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문을 닫다.

작은 그리움에 대하여.

by Monochrome blues

‘XX월 XX일 부로 문을 닫습니다. 선입금 찾아가세요.’


동네 만화 대여점이 문을 닫는다. 이면지에 붉은 매직으로 휘갈긴 글씨가 아연하다. 이 동네로 이사오길 잘했다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가 문을 닫는다니. 옛날처럼 자주 빌려보지는 않더라도 ‘안 빌려보는 것’과 ‘못 빌려보는 것’은 천지차이라 서운하다. 아파트 단지 혹은 상가마다 자리 잡고 있던 만화 대여점은 어느새 천연기념물이다. 만화 대여점의 조상 격이었던 비디오 대여점이라던가 오락실과 마찬가지로, 유행과 문화의 끝에서 작별을 고한다. 종종 만화 카페 같은 곳들이 명맥을 잇고 있지만 빌려보는 일과 카페에서 보고 나오는 일은 명백히 다르다.


10_1.JPG 이 곳도 이제는.


만화 대여점은 해 저문 시간을 위한 작은 습관이었다. 하루를 어떻게든 끝낸 뒤 대여점에 들렀다. 어제 끊고 나온 다음 권을 빌려 검은 봉지에 담았다. 역전 포장마차에서 깻잎이 송송 썰린 떡볶이와 순대 일 인분 씩도 챙겼지. 등허리에 알맞게 퍼질러진 소파에 누워 캔맥주와 함께 마무리하던 나날들. 밀린 예능이나 드라마를 켜놓고 잠이 오길 기다리던 기약 없는 조촐한 자축. 소소한 일상은 이제 추억이다. 과거를 추억할 대상이 점차 사라지는 일은 서글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이별하는 법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이별을 각오해야 한다.


원래는 집이란 공간을 통해 한 움큼 쌓여 버린 추억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이쪽은 자취를 시작한 이래, 줄곧 일이 년마다 이사를 반복했다. 덕분에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추억을 소환하기가 어렵다. 손 때가 묻을만하면 낯선 곳으로 떠났으며, 또 그곳에 익숙해지는데 집중했던 탓이다. 오랫동안 정들지 않은 곳에서는 문득 지나쳐 온 시간을 회상하기 어렵지. 집으로 추억하기 위한 기억은 생각보다 깊고 오래되어야 한다. 할아버지 산소에 가면 그리움이 몰려와 당신의 생가까지 찾게 되는 일처럼 말이다. 세월이 녹아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이 인상적인 생가에는, 당신의 처음과 끝을 오롯이 담아낸 추억이 있다. 당신이 그리울 땐 자연스레 당신이 살던 곳이 생각나는 거다. 이쪽은 집 대신 만화 대여점을 추억으로 삼았다. 집은 매번 바뀌었으나 습관만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는 그 습관마저 고쳐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추억은 감정이다. 당시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보는 거다. 부모님 댁에 바쁘단 핑계로 자주 들르지 못한다. 명절을 빼면 잘해야 일 년에 두어 번? 가끔씩 집에 찾아가면 두 분을 뵈어 좋은데 그렇게 잠이 쏟아질 수 없다. 평소에도 잠이 많은 편이기는 한데 집만 내려가면 밥 먹다가 졸리고, 설거지를 하다 졸리며 티브이를 보다 졸곤 한다. 숨만 쉬어도 잠 세포가 주변에 쏟아진다. 평소의 몇 배는 잔 덕에 몸은 개운해도 눈꺼풀은 여전히 천근만근이다. 아버지께서는 원래 나가 살다 집에 들어오면 긴장이 풀려 다 그런 거라며 허허롭게 웃으신다. 주체 못 할 정도로 쏟아지는 나른함은 집이 편해서일까? 아니면 이 집, 혹은 당신들과의 추억에 취해서일까?


10_5.JPG 집, 꽃 한 송이의 추억.


만화 대여점이 사라지는 바람에 추억 속 공간에는 소파만 덩그러니 남았다. 대여점이 나가고 나면 치킨집이 들어설 예정이란다. 포장마차는 매번 단골에게 인사 없이 떠난다. 이제는 뱃살이 쳐질까 봐 야식은 고사하고 캔맥주 하나도 다음날의 나에게 사정해가며 마셔야 한다. 재밌는 드라마는 드물다. 출근하기 위한 아침이 무서워 등 떠밀리듯, 졸리지 않은데도 잠을 청해야만 한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조금 서글퍼졌다. 소파 밖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을 움츠리자, 추억의 영역이 조금 더 줄어들었다.


만화 대여점이 영영 문을 닫기 전, 선입금도 찾고 마지막 만화책도 빌릴 요량으로 들어섰다. 책장을 기웃거리며 몇 권을 뽑아 들다 더 이상 빌려주진 않는단 말에 내려놓았다. 대신 만화책들을 헐값에 내놓으니 가져가란다. 책장에 꽂은 녀석들을 다시 챙기려다 말았다. 얌전히 선입금만 받아 나왔다. 오늘은 추억을 팔아 남은 공돈으로 치킨에 맥주를 사 먹어야겠다.




10_4.JPG
10_6.JPG
10_7.JPG





이전 09화주니어 직장인의 트라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