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미미 모두 제 겁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없는 바비와 미미 인형, 가구 세트가 있다. 왜냐? 그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감이 아니라 나의 고상한(?!) 컬렉션들이다. 비록 지금은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창고에서 쉬고 있지만 볼 때마다 뿌듯함이 넘실대는 아이들, 훗날 지하실이 있는 큰 집에 살게 되면 거기에 걸맞은 진열장을 사서 박물관처럼 늘어놓고 싶은 소중한 나의 보물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유학생 와이프로 살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중고장터 이베이에서 우연히 바비를 검색하다가 놀라운 세계를 영접한 것이다. 그곳에는 빈티지 스타일의 인형 가구가 넘쳐흘렀다. 1970년대 산, 80년대 산, 90년대 산. 몇십 년 전에 생산된 장난감들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던 탓에 나의 두 눈동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처럼 절로 빛이 났다.
어느새 내 손은 자판을 놀려 경매 가격을 입력했다. 며칠이 지나자 컴퓨터 화면에서 보았던 바비 가구 세트가 우리 집 거실에서 배송상자를 벗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나는 열광했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수준이 아니었다. 엔틱이라고 해도 어울릴만한 디자인에, 중고라지만 상태가 무척 좋았다.
한번 맛을 들이자 그만둘 수가 없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도 어두운 방에서 조그마한 아이폰으로 이베이를 찾아 들어가 "Barbie Furniture"를 써넣었다. 올라오는 제품들을 구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나만의 작은 세상. 그렇게 나는 거실 세트, 주방 세트, 침실 세트, 욕실 세트 등을 사들였다가 때론 되팔며 키덜트가 되었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바비와 미미에 환장했을까? 쓰윽 한 번 보고 "어머, 예쁘군!" 하며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인형들 가구 세트를 사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꼭 사고 싶었던 것을 다른 사람이 채갔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비슷한 게 또 있는지 찾아보며 몇 날 며칠 이베이 속에서 살았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날에는 커다란 만족감에 마음이 붕 떠올라 둥실둥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콕 박힌 액세서리를 받는다 해도 그만큼 기쁠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그럴까?)
결혼 6년 차 되던 해에 남편은 유학을 결정했다.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결혼할 때 샀던 혼수품 중 가구나 가전제품은 가져올 수가 없었다. 지인에게 나눠주거나 중고로 팔았다. 유학 예정 시간은 빨라야 5년. 안 그래도 없던 살림은 몇 년의 궁핍함을 미리 약속했다.
도착한 곳은 대학도시였기 때문에 유학을 마친 한국인들은 중고 가구를 헐값에 내놓았다. 우리는 남들이 몇 번을 돌려 썼는지도 모를 가구를 아무런 콘셉트도 없이 싼 것 중심으로 이것저것 사서 썼다. 살던 곳에서 3시간 떨어진 아이케아(IKEA)에 갈 때마다 나는 언제쯤 여기서 파는 제품을 마음껏 구경하며 고를 수 있을까 상상하며 한숨을 짓곤 했다.
바로 이 지점이다. 진짜 가구는 돈도 없고 내 집도 없어서 살 수가 없지만 바비나 미미의 가구들은 훨씬 싼 가격에 원하는 분위기를 골라 살 수 있었다는 것.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팔아도 내가 샀던 가격 혹은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는 점. 나는 인형과 인형 가구들에 내 욕망을 투영했다. 현실 속 내 삶에는 할 수 없었기에 나를 대신하는 미미와 바비에게 멋진 가구를 사주며 대리만족을 한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영국에서 직장을 잡았다. 몇 년 후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로 가구 가게를 돌며 소파와 침대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을 보며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골랐다. 여전히 비싼 돈을 들여 무언가를 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내 집에 어울리는 분위기, 딱 맞는 크기의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다. 바비와 미미, 그녀들의 가구보다 내 가구를 보는 일이 더 즐거워졌다.
키드(Kid)와 어덜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라는 단어는 어린이가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에 열광하는 어른을 뜻한다. 키덜트가 되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사실 요즘 장난감은 어른의 혼을 쏙 빼놓기에도 충분히 경이로운 게 많기는 하다. 심지어 가격.
내 경우엔 결혼 후 가장 경제력이 부족하고 육아에 지쳤던 시기에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 하나만 가지고 공부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어린아이 둘을 키워야 했을 때 바비와 미미는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이자 도피처였다. 그녀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고 엘레강스한 소파와 침대를 들여놔 주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메타버스에서 비슷한 욕망을 발견한다. 디지털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 그곳에서 나는 아바타에게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거울 삼아 다리도 길게 얼굴은 하얗게 만들어 준다. 방 안은 모던하면서도 초록 식물이 가득하게 꾸며준다. 그러니까 옛날 나의 바비와 미미 세상은 메타버스의 아날로그판 (단어가 좀 모순되지만) 쯤 되는 것이었다. 가상의 공간에 원하는 데로 꾸며줄 수 있는.
요즘은 창고 문을 열 때만 바라볼 뿐, 인형을 꺼낼 시간도 가구들을 배치할 시간도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들이 사랑스럽다. 고맙다. 퐁당퐁당 서툴게 건너왔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가끔은 웃음이 난다. 언젠가는 꼭 모든 세트를 장식해서 진열해두고 싶다. 이런 나에게 누가 '당신은 키덜트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네. 저는 키덜트입니다. 마론 인형과 가구 모으기는 저의 취미 중 하나였습니다.
글 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취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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