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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인들에게 킬트를 접어 팔기 시작하다

비로소 찾은 내 자리를 단단히 지어보겠습니다

by 영글음

돌파구가 필요했다. 영국 사람들에게 종이접기 작품으로 어필하려면 한글 이름 써주기 말고 좀 더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다가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주얼리나 모자이크 등 센터 만들기 교실에서 배운 여러 주제들이 있었지만 꼭 종이접기를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종이를 잘 접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40년 이상 모르고 살던 새로운 발견이다.


초등학생도 하는 그 쉬운 걸 잘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능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접어 놓은 결과물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모서리와 모서리, 선과 선이 정확히 만나고 가능한 한 접힌 선은 보이지 않게, 구겨짐 없이 마치 다려놓은 것처럼 쫙. 그래야 예쁘다. 살면서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완벽주의나 집안 가구들을 직각으로 맞춰놔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이 종이 접기에 안성맞춤이었나 보다. 더군다나 종이 접기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과 뿌듯함을 선사했다. 유튜브를 보며 조그맣게 무언가를 접어 내는 일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어릴 적부터 미니어처 덕후였는데 비록 종이지만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게 되니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여러 고민 끝에 결혼 선물용 액자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신랑과 신부의 옷을 색종이로 접고 아래에 그들의 이름, 결혼 날짜를 써주는 것이다. 고객 맞춤형 주문제작이다. 신랑의 옷은 일반 양복과 킬트 두 종류로 했다. 스코틀랜드 남자들은 결혼할 때 그들의 전통의상인 킬트를 입는다. 킬트는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들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을 여행하다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백파이프 연주단이 입는 것도 신기하고 멋지지만 그것보다는 결혼식 킬트 정장을 보면 훨씬 매력적이다.


결혼식5.resized.jpg 스코틀랜드 결혼식 (이미지 출처: https://www.weddicious.com)



핸드메이드 사이트에 정식으로 올리기 전, 시범판매 삼아 조금 싼 가격에 소셜미디어 마켓플레이스에 올렸다. 그곳에 올려 고객들의 반응을 먼저 알아보고 싶었다. 한글 액자처럼 몇 주가 지나도 무반응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새로운 시도는 신나지만 두렵기도 하다. 마음속으로 '실패한다 해도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고 주문을 여러 번 걸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올린 지 몇 시간이 안되어 메신저로 여러 질문과 주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한글 액자를 팔았을 때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번엔 김칫국 안 마시려고 했는데.


고객의 요구는 기대 이상으로 다양했다. 그중 킬트 무늬에 대한 요청이 가장 많았다. 우리는 체크무늬라 부르는 격자무늬를 이곳에서는 타르탄이라고 하는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가문마다 고유한 무늬의 타르탄이 있는 집이 많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타르탄과 비슷한 킬트를 원했다. 어쩔 땐 신랑이 활동하는 축구팀의 타르탄을 요청하기도 했다. 다양한 무늬의 천을 새로 사야 했다.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편집하여 출력해서 만들기도 했다.


드레스에 뭘 붙여달라는 요구도 많았다. 내가 맨 처음 만들었던 드레스는 A4용지를 잘라다가 접고는 끝이었는데 킬트에 비해 너무 단순해 보이기는 했다. 고객들은 그것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 비즈를 붙여주면 안 되겠냐, 레이스를 달아 달라, 긴소매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 부케도 해달라 등등을 요청했다. 어떤 고객은 결혼식 사진까지 보내며 비슷하게 해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처음엔 이런저런 고객들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이름과 날짜만 바꾸어 샘플과 똑같이 만들어주면 되겠지 했는데 왜 그렇게 해달라는 게 많던지. 게다가 뭘 더 해주면 가격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건데도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혹여라도 고객이 떠나갈까 봐 스몰 마인드 트리플 A형인 나는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고객들의 요구사항에 맞춰 무료로 업그레이드시켜주었다. 그러면서 나만의 드레스 디자인을 개발하고 면사포를 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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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요청에 따라 만드는 스코티쉬 웨딩 액자 - 신랑 옷이 킬트라는 게 특징



약 한 달간 마켓플레이스에서 서른 개가 넘는 액자를 만드는 동안 만났던 고객을 내 나름대로 "초기 고객군"이라 이름을 붙였다. 처음엔 무료로 해주었다고 생각했던 추가 서비스가 살짝 바꿔 생각하니 그들이 내게 아이디어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혼자서는 절대 생각해내지 못했을 다양한 의견들을 나에게 공짜로 준 셈이다. 그들은 내게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 줬다. 내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그러니 무료는 무료가 아니었다. 그들 덕분에 정식 판매 사이트에는 훨씬 고품질의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었다. 스코티쉬 웨딩 액자는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이다.


처음 제품을 올린 이후 9개월 동안 지금까지 약 8-90개 정도의 스코티쉬 결혼 액자와 3-40개 정도의 일반 결혼 액자를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킬트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의미를 두고 결혼식 선물로 하려는 것일까. 액자를 만들고 고객과 대화를 하며 내린 나의 결론은 킬트는 그들이 스코티쉬라는 자부심을 나타내는 최고의 상징이며 집안이든 축구팀이든 강한 소속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소중한 의미를 작은 액자에 담아 결혼식 날 선물한다. 고객들은 예쁘다, 새롭다, 고맙다 등등의 리뷰를 남겼다. 결혼식이라는 축복스런 행사에 내 손끝이 도움이 된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포근해진다.


고객의 요구는 점점 늘어나 게이 커플의 옷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 중국 결혼 의상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 등도 있었다. 그러다가 아예 결혼식 사진을 보고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제품을 론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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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사진: 일반 웨딩 / 가운데 사진: 중국 전통 웨딩 / 오른쪽 사진: 게이 커플 웨딩, 빨간색은 러시아 의상



준비기간부터 치면 어느덧 1년이 되어가는 수공예품 판매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웨딩 액자뿐 아니라 각종 이벤트를 위한 메시지를 담은 액자도 만들었고, 여러 동물들을 커플로 접은 웨딩 카드나 생일 축하 카드 등도 선보였다. 제품 라인을 확장해 마크라메 (매듭) 공예품도 팔기 시작했다. 지난주에는 크리스마스 페어에도 참가했다.


마흔 살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내가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꼬맹이들이나 하는 색종이 접기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팔 계획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때때로 재밌고 자주 어이가 없다. 가든센터에서 시작했던 볼런티어가 갑자기 만들기 교실로 바뀌고, 거기서 경험을 얻고, 그걸 남편이 권하고. 무서울 것 같은 현실을 피해 달아난 곳이 하필 거기였다니.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기회가 이렇게 작은 사업으로 발전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여기까지 왔다.


가야 할 길은 멀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무작정 덤볐으나 시작하고 보니 홍보, 마케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제품도 계속 내야 한다. 할 게 많아 마음이 급하고 늘 시간에 쫓기지만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설레기도 한다. 한국을 떠나 올 때 사회에 내 자리를 두고 나온 지 10년, 비로소 나의 새 자리를 찾은 것 같다. 그것이 강한 벽돌집이 될지 훅 한 번의 바람에 날아가는 지푸라기 집이 될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오늘만큼은 신나게 종이를 접을 것이다. 내가 만든 작품이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나를 찾는 모든 고객들에게 함박웃음으로 퍼지길 바라며 즐겁게 종이를 접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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