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서 잠깐 스치며 만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이민을 온 거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 몇 초간 침묵을 지키곤 했다. 이민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남편이 유학 끝 무렵 전 세계 각지에 원서를 냈을 뿐이고, 그중 스코틀랜드에서 취업이 되었기 때문에 왔을 뿐이다. 중국에서 연락을 받았다면 그리로 갔을 테고 한국에서 되었다면 귀국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이민자냐고 물으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로 보자면 우리 가족은 이민을 온 것이 맞다. 국제연합은 3개월 이상 삶의 근거지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을 이민으로 정의한다고 하니 5년 넘게 살고 있는 우리는 명백한 이민자다.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 가족은 교민이나 교포라 불릴 수도 있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단어들은 여전히 낯설다. 다른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지 그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내 나라 아닌 외국에서 사는 우리는 결국 영원한 이방인이라고. 그냥 이방인이라고 했으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영원한’이라니! 내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 산다면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단 뜻이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불쑥 이 단어가 떠오를 때면 물 없이 떡을 먹다가 급체를 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을 치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이방인이란 다른 나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내가 대한민국을 떠나 이국의 땅에서 이방인이 되는 건 1 더하기 1이 2인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앞에 '영원한'은 그저 따라붙는 수식어일 뿐인데 나는 왜 그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걸까.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이방인 - 낯선 사람 - 어떤 무리 안에 낄 수 없는 사람 - 외로운 사람.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내가 의미했던 이방인은 일종의 "아싸"였던 거라는 걸 깨달았다. 영원한 아싸 라면 누구도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정착 초반의 내 행보는 인싸가 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사회 어디에든 속하면서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 교회도 가보고 저녁 합창단도 기웃거렸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이들 또한 아웃사이더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첫째 딸과 같은 반 여자아이들 10명 전부를 돌아가며 플레이 데이트를 잡아 집에 초대했다. 학교에서 하는 자원봉사활동도 빠지지 않았고 한복을 입고 한국 관련 특별 수업도 했다. 엄마들과 펍에서 저녁 모임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부족한 영어로 이것들을 다 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너무 힘을 들였던 게 문제였다. 나라를 바꾸어 그 사회, 문화, 사람들에 익숙해지는 데는 충분한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했거늘. 급한 성격의 특성을 한껏 발휘하여 모든 것을 당장 해놓고만 싶었다.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였던 건지도 몰랐다. 당연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점점 조급해졌다. 그러다가 순간순간 나가떨어지곤 했다.
잠시 머무는 여행자에게 베푸는 친절은 흔하다. 그렇지만 자기의 테두리 안에 끼워줄지 말지가 연결되면 영국 사람들은 대개 머뭇거리고 관찰을 한다. 가까운 사이가 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 이곳에 20년 넘게 사는 지인은 영국 교회 나간 지 8년이 되어서야 교인들과 마음을 틀 수 있었다고 했다. 시간이 걸렸지만 한 번 마음의 문을 열리니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정도가 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그 사실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직 내게는 간, 쓸개를 빼줄 정도의 친분을 나누는 사람은 없지만 이제는 힘을 좀 빼고 관계 맺기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섣부르게 다른 이의 마음을 얻으려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차 한 잔 나누며 수다 떠는 사이가 되는 사람들, 내가 힘들다고 하면 발 벗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값진 수확이다.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주는 거부감은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나나 남편은 우리의 선택으로 한국을 떠난 것이었다. 이방인으로 우리가 감수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건 마땅히 우리의 몫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부모를 따른 것뿐이었다. 부모 입장에서 그들이 커서 살아갈 세상에서는 이방인이 아니길 바랐던 것 같다. 취업을 할 때 동양적인 이름 때문에 서류조차 통과되지 않았다는 지인들의 경험담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에 산지 5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두 번의 월세집을 거치고 시골마을에 우리 집도 샀다. 초등학생이던 첫째는 게임마니아 중학생이 되었고 두 살배기 아가였던 둘째는 유튜브로 팝송을 즐겨 듣는 어린이가 되었다. 작지만 보람 있는 나만의 종이접기 사업도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잘 살아온 걸까? 나는 나름 잘 정착했다고 믿는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좌절하며 힘을 내는 과정을 지나 지금은 무리 없이 일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잘했다.
정신과 의사인 이근후 작가는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이라는 책에서 자기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유쾌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 여러 번 강조했다. 이제 나도 인정할 건 해야겠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여기 계속 산다면 영원한 이방인 맞다. 그리고 이방인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거다. 아이들의 미래는 그들이 개척해야 할 문제다. 부모로서 경쟁 심한 교육환경 대신 느긋하고 여유로운 교육을 선사했으니 나머지는 우리 아이들을 믿기로 하자.
이제 나 자신에게 수고 많이 했다고 말해줄 차례이다. 앞으로 해야 할 수고와 고생이 더 클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왔다고, 이 정도 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는데 최선을 다했으니 멋졌다고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후회 따윈 하지 말라고 격려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지나 온 5년의 나를 잘 보듬어야 한 발짝 더 크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가슴 가득 더 큰 사랑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만 바람의 땅 스코틀랜드에서 막춤 한 번 신명나게 출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