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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육 Jun 10. 2023

서울 여행 - 2

잠을 설쳐도 여행을 망칠수는 없었다

 서울여행의 첫날 밤을 잘 마무리한 줄 알았는데, 끝자락에서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장기 숙박을 해야 했기에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오직 가격만 보고 고른 값싼 호스텔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기고 만 것이다. 체크인할 때 확인한 방 위치는 입구, 그러니까 리셉션과 주방 바로 건너편이었다. 그저 들락날락하기 좋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새벽 한 시쯤 잠에서 깼을 때, 문 밖에서 왁자지껄한 외국어가 들려왔다. 주방이 너무 가까운 탓에 주방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소음이 여과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고막을 때리는 말소리와 웃음소리를 애써 외면하려 30분을 누워있어 보았지만 소리가 줄어들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나서 리셉션에 있는 이어 플러그를 챙겼다. 그리고 주방 테이블을 가득 채운 외국인 일가족 - 8명 정도 되어 보였고 테이블엔 소맥이 놓여있었다 - 에게 새벽 한 시가 넘었으니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참고 참았던 말을 하고 말았다. 방문을 닫고 이어 플러그를 꽂고 자리에 누웠다. 20분쯤 지나니 외국인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놀러 온 사람들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미안했지만, 사람은 잠을 자야만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잠에 들 수 없었다. 한번 깨어 애매한 새벽 한가운데 버려진 뒤 다시 잠에 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끔뻑거렸다가, 핸드폰을 뒤적이다, 결국은 다섯 시에 잠에 들고 말았다.

 그리고 여섯 시 반이 조금 넘었을까, 갑자기 울려온 재난문자에 다시 잠에서 깨고 말았다.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그런 내용의 문자가 와 있었다. 창 밖에서는 재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적의 발사체가 어쩌고 저쩌고... 전쟁이라도 난 건가? 깬 지 1분도 되지 않아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네이버를 열었는데 서버가 터져서 열리지 않았다. 정말 전쟁이 난 건가?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재난문자가 보내진 이유는 북한의 위성 발사 때문이고, 결과적으로는 오발송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잠을 설친 마당인데, 국가가 그 짧은 잠마저 반토막을 뺏어가 버려 비몽사몽 한 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말았다.

 여행이니 조금 느슨하게 일어나서 늑장을 부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엄연히 오늘과 내일은 교육출장 명목으로 서울을 온 것이었기 때문에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세 시간도 못 잔 상태에서 교육을 제대로 들을 수는 있을지 걱정하며 교육장으로 향했다. 마치 참치캔의 기름을 꾹 짜내는 모습처럼 사람들이 구겨져 굴러가는 급행 지하철을 보며 서울의 삶이 다 좋을 수는 없다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다행히 급행을 타지 않아도 돼서 기름을 머금은 참치캔처럼 지하철에 들어앉아 교육장으로 향했다.

 교육은 피곤한 정신상태로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보고서 교육이라는 것은 결국 글쓰기 교육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고,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겐 언제나 재미있는 것이라서 재미있는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프리랜서 강사님과 나눈 이야기도 좋았다. 자기 입장이 아닌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서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계속 갈고닦는 프리랜서로서의 삶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퇴근하고는 이태원역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여 먼저 한강진역에 들렀다. 길거리에 늘어선 유명한 가게들을 보니 서울에 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체감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논픽션이나 이솝이나 그런 매장들을 들어가지는 않는 내 모습을 보면 서울을 온전히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한강진에서 이태원역까지 길을 걷는 순간을 내 나름대로 즐겼다는 것이다. 엘피를 살 일이 없지만 바이닐 앤 플라스틱에 들렀다. 아는 앨범아트 몇 개를 찾아보고는 다시 길로 나섰다. 딱히 뭘 하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멋진 것들 속에서 시간을 보낸 자체가 즐거웠다.

 퇴근한 친구를 이태원역 앞에서 만났다. 할랄가이즈를 갈지 왕타이를 갈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전날 잠을 못 잔 피로, 그리고 끝까지 차오른 허기 때문에 멀리 갈 수가 없어서 역에서 가까운 할랄가이즈로 향했다. 예전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몇 번 접해본 할랄가이즈는 갈 곳도 많은 이태원에서 다른 가게를 제치고 종종 찾는 가게가 되었다. 이태원 한정 소울 푸드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극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건강하고, 깔끔하면서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이런 음식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할랄가이즈가 처음이라는 친구는 제일 큰 뉴욕 사이즈를 싹싹 비웠다. 처음 먹는 사람의 입맛에도 썩 나쁘지 않은 음식이라는 뜻일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해방촌까지는 못 갈 것 같았는데, 할랄가이즈를 먹고 힘을 얻어서 해방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태원역 근방에서 식사를 마친 뒤 해방촌까지 걷는, 내 나름의 루틴을 오랜만에 하니까 좋았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해방촌 입구에 도착했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방법 중 하나는 친구와 함께 걷는 것이라는, 어디서 본 것 같은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해방촌은 여전했다. 찻길에 반쯤 먹혀버린 인도를 따라 언덕길을 올랐다. 건물 숲 위로 달이 떠 있었고 더 멀리는 남산타워가 보였다. 길가에는 들어가고 싶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적당히 언덕을 오른 뒤, 더 괜찮은 가게는 없을 것 같아 지나오며 찍어두었던 술집을 가기로 했다. 친구는 맥주를, 나는 칵테일을 마셨다. 칵테일이 너무 저렴해서 놀랐다. 소주를 조금 섞어야 이 가격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맛은 주문한 칵테일 그 자체의 맛이 나서 소주를 좀 섞었다 해도 크게 불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임슨 하이볼과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칵테일 두 잔을 마시며 사는 이야기와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인생의 같은 지점을 지나고 있는 또래이기에 이고 있는 고민의 모양도 비슷했다. 서로 비슷한 형태의 짐을 내보이는 대화는 술술 이어졌다. 사실은 비슷한 또래여도 대화의 결이 마냥 맞는 것은 아니기는 하다. 이 친구는 참 결이 비슷하다는, 그래서 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친구는 한 달 안에 내가 사는 곳으로 놀러 오겠다고 해서, 놀러 오면 극진히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멀리 있어서 쉬이 만날 수 없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사이인 게 좋았다. 남산타워와 달이 있는 풍경을 등지고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도착해서는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방향으로 향했다.

 돌아온 숙소의 주방은 어제와는 달리 조용했다. 어제보다 술을 덜 마신 것 같은데 더한 것 같은 취기, 전날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해 쌓일 대로 쌓인 피로, 그것들 덕분인지 씻고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새벽에 한번 깬 것 같기는 하지만, 어제처럼 새벽을 헤매는 일 없이 손쉽게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서울 여행의 이틀째가 원만하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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