 시작으로 그리움이 찾아온다. 다신 만날 수 없어야 그 사람이 그립듯이 말이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자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자체일 수도, 그 시절 즈음의 빛나던 순간일 수도 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당신은 당신 그 자체로써 그립다. 노량진 육교는 육교 그 자체보단 그 시절이 그리워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결국 우리의 삶은 그런 거다.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리워한다. 있을 때 잘할 걸, 혹은 한 번이라도 더 가 볼걸 이라는 후회의 감정으로 추억할 수밖에 없다.


삼삼한 나이가 여물어가고 있는 지금, 난 또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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