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종이 접기를 시작한 사연
남편 따라 떠났던 미국에서 나는 유학생 와이프였다. 그 말속에는 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유학생 가족 비자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돈벌이를 하면 법을 어기는 거다. 한국에서 10년 간 사회생활을 했던 나는 미국 5년의 기간이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공허하고 답답했다. 그랬기에 그의 공부만 끝나면 사회에 복귀하는 걸 꿈꾸곤 했다.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에 왔다.
낯선 곳이었지만 어쨌든 이 나라에서는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가 나왔다. 하루빨리 나만의 자리를 찾아 돈도 벌고 자아실현 같은 멋진 단어도 척척 해 내고 싶었다. 그래서 도착한 순간부터 무수한 가능성을 들쑤셨다.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보조 주방장을 구하는 곳에 지원했다가 면접까지 보고 떨어진 경험을 필두로 하여 김밥 장사, 컵밥 장사, 구매 대행, 택배 대행, 빈티지 제품 판매, 여행 가이드, 한글 수업, 한국 음식 강좌, 급기야 정원사에서 번역가까지(한 때 몇 년 간 영어 공부에 전념해 번역가가 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있었다는).
내 성격으로 보자면 하나를 골라 시작했을 법도 한데, 그러질 않았다. 그동안 둘째 딸이 아직 어려 무언가를 시작할 만한 시간을 내기도 어려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위에 나열한 것 중에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어디엔가 내 자리를 꼭 찾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마흔 넘어 시작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 평생 해도 괜찮을 만한 걸 하고 싶었다.
플랜 B. 대학에 가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직업에 맞게 공부를 하면서 학위도 따고 영어실력도 키우면 뭔가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학이 가능한 대학교 홈페이지를 찾아 학과를 검색했다. 한 학교에서 임상영양학과를 발견했다. 옳거니, 이걸 공부하면 되겠구나! 한국에서 식품영양학과를 나왔으니 공부하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영국에서 영양사라고 하면 모두 임상영양사로, 병원에서 환자식을 맡거나 환자들의 식이상담을 담당한다. 오, 좀 멋져 보인다.
그런데 가만, 영양사가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20여 년 전 내 길이 아니라며 내 발로 뛰쳐나온 영양사를? 병원이 아닌 증권사 사원식당에서 일했으니 다르려나? 과연? 입학 준비기간을 포함해 약 6년의 시간을 공부에 올인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따라갈수록 사건이 미궁 속으로 빠지려 할 때 남편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있지, 영양학과 공부도 어렵겠지만 졸업해서 직장 생활하는 게 생각과는 다를지 몰라.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하고 일하면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걸. 상담하려면 영어 많이 쓸 텐데."
두둥! 꿈꾸는 자의 행복 위로 던져진 날카로운 현실 한 조각에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솔직히 직업을 찾은 뒤의 일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전까지의 과정도 나에게는 워낙 벅찬 일인지라 영양사가 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 와서 5년 간 영어 쓰는 사람들과 일하며 부대끼는 남편의 조언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임상영양사라면 사람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 만약 먹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을 먹으라고 했다가는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는 말 끝에 덧붙였다.
"차라리 볼런티어 하면서 배웠던 걸 만들어서 팔아보면 어때?"
수공예품 판매. 어쩌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공부를 시작해 보지도 않은 채 그 후의 일을 상상하니 더 큰 고난이 닥쳐올 것 같았기에 일찌감치 마음을 돌린 것이다. 나는 용감한 편이지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크게 걱정하는 스타일이다. 아니, 용감한 것도 내가 안전하다고 정해 놓은 틀 안에서 그런 것이니 진실은 소심쟁이에 겁쟁이, 쫄보다. 그래서 남편이 툭 던지듯 내뱉었던 권유를 덥석 물고야 말았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플랜 C였다.
만들기 교실에서 볼런티어를 하면서 익혔던 여러 가지 중 액자 안에 무언가를 넣어 팔아 볼까 계획을 짰다. 매니저를 도와 지난해에 크리스마스 페어에 참가했을 당시, 주얼리를 팔았던 우리는 판매가 저조하데 비해 바로 옆 테이블에서 액자 속에 단추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팔았던 팀은 장사가 잘던 되었던 걸 기억해냈다. 한국에서라면 별로 팔릴 것 같지 않은 제품이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우리 것 말고 액자를 사 갔다. 그게 그들의 문화코드였다.
몇 주 간 고심 끝에 사람들의 이름을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써주는 아이템을 정했다. 아이들 학교 행사에서 한국 관련 이벤트를 할 때 종종 하던 것인데,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던 게 떠올랐다. 마침 BTS가 한글의 글로벌화를 도와주고 있으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만 써주면 재미없으니 더욱 한국적이게 3D 느낌으로 딱지를 접어 붙였다. 이왕 하는 김에 전통매듭도 배워 만들어 붙였다.
이 제품들을 소셜미디어 마켓 플레이스에 올렸던 게 1년 전이다. 그러나 올리기만 하면 대박 날 줄 알았는데 한 달 동안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아쉽게도 스코틀랜드까지는 한글이 글로벌화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보다니. 다시 플랜 B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핸드메이드 사이트에 본격적으로 올려서 팔려면 몇 가지 기본 제품은 더 있어야겠다고 생각해 신제품 창작에 몰두했다. 전통매듭은 너무 어려워 포기. 종이접기로 이것저것 더 만들어 냈다.
제품들을 올리고 한 달이 훨씬 지난 12월 23일, 메시지가 왔다. 남자 친구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고 있는데 내일까지 한글 액자 하나를 만들어 줄 수 있냐는 내용이었다. 오 마이 갓!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의 첫 고객이 생긴 것이었다! 주문을 한 사람이 바로 옆동네라 당장 해주겠다고 한 뒤 딱지를 접었다. 그녀의 주문대로 Chris - 크리스라는 남자 친구 이름을 한글로 써서 곱게 액자에 담아 다음날 배달을 나섰다. 첫 번째 고객이었던 데니는 급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면서 팁으로 원래 가격에 2파운드를 더 얹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싸, 조짐이 좋았다. 이제 터지기 시작한 건가? 자신감이 하늘 높이 올라간 끝에 나는 올해 초 핸드메이드 전문 판매 사이트에 아홉 개의 초기 작품을 올렸다. 이제 몰려오는 고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판이었다.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CEO가 되는 건가? 주문이 넘쳐나 내 시간이 없어지면 어쩌지? 김칫국을 실컷 들이켰다. 짜고도 달콤한 그것을 사발째 마시며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3개월 동안 주문 개수는 제로, 0. 방문자 수가 0인 날도 수두룩하다는 현실이 얄밉게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