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 산업의 대서사시
'투자의 진화' 를 읽었다. 사실 이 순간에도 이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써야 할지 고민이다. 왜냐하면, 나만 이 책을 알고 싶어서. 우리와 경쟁하는 다른 투자사 분들이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다. 그만큼 벤처투자자로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많은 것들을 배웠고, 또 고민해야 할 큰 숙제들을 얻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Power Law (멱법칙)' 이다. 원제만 보자면 짐작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 책은 벤처캐피털의 내밀한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 '역사'라면 좀 지겨울 것 같지만, 벤처캐피털이라는 산업을 그 태동부터 시간순으로 다룬 '르포' 혹은 '대서사시'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벤처캐피털이라는 개념이 (아서 록이 '8인의 반란자'를 후원하여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탄생하면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이후로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최근까지 어떻게 이 업이 발전해왔는지를 실로 내밀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멱법칙'은 대부분의 투자가 망하더라도, 소수의 그랜드 슬램을 터뜨림으로써 수익을 올리는 VC의 투자 전략을 지칭한다.)
내가 '르포'에 가깝다고 언급한 것은 이런 벤처투자 업계를 들여다보는 내밀함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어떤 책이나 아티클보다 자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아내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투자 딜의 협상 등에 대한 이벤트에 대해서 개인 간의 대화 수준의 디테일한 서술이 넘쳐난다. 그런 디테일한 서술이 뇌피셜로 쓴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가는 것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레퍼런스이다. 이런 방대한 자료 조사를 대체 어떻게 했을까 싶다. 읽는 내내 이 정도 노작이면, 2022년도 파이낸셜 타임즈, 테크크런치, 이코노미스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을 만하다 싶었다.
벤처캐피털의 역사와 그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애플, 구글, 시스코, 야후, 페이스북, 이베이, 위워크, 우버 등이 작은 스타트업이었던 시절에 벤처캐피털들이 어떻게 투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놓쳤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들은 이러한 사례들을 VC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여기에 투자한 VC들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지만, 이런 기업들이 작은 스타트업이었을 시절에 여기에 투자하기로 한 의사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외부자의 입장에서 알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이 책에는 우리가 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클라이너퍼킨스, 세콰이어 캐피털, 벤치마크, 엑셀, 안드레센 호로위츠, 와이컴비네이터, 파운더스 펀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타이거 글로벌과 손정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벤처캐피털 (혹은 그와 비슷한 자본) 들이 어떤 구조를 갖추고, 어떤 고민을 했으며, 어떤 의사결정을 내렸고, 어떻게 흥망성쇠를 거쳤는지가 나온다.
한 사람의 벤처투자자로서 내가 가장 크게 관심이 갔던 것은 이런 위대한 투자사들이 어떻게 위대한 투자를 하게 되었는지, 혹은 놓쳤는지 하는 것이었다. 벤처투자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흥미진진하고도, 흥분되고도, 또 고민스러운 사례가 차고 넘친다.
명망 높은 VC들도 인도에서 갓 돌아와 몇주 동안 샤워를 하지 않고 미팅에 들어오는 스티브 잡스를 놓쳤고 (헐값이 지분을 사라는 권유를 무수히 많은 투자사, VC들이 거절했다), 의도적으로 잠옷을 입고 미팅에 지각하면서 VC에게 반감을 표출한 마크 저커버그를 놓치고, 중국의 작은 도시에서 교사 출신으로 전자상거래 회사를 창업한 마윈을 놓치고, 또 반대로 테라노스와 위워크에 투자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한때 영광을 맛봤던 클라이너 퍼킨스는 쇠락하고, 위대한 투자자였던 존 도어도 그런 성과를 지속적으로 이뤄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손정의도 야후에 앉은 자리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면서 1억 달러를 투자하여 역사상 가장 큰 수익을 올렸으나, 같은 방식으로 위워크에 투자했다가 (노이만을 만난 지 12분 만에 44억 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결국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다. (이 책에서는 손정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다.) 벤치마크는 우버에 대한 투자가 결과적으로는 큰 수익을 올렸으나, 폭주하는 트래비스 캘러닉을 CEO에서 몰아내기까지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반면 세콰이어 캐피털은 체계적인 구조와 다양성, 내부 관리 시스템 덕분에 우여곡절을 거쳐서 다시 큰 성과를 내는 자리에 군림하고 있고, 인도와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에서 세콰이어 캐피털의 성공을 복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벤치마크는 단순히 투자금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참호' 속으로 들어가 창업자들과 동고동락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겠다는 전략을 취했고, 반대로 피터 틸의 파운더스 펀드는 반골 기질이 강한 '괴짜' 창업자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을 지도하거나 방해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전략을 취했다.
a16z는 IT 전문가 출신의 창업자들로 구성된 밸류애드를, 해커들의 구루였던 폴 그래이엄은 우연한 기회에 다수의 초기 기업의 배치에 소액을 투자하는 와이컴비네이터를 시작하게 되었다. DST와 타이거 글로벌은 상장을 앞둔 회사 (ex. 페이스북)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을 의결권 요구 없이, 직원들의 구주 매입을 섞어서 투자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벤처 투자 업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다양한 투자사의 구조와 전략, 철학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은 없을 것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투자에 대한 철학과 방향성, 자본, 인력, 리소스에 맞는 구조와 전략이 있을 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더하자면, 상당히 많은 수의 성공적인 투자에 '운'이 많이 관여한다는 점. 그런 운은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벤치마크의 '준비된 마인드', 세콰이어 캐피털의 '스카우터'),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컨트롤 할 수 없는 운도 (더 많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느꼈다. (a16z의 성공도 많은 부분 시기적 운에 따른 것이라고도 설명한다.)
또한 좋은 딜을 따내기 위해서, 유명 VC 들이 전화 한통에 하루 아침에 외국으로 날아가고, 밤을 새워 설득하고, 갖은 인맥을 동원하고, 온갖 수모를 견뎌내는 것에서도 많은 것들을 느꼈다. '나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이 책은 벤처캐피털 산업에 대한 대서사시이다. 벤처캐피털이라는 폐쇄적이고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심지어는 내부인들도 사정을 잘 알기 어려운) 산업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흥분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현직자들은 특히 공감할 부분이 많을 테고, 이 업계로 진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 업에 대한 환상을 없애고, 현실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반대로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뭔 소리지?' 싶을 수도 있다.
연말연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우리가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 우리가 성공적으로 투자했던 회사들과, 우리가 놓쳤거나 투자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딜에 대해서. 내가 했던 말들과 내렸던 의사결정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또 이런 책이 씌여진다면, 이런 벤처투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하게 DHP가 자리 잡을 수 있기를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