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앞둔 재건축 아파트에서 실험 중
집을 고친다는 것
집을 고치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막연히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극적인 계기가 없다면 선뜻 결심하기 어렵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실수 없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대부분은 과감한 시도보다는 안전한 선택을 택하게 된다.
예산도 시간도 한정적이다. 평소 관심이 많았더라도, 정보의 불균형 속에서 ‘최선’만으로 공간을 채우기는 어렵다. 그렇게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나 체념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집을 고친다는 건 그런 일이다. 그리고 살아가며 또다시 2차, 3차의 불만과 만족이 겹쳐진다.
철거 예정 아파트에서의 첫 실험
이번엔 조금 달랐다. 이 집이 빠르면 3년, 길어야 5년 안에 철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평생 가져가지 않아도 될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 그래서 인생 처음으로, 주방에 과감한 실험을 감행했다.
화이트는 접고...
처음엔 당연히 화이트로 하려 했다. 무광 화이트, 타일과 벽지가 매끈하게 이어지는 미니멀한 톤 앤 매너. 주방은 눈에 띄지 않는 매스 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게 내 오랜 취향이자, 안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허물 집”이라는 조건이 묘한 자유를 줬다. 다른 사람의 보편적 취향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이참에, 우드를 한 번 써볼까?” 그래서 결국, 처음으로 ‘필름’을 허락했다. 진짜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여겼던 그 ‘페이크 우드 필름’을.
이 선택에는 과거의 기억도 한몫했다. 이전 집 현관 일부에 오염 방지를 위해 붙였던 우드 필름. 내구성도 좋고, 질감도 나쁘지 않아 의외로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 해보고 별로면 다시는 하지 말자.” 그렇게, 가볍지만 진지한 실험이 시작됐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사진을 찍어보면 다르다. 같은 공간인데도 아침과 저녁, 맑은 날과 흐린 날마다 사진 속 색이 달라진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이 집은 참 여러 얼굴이 있구나” 하고 느낀다. 빛의 방향, 날씨, 시간대, 조명의 색…그 작은 차이들이 집 안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처음엔 당황했다.
필름을 붙이고 처음 마주했을 때
“망했나?” 싶을 만큼 어둡고 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어떤 날은 숲 속 작은 오두막처럼 따뜻한 갈색빛을 띠고, 어떤 날은 도시 카페처럼 차분한 회색빛을 내비친다. 빛에 따라 우드는 매일 다른 표정을 보여주었다.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 가끔은 시각적으로 텁텁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COB 3000K의 따뜻한 조명이 우드 필름과 만나면 붉고 노랗게, 때론 탁하게 퍼져 보인다. 하지만 해 질 무렵, 햇빛이 천천히 기울며 나무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며들 때, 이 공간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고요해진다.
초록이 만드는 순간
이 집은 단지의 가장자리에 있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나무들이 바로 보이고, 확장하지 않은 베란다 덕분에 자연광과 그림자의 변화를 고스란히 실내로 들인다. 가끔은 바깥 초록이 실내 우드와 만나 예상치 못한 조화를 이룬다. 진짜 나무는 아니지만, 어쩌면 이 빛을 위해 존재하는 표면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아직은 모르겠다
우드 필름을 선택한 지 한 달. 여전히 확신은 없다. 어떤 날은 포근해 보이고, 어떤 날은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다. 만족과 불만족 사이. 실험과 안정 사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일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빛을 따라 또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같은 장소, 다른 색감. 그걸 보는 재미가 꽤 있다. 이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나중에 후회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이 변화 자체가 이 집을 즐기는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