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생귄 Jun 17. 2021

‘밀당’의 기술

웃음꽃, 김호연 개인전, 5.19~5.28, 최정아 갤러리


밀고 당기지는 말아줘요 / 우리 조금만 솔직해져요 / 질투하게 하지 마요 / 집착하게 하지 마요

-2NE1 ‘I Love You’ 가사 중



 이 가사는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위키 계열 사전인 나무위키에서 ‘밀당’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구절이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밀당’은 ‘밀고 당기기’를 줄인 말로 연애하기 전에 벌이는 심리전을 표현한 말이다. 인용된 2NE1의 해당 가사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밀고 당기기’라는 유희를 통해 확인한 뒤, 서로의 사랑을 이제는 그만 진솔하게 확인하길 원하는 즈음에 부르는 대목같다. 아마도 ‘밀당’에서 오는 애절함, 혹은 적절한 ‘밀당’의 과정 이후에는 이제 고백의 순간이 남아 있다는 걸 단박에 보여주기 위한 예시로 쓰인 가사였을 것이다.

최정아 갤러리 전시 전경

 김호연의 이번 작품들은 이전에 비해 눈과 몸을 작품에 가까이 하면서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이전 작품들이 ‘고운 색’, ‘색채의 향연’, ‘색채주의’라는 말로 설명돼 왔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 작품 멀리서부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 색이 사라진 것이다. 이 까닭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진 관객은 자꾸만 작품 가까이로, 디테일로, 작가가 그린 세계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된다. 사랑스러운 색채를 뿜어내던 작품이 관객을 적극적으로 ‘밀었다면’, 색채감이 옅어진 이번 작품은 오히려 관객을 적극적으로 ‘당긴다’. 꽃과 나비들이 조용하고 은근하게 건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의 잔잔한 미소를 관객들은 찬찬히 뜯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려내는 점과 선의 율동감과 에너지에 집중하게 된다. 진솔하게 자기를 내보이려는 순간은, 그러니까 고백 직전의 그 순간은 ‘밀당’ 이후에 오는 순간이라 더 아름답다.


 다채롭고 사랑스런 색채가 사라진 자리에는 점 혹은 짧은 선들이 대신한다. 잎맥과 꽃맥 혹은 그들의 에너지나 호흡을 표현하는 것만 같은 점들이 인상적이다. 색은 전체적으로 화이트와 그레이 계열의 무채가 바탕이며, 점이나 선이라 부를 수 있을 에칭으로 파인 자리는 푸른 색조로 떠오른다. <웃음꽃>, <행복한 정원> 시리즈의 제목처럼 이전엔 꽃, 나비, 물고기가 마치 행복하고 환한 표정을 띄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꽃들은 은근한 미소나 표정을 짓는다. 2000년대 중반 그린 연꽃 연작을 기억해 보자. 작품 전면에 흩어지듯 나타났던 물방울과 빗발 형상이 생각난다. 그것은 꽃 주변을 떠도는 어떤 생명력이나 기운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가시적이지 않지만 분명히 대상 주변을 채우고 있을 전자(electron)의 이미지로 읽히기도 했다. 동그란 방울무늬와 짧은 선으로 표시된 빗발은 꽃과 주변의 동물들에게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었는데, 신작에 이르러 이것들이 꽃잎과 줄기에 점과 짧은 선으로 잔잔히 스며들어간 것 같다. 꽃들은 바깥에 있던 기운이 내 안에 스며든 채 발산하는 기운과 파동을 느껴보라고, 보이는 것 너머 이 안에 마음이, 우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꽃과 나비는 관객을 부드럽게 ‘당겨 와’ 고백하려는 듯 더욱 가까이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추상으로 산을 그린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형상의 추상화 정도, 색, 점과 선을 어떻게 다루는 지 등등 다양한 차이는 있겠지만, 자연물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통해 눈으로 지각하는 것 이상의 세계와 이를 둘러싼 기운과 에너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김호연과 유영국의 작품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김호연의 작품은 회화에 한정해 말하기만은 조금 아쉬운데, 춤추는 것 같은 점과 선을 따라가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 질감이 만져질 듯 재미있어서 그렇다. 색채가 화려함을 뽐내지는 않지만 도자기나 수공예 작품을 직접 가까이서 볼 때처럼 세부를 따라가며 감상하는 즐거움, 왠지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은은한 멋까지 있다. 이런 점은 사진으로 담기지 않아 전시장을 찾아야하는 이유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 현실과 환영 사이의 간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