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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y 18. 2022

내가 키덜트가 된 이유

바비, 미미 모두 제 겁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없는 바비와 미미 인형, 가구 세트가 있다. 왜냐? 그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감이 아니라 나의 고상한(?!) 컬렉션들이다. 비록 지금은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창고에서 쉬고 있지만 볼 때마다 뿌듯함이 넘실대는 아이들, 훗날 지하실이 있는 큰 집에 살게 되면 거기에 걸맞은 진열장을 사서 박물관처럼 늘어놓고 싶은 소중한 나의 보물이다.  


이 모든 것은 미국에서 유학생 와이프로 살던 시절에 시작되었다. 중고장터 이베이에서 우연히 바비를 검색하다가 놀라운 세계를 영접한 것이다. 그곳에는 빈티지 스타일의 인형 가구가 넘쳐흘렀다. 1970년대 산, 80년대 산, 90년대 산. 몇십 년 전에 생산된 장난감들이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던 탓에 나의 두 눈동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처럼 절로 빛이 났다.  


어느새 내 손은 자판을 놀려 경매 가격을 입력했다. 며칠이 지나자 컴퓨터 화면에서 보았던 바비 가구 세트가 우리 집 거실에서 배송상자를 벗고 화려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나는 열광했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수준이 아니었다. 엔틱이라고 해도 어울릴만한 디자인에, 중고라지만 상태가 무척 좋았다.


침실 1 테마: 블루 앤 그린 (침구세트는 직접 제작)
침실 2 - 테마 : 노랑 (침구세트는 직접 제작)


한번 맛을 들이자 그만둘 수가 없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도 어두운 방에서 조그마한 아이폰으로 이베이를 찾아 들어가 "Barbie Furniture"를 써넣었다. 올라오는 제품들을 구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나만의 작은 세상. 그렇게 나는  거실 세트, 주방 세트, 침실 세트, 욕실 세트 등을 사들였다가 때론 되팔며 키덜트가 되었다. 



결핍이 만들어 낸 나의 취미 생활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바비와 미미에 환장했을까? 쓰윽 한 번 보고 "어머, 예쁘군!" 하며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시의 나는 인형들 가구 세트를 사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꼭 사고 싶었던 것을 다른 사람이 채갔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비슷한 게 또 있는지 찾아보며 몇 날 며칠 이베이 속에서 살았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날에는 커다란 만족감에 마음이 붕 떠올라 둥실둥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콕 박힌 액세서리를 받는다 해도 그만큼 기쁠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그럴까?)

 

결혼 6년 차 되던 해에 남편은 유학을 결정했다. 미국으로 건너갈 당시 결혼할 때 샀던 혼수품 중 가구나 가전제품은 가져올 수가 없었다. 지인에게 나눠주거나 중고로 팔았다. 유학 예정 시간은 빨라야 5년. 안 그래도 없던 살림은 몇 년의 궁핍함을 미리 약속했다. 


도착한 곳은 대학도시였기 때문에 유학을 마친 한국인들은 중고 가구를 헐값에 내놓았다. 우리는 남들이 몇 번을 돌려 썼는지도 모를 가구를 아무런 콘셉트도 없이 싼 것 중심으로 이것저것 사서 썼다. 살던 곳에서 3시간 떨어진 아이케아(IKEA)에 갈 때마다 나는 언제쯤 여기서 파는 제품을 마음껏 구경하며 고를 수 있을까 상상하며 한숨을 짓곤 했다. 


바로 이 지점이다. 진짜 가구는 돈도 없고 내 집도 없어서 살 수가 없지만 바비나 미미의 가구들은 훨씬 싼 가격에 원하는 분위기를 골라 살 수 있었다는 것.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팔아도 내가 샀던 가격 혹은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는 점. 나는 인형과 인형 가구들에 내 욕망을 투영했다. 현실 속 내 삶에는 할 수 없었기에 나를 대신하는 미미와 바비에게 멋진 가구를 사주며 대리만족을 한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그린 콘셉트의 주방 


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영국에서 직장을 잡았다. 몇 년 후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로 가구 가게를 돌며 소파와 침대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을 보며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골랐다. 여전히 비싼 돈을 들여 무언가를 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내 집에 어울리는 분위기, 딱 맞는 크기의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다. 바비와 미미, 그녀들의 가구보다 내 가구를 보는 일이 더 즐거워졌다. 


당신은 키덜트입니까


키드(Kid)와 어덜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라는 단어는 어린이가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에 열광하는 어른을 뜻한다. 키덜트가 되는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사실 요즘 장난감은 어른의 혼을 쏙 빼놓기에도 충분히 경이로운 게 많기는 하다. 심지어 가격. 


내 경우엔 결혼 후 가장 경제력이 부족하고 육아에 지쳤던 시기에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 하나만 가지고 공부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어린아이 둘을 키워야 했을 때 바비와 미미는 내게 위안을 주는 친구들이자 도피처였다. 그녀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고 엘레강스한 소파와 침대를 들여놔 주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메타버스에서 비슷한 욕망을 발견한다. 디지털 가상 세계인 메타버스. 그곳에서 나는 아바타에게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거울 삼아 다리도 길게 얼굴은 하얗게 만들어 준다. 방 안은 모던하면서도 초록 식물이 가득하게  꾸며준다. 그러니까 옛날 나의 바비와 미미 세상은 메타버스의 아날로그판 (단어가 좀 모순되지만) 쯤 되는 것이었다. 가상의 공간에 원하는 데로 꾸며줄 수 있는.   


오랜만에 옛친구들이 모였어요!


요즘은 창고 문을 열 때만 바라볼 뿐, 인형을 꺼낼 시간도 가구들을 배치할 시간도 없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들이 사랑스럽다. 고맙다. 퐁당퐁당 서툴게 건너왔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서 가끔은 웃음이 난다. 언젠가는 꼭 모든 세트를 장식해서 진열해두고 싶다. 이런 나에게 누가 '당신은 키덜트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네. 저는 키덜트입니다. 마론 인형과 가구 모으기는 저의 취미 중 하나였습니다.   




글 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취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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