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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책보고 꿈을 쫒는 여자들

외국 살아도 꿈은 늘 꾸어요

by 영글음

스코틀랜드에 와서 가깝게 지내는 한국 사람 둘이 생겼다. E와 J. E는 나보다 세 살 위 언니이고 J는 네 살 아래 동생이다. 둘 다 한국에 살다가 남편이 이곳에 직장을 구하면서 이민을 온 케이스다.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 다녔고 사는 곳이 가까웠던 덕에 영국에 오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자주 차를 마셨다. 내키면 점심도 같이 만들어 먹었다. 그러면서 외국 살면서 힘든 점을 공유하고 위로하며 관계를 이어나갔다.


우리 셋은 성격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지만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잘 어울렸다. 물론 공통분모는 존재하기에 내가 "숭그리 당당 숭당당"을 외치며 다리에 힘을 풀고 80년대 개그맨 흉내를 내면 E는 짱구춤으로 화답했고 제일 어린 J는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니, 이 언니들이!'라는 표정으로 혀를 차곤 했다. 끝마무리는 대부분 깔깔깔 웃음이다.


가끔 수다를 떨려고 그들에게 전화를 하면 마트에 있을 때가 많다. 반대로 그들이 카톡으로 어디인지 물을 때 내가 장을 보고 있는 경우도 다반사다. 싫든 좋든 우리는 전업으로 주부였으므로 마트에서 먹을 재료를 사는 일은 하루 일과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제 장 봤는데 왜 오늘 먹을 게 없을까?", "우리는 맨날 장만 보네" 이런 말이 오갔던 어느 날 우리들의 카톡방 이름을 <장보고>라 칭하고 셋의 모임을 장보고 모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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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니 스코틀랜드에서의 삶은 대체적으로 괜찮았다. 아이들을 한국의 입시경쟁에서 해방시켰고 저녁과 주말은 가족이 함께 보냈다. 휴가 때면 하일랜드나 잉글랜드 아니면 다른 유럽으로 여행 갈 수 있으니 겉으로 보면 나름 행복한 삶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았다. 누가 나에게 네 삶에 만족하니? 충족하니?라고 물으면 자신 있게 어!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영어가 부족해서?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물론 그것도 한 몫하겠지만 딱 들어맞는 이유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파고들자 이 사회 어느 곳에도 내 자리가 없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났다. 일을 하고 싶었다. 직업을 갖든 뭘 하든 돈을 벌고 싶었다. 경제적으로 좀 더 윤택해지길 바랐고 영국 사회의 어느 곳에선가 당당히 내 자리를 찾기 원했다. 하지만 내 앞에 놓은 현실은 숲이 우거진 아마존 정글. 영국 애들도 구하기 어렵다는 일자리를 유럽의 그것도 영어가 유창한 젊은 아이들과 경쟁하며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E와 J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한국에서 E는 언어치료 전문가였고 J는 정유회사 연구원이었다. 둘 다 좋은 대학을 나와 석사까지 마쳤다. 내 보기에 살림만 하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취업의 길이 어렵다고는 해도 그 어려운 걸 해내려고 스펙을 쌓고 바늘구멍을 뚫어 사회로 진출하는 여성의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짧든 길든 사회생활을 경험해 본 여자들이 낯선 땅에 와서 전적으로 주부만 하려니 그 또한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다.


"대학교 앞에서 컵밥을 팔아보면 어떨까? 불고기, 제육볶음, 닭갈비 같은 걸 얹어주는 거지."


"김밥이 낫지 않을까? 안에 재료를 다양하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베지테리언 김밥도 팔고."


"파머스 마켓에서 가판을 세워볼까?"


우리는 모일 때마다 무슨 사업으로 돈을 벌지 궁리를 했다.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적도 있었고, 진지하게 사업 시작의 조건을 시청에 알아보기도 했다. 음식을 만드는 장소에 싱크대가 최소 2개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에서 우리는 먹거리 사업 계획을 철회했지만 말이다. 어느 날 E가 말했다.


"모임 이름을 바꾸어야겠어. 이름대로 가는 것 같아. <장보고 책보고>로 하자."






2년 전 어느 날 장보고 책보고 모임날이었다. J가 갑작스러운 뉴스를 발표했다. Brew(양조) 학과 석사에 합격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영주권을 따면서 봐 두었던 아이엘츠 영어 점수가 아까워서 지원을 했는데 떡하니 붙었다고 했다. 떨어질까 봐 미리 말을 안 한 터라 우리는 합격소식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J가 썩히기 아까운 이력을 계속 이어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몇 달 후 E 역시 컬리지 합격이라는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J는 개인 사정으로 입학을 다음 해로 미루는 동안 E는 컬리지 1년 과정을 마치고 작년 9월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그래서 <장보고 책보고>는 두 명이나 학생의 신분이 되었다. 거짓말처럼, 이름을 바꾼 뒤 장도 보고 책도 보게 된 것이다.


E는 지난 1년간 수업과 함께 병원을 돌며 실습을 병행했다. 매번 사수가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하곤 했지만 공부하는 게 재밌다고 했다. J는 내가 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교과서를 들추며 리포트를 써냈다. 졸업 후 직장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포기는 하지 않았다. 둘은 2년 차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제 내 차례인가? 그들이 한 발짝 나아가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자극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하기는 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누구도 내게 일자리를 주기는커녕 단돈 1파운드도 주지 않았다. 하다 못해 놀이터 흙이라도 파야 누군가 떨어뜨렸던 동전 하나를 찾을 수 있고, 마트 옆에 앉아 주머니를 두고 구걸이라도 해야 뭐가 생긴다. 그 사실이 때론 나를 강하게 압박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인 것을.


그리고 마침내 나도 나만의 첫 발걸음을 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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